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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기 Jul 11. 2021

7월 11일: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 D-1

불안 다스리기


   자정이 막 넘은 시각, 잠이 안 와 폰으로 뉴스를 휙휙 넘기고 있는데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가 내일부터 시행된다는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순간 깜짝 놀랐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벌써 하루가 갔고 내일이면 시작되는구나 싶었다. 클릭 순으로 정렬된 것 같은 뉴스 화면에 코로나 관련 소식은 클릭할수록 끝없이 이어졌다. 0시까지 추정된 확진자는 최소 1200명 이상~최고 1300명은 될 거라고 하고(결국 1300명을 넘었다), 어떤 기사에서는 수도권이 아닌 곳으로 놀러 간 사람들을, 또는 불야성인 술집 거리 사진과 함께 여전히 밤문화를 즐기는 2030을 비판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한쪽에서는 손님이 없어 썰렁한 홍대 거리를 기삿거리로 올려뒀다. 아주 혼란스러운 사바세계 구만, 하면서 불을 끄고 누웠더니 의외로 금방 잠들 수 있었다.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는 게 낫지, 싶었나 보다.


  이렇게 잠이라도 잘 수 있는 시간이 아닌 때 불안해지면 내가 어김없이 하는 행동이 있는데, 타로 어플을 다운로드하여 계속 타로 카드를 뒤집어보는 것이다. 경험상 그렇게 본 타로 결과가 전혀 맞지 않고, 반복할수록 다른 결과가 나오며, 심지어 결과를 기억하지도 못해서 그 행위가 무의미하고 무용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한다. 그리고는 좋은 해석이 나오면 희망에 차올랐다가, 나쁜 해석이 나오면 조심해야겠군... 이 생각을 반복하며 일희일비한다. 지겨워지면 마침내 나가기 버튼을 누른다. 결과에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면서도, 그동안 불안은 뒤집은 타로카드의 수의 곱절만큼 쌓여있다. 왜 이런 행동을 할까, 진지하게 고민해봤는데 단 한순간이라도 나에게 닥쳐올 미래를 알고 있다는 어떤 안정감을 바라는 것 같다.


하지만 청개구리같이, 나는 미래를 모두 아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지, 소설 내용인지 설화인지 분명치 않지만 어느 순간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인도의 어느 점쟁이의 움막에는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의 운명까지 모두 적힌 잎사귀들이 가득한 상자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나는 나의 잎사귀를 얻는 것은 원치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결말을 다 알면 재미없잖아.


그렇다면 운명은 정해져 있는 걸까? 앞서 말한 나의 불안 행동과 선언은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전제한다. 어떤 이는 과학적인 시각에서 접근해서, 4차원 중의 축 중의 하나가 시간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시간을 축으로 과거, 현재, 미래가 일직선상에 펼쳐져 공간을 이동할 뿐이라고 한다 - 사실 문 송해 서 제대로 이해 못했다 - 그래서 모든 것이 정해져 있기에 우리의 운명 또한 정해져 있다는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4차원에 대해서 아직 연구 중이라 확실한 것은 없으니 뭐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넘어가자.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기 위해 검색하면서 내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4차원 공간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는 ‘기사로 확인된 사실’ 단 하나였다)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대대손손 천주교인 집안에서 태어나 모태신앙으로 세례를 받고, 성당에서 아주 많은 추억을 쌓고 자랐으며, 지금도 주일미사를 빠짐없이 보는 천주교인이다. 앞에서 타로와 과학을 왔다 갔다 하다가 갑자기 천주교인인 걸 밝히자니 머쓱하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갑자기...? 싶을 것이다. 이번에는 종교적 관점에서 운명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려고 한다. 천주교에서는 운명은 없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사주팔자는 없고, 오직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신이 있다고는 믿는다. 신의 존재는 모태신앙 종교 입문자 특유의 주입식 세계관은 아니고 아주 많은 갈등과 일화를 통해 믿게 된 것인데... 그 신이 운명은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신과 인간의 의지는 대립할 수 있는가? 초등학교 이후로 교리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손에 꼽는 날라리 신자의 무지가 여기서 드러난다. 아아, 내 머릿속이 또다시 복잡해진다.


운명이 없다면 운명에 대한 개념은 왜 생겨난 걸까? 여러 가능성을 실험한 끝에 결국, 내가 겪고 있는 문제이기도 한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으로 귀결된다. 있어 보이게 한번 써봤는데, 그냥 사는 게 한 치 앞도 알 수 없으니 어떻게 날벼락이 떨어질지 몰라 불안하고, 사람들이 운명이라는 개념을 만들게 된 것이 아닐까. 이쯤 되니 운명이 있고 없고 가 뭐가 중요한가 싶다. 어차피 우리는 살면서 미래를 정확히 알 수 없는데, 4차원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인식체계로 현재에서 미래로 공간을 이동하며 열심히 운명이 있을까, 있다면 내 운명이 무엇일까 궁금해하는 것보다는 당장 내 앞에 놓인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것이 더 생산적인 일이 아닐까, 나는 4차원설에 따른 운명론이 진실이라도 우리의 선택으로 앞으로 우리가 도착할 공간이 계속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살아있는 유기체 같은 세계에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것이 더 좋다. 다 정해져 있으면 진짜 재미없으니까.


다시 나의 불완전한 인식 체계와 사고로 파생되는 불안 행동인 ‘타로카드 뒤집기 돌아와서 -최근에 신부님께 여쭤본 적이 있었다. 신부님, 계속 불안에 떨며 이런 행동을 반복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신부님은 말씀하셨다. 삶을 인간의 눈으로 들여다보려고 하지 말고 신의 눈으로 보라고. 인간의 눈과 지력으로는 과거와 현재밖에   없고, 그마저도  일에 숨겨진 의미 또는 파생될 미래에 대해 당장   없다고.  말이 품은 무한한 우주를 이제야 조금   같다.


나보다 약 2배를 더 산 육십의 엄마가 인지하는 삶의 모습은 이렇다. “좋은 게 다 좋은 게 아니고, 나쁜 게 다 나쁜 게 아니더라.” 나는 엄마의 삶을 통해 그것이 진실임을 느낀다. 엄마는 어릴 적 찢어지게 가난해서 당연히 수학여행은 가본 적이 없고, 20대는 내내 소녀가장으로 살며 회사를 그만둬야 할 때를 대비해 버스 운전이라도 하려고 1종 대형 면허를 땄다고 한다. 그러다 그때 그 시절에는 한참 늦은 기준인 스물아홉에, 공부하느라 돈을 하나도 모아놓지 못한 아빠와 어린 시절 한 집에 세 들어 살았다는 이유로 양가에서 급하게 추진한 결혼을 한 엄마는, 우리 집에서 가장 많은 나라를 여행해 본 사람이 되었다. 전혀 꿈꿀 수 없는 일이었고, 하나하나 자기 손으로 이룬 일이기에 엄마는 매 순간 감사하며 그 여행지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두고두고 추억하며 행복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 또한 인식의 차이라고 할 수는 있겠으나, 같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느낀 여행의 행복과는 그 모양과 크기가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이제야 조금 안개가 걷힌다. 결국 나의 길고 긴 고민과 장황한 글은 잡히지 않는 미래를 잡으려고 조바심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할 것, 결국 아주 기본적이고 흔한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제자리걸음은 아니다. 나는 ‘리틀 포레스트’의 이치코의 엄마가 말했던 것처럼 헤매며 더 큰 나선을 그리고,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리즈가 말한 것처럼 흔들리며 더 큰 균형을 맞춰가는 중이라고 믿는다. 자, 나는 이제 2주를 고립되어 보낼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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