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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형 Jan 14. 2020

차마 지울 수 없는 사진

아이와의 추억이 소중해서 사진 한 장 지우지 못하는 나를 보며

“이상하게 애 사진은 못 지우겠어.”


여행앨범을 만들기 위해 핸드폰 사진을 정리하다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가 웃으며 자기도 그렇다고 했다.


아내는 가족여행을 다녀오면 으레 여행앨범을 만든다. 결혼 초반만 해도 디카를 많이 사용했다. 아내 혼자서도 뚝딱뚝딱 앨범을 만들 수 있었다. 요즘은 핸드폰으로만 찍기 때문에 내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아내에게 넘겨줘야 한다. 게을러서 늘 늦게 넘겨주기 때문에 몇 개월이 지나야 아내는 앨범 제작에 들어갈 수 있다. 짧은 여행은 수백 장, 긴 여행은 족히 수천 장을 찍어서 용량이 만만치 않다. 메신저로 일일이 전송하자니 영 불편해서 외장하드에 옮겨서 넘겨준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핸드폰을 분실해도 사진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


그러고 보니 핸드폰 저장 공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따로 SD카드까지 장착해서 용량이 100GB 가까이 되는데도 이렇다. 필름카메라를 사용했을 때는 사진 한 장이 귀했다. 구름 사진을 찍는다거나, 음식 사진을 찍는 일 따위는 없었다. 주차 위치를 기억한답시고 기둥 사진을 찍는 일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요즘은 일단 찍고 본다. 날이 흐리면 흐려서, 맑으면 맑아서 찍는다. 봄에 꽃이 피었다고, 여름에 비가 온다고 찍는다. 빨간 낙엽이 예쁘다며, 하얀 눈이 예쁘다며 사방에 핸드폰을 들이민다. 태어나 처음 가을 산에 오른 사람처럼, 처음 눈을 보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많은 건 단연 아이사진이다. 언뜻 보면 다 비슷한 사진 같지만, 나에게는 한 장 한 장이 특별하다. 태어나 처음 기린을 볼 때 아이의 눈빛과 처음 방울토마토를 먹었을 때의 눈빛이 같지 않다. 같은 놀이터 사진이라도 세 살이었을 때와 네 살이었을 때의 얼굴선이 다르다. 작년과 같은 옷도 내 눈에는 특별하다. 작년만 해도 분명 낙낙하게 입었는데 올해 유난히 꽉 맞아 보이는 걸 보면 괜히 안쓰럽기도 하다. 남이 보면 과거의 한순간이지만, 내게는 두고두고 잊지 못하는 추억의 일부이다. 아이의 성장일기이자, 나보다 너를 아끼며 살아온 날들의 증거인 셈이다.


핸드폰 액정에 검지손가락을 올려 위쪽으로 한번 튕겼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내다보는 풍경처럼 지난 추억이 빠르게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다시 손가락을 대자 화면이 멈췄다. 네가 좋아하지 않았다면 가지 않았을 동물원에서 찍은 사진이 나왔다. 손가락을 한번 또 튕기고 또 가져다 댔다. 네가 원하지 않았다면 타지 않았을 눈썰매 사진이 나왔다. 한 번 더, 그리고 또 한 번 더. 어디에서 멈추든 그곳엔 항상 네가 있다. 그리고 내가 있다. 때로는 앵글 밖에서, 때로는 너를 안고서. 그리고 때로는 우리 가족 셋이 나란히.


이미 외장하드에 옮겨놓은 사진들이다. 그중 몇 장은 앨범으로 제작되어 책장에 꼽힐 테니 분실염려도 없다.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지운다고 곤히 잠든 아이 볼에 생채기가 나는 것도 아니다. 행복했던 추억이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도무지 지울 수가 없다. 만약 그중에 몇 장을 골라 지운다면, 그 추억은 다른 추억에 비해 소중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만 같아서, 조금씩 지우는 동안 나도 모르게 추억을 모두 잊을 것만 같아서 그렇다. 대신 구름 사진을 지우고, 음식 사진을 지웠다. 주차장 기둥 사진을 지우고, 흐렸던 어느 날과 맑았던 어느 날의 사진을 지웠다. 봄꽃 사진도 한여름 소나기 사진도, 가을의 낙엽도, 겨울의 눈꽃 사진도 지웠다. 그래도 모자라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나의 셀카 사진을 지웠다.


자식은 부모를 잊어도, 부모는 자식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추억마저 너무나 소중해 핸드폰 사진 한 장 지우기 힘든 걸 보면 과연 맞는 말이구나 싶다. 나보다 자녀가 귀하다. 따라서 자녀는 부모에게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내리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4장 21절)



안치형 / 브런치 작가

[출간]

2019.6 [나를 찾아가는 생각연습]


[브런치]

2020.01 [말근수필] 매거진

2019.03 [궁극의 행복 나로 살아가기] 매거진

2019.05 [일상의 기록]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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