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되물었다. “네 아이가 친구에게 시비를 걸어 두들겨 맞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어?” 이유 불문하고 일단 자기 아이를 지키겠단다. 네 아이가 먼저 잘못한 것이 명백한데도 네 아이를 사랑하겠는지도 물었다. “당연하지.” 나 역시 그렇다고 했다. 내 아이가 아무리 잘못해도 내 아이를 사랑하겠노라고. 눈물을 찔끔 흘릴 정도로 혼내더라도 세상에 내 아이보다 귀한 아이는 없노라고.
이어 말했다. 모든 부모는 자기 자녀를 가장 사랑한다. 배우자도 그렇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정상이다. 아내보다 다른 여자를 더 사랑하는 남편, 남편보다 다른 남자를 더 사랑하는 아내. 그런 이들이 전혀 없다고는 말 못 하겠다. 내 아이보다 다른 집 아이를 더 사랑하고 챙기는 이도 어딘가 분명 있을 게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아내, 남편, 부모는 분명 비정상이다.
그가 말했다. “다 이유가 있겠지. 다양성을 존중해야지 않을까?” 되물었다. 네 아내가 지금 다른 사람과 사랑해도 괜찮겠냐고. 그건 절대 안 된단다. 또 물었다. 그 사랑도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다양성을 존중해야 하니까. “그 예시는 너무하잖아.” 그는 조금 언짢았는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몇 초 후 다시 입을 떼고 말했다. “정말 그런 때가 오면, 인정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은 안 되지만 언젠가는 될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섰나 보다. 마치 남의 일처럼.
직장 상사가 한 임원을 턱으로 슬쩍 가리키며 말한 적이 있다. “저 사람 애인 있는 거 알아? 기념일 때 늘 선물 두 개씩 사잖아. 웃긴 건 애인 거가 항상 더 커.” 킥킥대는 상사에게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술 취하면 하도 자랑을 해대서 알게 되었단다. 평소 그 임원을 보며 훤칠하고 카리스마 있어서 참 멋지다 생각했는데, 실망이 컸다. 애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남편. 그것도 모르고 남편이 주는 작은 선물에 기뻐하는 아내.안타까웠다.
다양성을 존중하라. 참 좋은 말이다. 하지만 사랑만큼은 예외다. 사랑은 배타적이다. 새끼를 보느라 날이 선 어미와 같다. 흘깃 쳐다만 봐도 무시무시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위협하는 어미와 같다. 아무리 둥지가 넓어도 낯선 동물에게는 손바닥만큼의 공간도 허락지 않는 배타적인 어미와 같다. 배타적이면 배타적일수록 새끼는 안전하다. 그 모습을 보고 포용력이 부족하다고, 이해력이 부족하다고 손가락질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랑은 서로의 시선을 독점한다. 너와 나 사이에 감히 누구도 끼어들지 못한다. 눈길을 주기만 해도 질투로 두 눈을 이글거린다. 이해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서로의 편에 선다. 오직 서로의 품에만 안긴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네 아내가 다른 사람과 사랑해도 되겠느냐는 말에 발끈하던 그를 보며 생각했다. ‘굳건히 사랑하고 있구나.’
그는 말했다.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안 돼. 왜 예수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구원하는지.” 나는 대답했다. “그래서 인격적인 거야.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만 죽도록 사랑하시거든. 일 분 일 초도 한눈팔지 않고. 그게 신과 인간의 차이지. 너는 그렇게 할 수 있겠어?” 어색하게 웃는 그.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걸었다. 어제보다 쌀쌀했다. 밤부터 불어온 차가운 공기 때문이리라. 덕분에 잿빛 먼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실로 간만에 보는 파란 하늘이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언 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