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게 살아남은 신혼 가구. 이 테이블의 타이틀이다. 테이블은 우리 집에 들어오고 나서 두 번의 이사를 견뎠다. 함께 세트로 왔던 원목 벤치는 다리가 회생불능으로 망가져서 어쩔 수 없이 한밤중 길가에 내버려졌다. 하지만 테이블은 아직도 건재하다. 좁은 공간 때문에 대부분의 신혼가구가 버려졌던 우리의 두 번째 이사에도, 새 가구를 들이던 세 번째 이사에도 이 테이블은 살아남았다. 테이블에 묻은 오랜 얼룩들은 지우기가 무척 힘들었는데, 공장에서 산 가구가 아닌 동네 목공소에서 맞춤 제작한 수제 테이블이기에 그런 것이었다.
약 9년 전, 성수동은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찾는 동네가 아니었다. 복잡한 공장 부지에 공간이 여유롭고도 예쁘게 꾸며진 곳은 드물었다. 집 근처에는 예쁜 카페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그런 드문 곳이었다. 목공소와 스튜디오도 겸하고 있는 넉넉한 공간이었다. 자연스레 동네 엄마들과 자주 들르게 되었다. 곳곳이 정성스레 꾸며져 있는 정원을 지나 건물 입구로 들어서면 왼쪽은 카페, 오른쪽은 목공소의 제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이 나왔다.
바로 그 공간에 이 테이블이 있었다. 짙은 밤색의 상판에 짙은 민트색 다리를 하고 있는 원목 테이블이었다. 식탁보다 책상의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테이블은 폭이 좁은 식탁이 필요한 우리 집에 딱이었다. 인터넷을 그렇게 뒤지고 뒤졌건만, 우리의 예산에도 내 마음에도 딱 맞는 테이블을 동네 카페 목공소에서 찾다니.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사장님께 상판은 밝은 나무색을 그대로 살리고 다리는 흰색으로 제작해 주실 수 있는지 여쭤봤다. 주문 제작은 받고 있지 않으시다며 당황하셨지만 간곡한 부탁에 하나를 만들어주시기로 했다. 큰 아이 혼자 있을 무렵인데 아무래도 물을 많이 쏟게 되니 상판에 방수 코팅을 두텁게 해달라 말씀드렸다.
이 테이블이 집에 들어오던 날도 기억한다. 휑하던 식탁 자리에 예쁜 원목 테이블이 들어오고 나는 서둘러 어울리는 식탁등을 검색해 식탁의 한 가운데에 맞춰 등을 달았다. 결혼식에 다녀온 날에는 받아온 꽃도 예쁘게 단장해 놓았고, 예쁜 소품들도 올려놓았다. 친구들이 놀러 오면 있는 멋 없는 멋 다 부려가며 집들이 음식을 내놓았다. 가장 열심히 또 즐겁게 집을 꾸미던 때였다. 당신은 더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느니, 집안일을 더 돕지 않는다느니 따위의 문제로 자질구레한 싸움이 많던 신혼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바쁠 것 없이 큰아이와 나, 그리고 남편 셋이서 집에 오래 머물며 넉넉히 쓰던 꿈같던 나날들이었다.
그로부터 5년쯤 지난 어느 날 문득, 거실 한편에 놓인 테이블은 너무 낡고 지저분했다. 갑자기 집안 사정이 어려워졌고, 나는 아기 띠에 매달린 둘째의 다리가 까매지도록 발품을 팔며 우리의 예산에 맞는 집을 찾아다녔다. 집을 볼 때마다 참담했지만, 골라 골라 서울숲 옆에 자그마한 오래된 집을 하나 얻었다. 식구는 늘어났는데 집은 오히려 크기가 절반 이하로 줄어든 탓에 식탁은 여러 역할을 해야 했다. 다섯 식구의 식사를 담당하느라 이리저리 이것저것 흘려놓은 자국들에 새하얗고 매끄럽던 다리는 검댕이 가득한 회색빛이 되었고, 누군가는 볼펜을 잡고 신난 나머지 테이블 상판에 구멍을 마구 뚫어놓기도 했다. 테이블과 의자 네 개는 비좁은 거실을 가득 채워버려서 보고 있으면 턱, 숨이 막혔다. 이 좁은 집에 감히 식탁을 두려 했단 말이야? 애써 고른 슬림한 식탁도 이 집에서는 거대한 부피가 되고 말았다. 그 부피가 우리의 처지를 비웃는 것 같았다.
정말 갑자기, 테이블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헤어질 시간이 다 된 것 같았다. 나는 남편에게 말을 하고 시간 날 때 밖에 내놓으라고 부탁했다. 그날 저녁, 남편은 테이블을 내놓으려 한 뼘짜리 신발장에서 낑낑거리고 있었다. 현관문을 겨우 나가려 하는데 어두운 하늘 아래, 길가에 놓이기에는 테이블이 너무나 새것 같았다. 분명히 며칠 동안 우리의 비루한 살림을 대표하듯이 자리 잡아 내 숨을 막히게 했건만. 지저분하던 다리가 어두움 속에, 현관 밖에 반쯤 걸쳐져 있는 모습을 보니 아직 매끄러워 보였다. 상판도 더 닦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단 하나 남은 신혼 가구는 이별을 결심한 내 앞에서 우리의 좋은 시절들을 주마등처럼 떠올리게 했다. 여보, 미안해. 우리 그냥 다시 들여놓자. 못 버리겠어. 남편의 얼굴에 순간 황당한 기색이 스쳤지만 감사히도 군말 없이 내 말에 따라줬다.
그날 밤, 나는 늦게까지 테이블을 닦았다. 매직이며 형광펜이며 색연필이며 하는 것들은 절대 지워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참 꼼꼼해서 다리와 테이블 밑부분에까지 열심히 온갖 도구들로 그림을 그려놓았다. 스티커는 또 어떤가. 어떤 것은 한참을 박박 문질러야 떨어지고 어떤 것은 떼려 하면 바스러지기 일쑤여서 스티커를 정리하는 데에도 1시간이 넘게 걸렸다.
2년 전, 우리는 서울숲 집에서의 4년을 마치고 예전의 넉넉하던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셋이던 가족은 다섯이 되어 더 이상 넉넉하다 할 수도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전보다 더 차고 넘치는 집처럼 느껴졌다. 부엌에는 작은 원형 식탁을 두고, 원목 테이블은 거실에 아이들이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는 책상으로 두었다. 테이블 위를 덮고 있었던 각종 얼룩들은 인터넷에 하나하나 청소 방법을 찾아가며 지웠다. 색연필은 식용유가, 어떤 것은 치약이 효과적이었다.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이 절대 사라질 수 없을 것 같이 있었는데, 찾아보니 하나하나 지울 방법이 모두 있었다. 그새 또다시 덕지덕지 붙은 스티커도 모두 떼어내고 다리도 박박 문질러 닦았다.
그러고 나니 그 매력적인 본래의 모습이 다시 보였다. 우리와 질곡의 세월을 함께 버텨준 동지였다. 그 세월을 버티고도 이렇게 튼튼히 너의 매력을 잃지 않고 남아줘서 참 고맙다고. 멀찍이서 거실의 테이블을 보며 생각했다. 그렇게 이 테이블은 마지막 신혼가구가 되었다.
테이블을 구매했던 카페 겸 목공소는 그 뒤로 오랫동안 문을 닫았다. 사정을 알 길이 없어 곧 없어지겠거니 했는데 얼마 전 다시 문을 열었다. 다시 만난 사장님은 못 본 시간만큼 나이가 들어있었다. 나도 이제 더 이상 아가씨티가 머물러 있는 새댁이 아닌 완연한 삼 남매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테이블 얘기를 했더니 사장님께서 얼풋 기억이 날 것 같다 하시며 참 반가워하셨다. 많이 봤던 얼굴이 아닌데도 서로의 얼굴에서 세월을 읽어낼 수 있음이 참 신기하면서도 반가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새로 단장한 그 카페의 창문가에 앉아 목을 축이고 있노라니 8년 전의 내가 어떤 생각을 하며 거닐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그 테이블을 받아왔는지가 새삼 보글보글 떠오른다. 세상 물정 모르고 도도하던 나는 현실에게 한방 거나하게 맞고선 절실하고 끈덕지게 살아왔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이 자리에 앉아있다. 앞으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또 변해나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더 나은 처지가 될 수 있고, 다시 한번 시련이 찾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순간이 오건대 이 마지막 신혼가구는 버리기 힘들 것 같다. 그저 집 안 어디서든지 우리의 곁에 남아 어떤 역할이든 해주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소중한 나의 오랜 친구와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