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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닥터 Dec 06. 2018

[에세이] 살려야 한다

1.


‘살려야 한다’


대한민국 군의관이라면 누구도 잊어버리지 않을 이 다섯 글자는 국군 의무병과 훈이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할 무렵의 첫아이와 아내를 집에 두고, 서른이 넘은 나이가 무색하게 빡빡 머리를 민 채 훈련을 받던 춘삼월. 국군의무학교 교육생 생활관 앞을 지날 때마다, 다섯 개의 묵직한 돌에 하나씩 글자를 새겨 쌓아 올린 살.려.야.한.다. 조형물을 바라볼 때면, 괜스레 마음이 비장해지곤 했다.


훈련을 마치고 나서 배치받은 부대는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도 꽤나 남쪽에 있는, 다시 말하면 휴전선과는 한참 거리가 먼 후방에 위치한 부대였다. 전쟁을 경험했던 이들이 퇴역한지도 오래고, 한반도의 분단을 책으로 배운 세대가 대다수인 요즈음, ‘살려야 한다’는 훈(訓)은 실제 근무와는 괴리감이 있었다. 치과와 한방까지 아홉 명의 의료진이 있었으며, 의무실 규모만큼이나 꽤 많은 환자들을 책임져야 하는 사단 급의 부대였지만, 다른 여느 부대가 그렇듯이, 전시(戰時)와 관련된 급박한 환자들보다는 감기나 복통, 피부 알레르기 등과 같은 온갖 경증 질환들에 둘러싸여 하루하루를 보냈다. 보안 상 인터넷조차 할 수 없는 그 공간은, 의사에겐 갖은 노력을 해야만 나태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기와의 싸움을 하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 군의관들조차 일 년에 한 번은 꼭 몸을 일으켜 땀을 흘려야만 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체력검정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진 어느 가을날, 미루다 미루다 더 이상은 날짜를 미룰 수 없던 네 명의 군의관이 비루한 체력을 검정 받기로 나섰다. 윗몸 일으키기와 팔굽혀펴기 등을 마치고, 3킬로미터 달리기를 위해 부대 한 켠에 모였다. 마지막 체력 검정 날이라서 그런지 평소보다 많은 인원들이 모여들었다. 네 명의 운동화를 신은 군의관 외에도 출발 선 옆 앰뷸런스 안에는 의무지원을 나온 다른 군의관과 의무병이 지루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청량한 가을바람을 가르며 오랜만에 뛰어보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고, 많은 사람들과 같이 뛰니 왠지 달리기 동호회에서 한강변을 따라 뛰던 생각도 났다. 하지만, 그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금방 시작된 옆구리 통증이 결승점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한참을 지나도 진정되지 않는 저질 체력을 한탄하며, 복귀하는 차량에 몸을 실은 다른 군의관들에게 좀 더 쉬다가 가겠노라고 고했다. 천천히 걸어가며 숨을 고르자고 마음을 먹으며 일어나던 찰나, 뒤에서 순간 웅성웅성하더니 다급하게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군의관 님, 군의관 님, 병사가 쓰러졌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한 젊은 병사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처럼 갑자기 뛰면서 어지러워 그러겠거니 하고 다가가 보았는데, 눈을 반쯤 감은 병사의 코 아래 빨간 핏물이 살짝 맺혀있었다. 재빨리 숨을 쉬는지 살펴보고, 목에 있는 경동맥을 촉진해 보았다. 그의 피부는 한껏 달아올라 있는 내 손가락 끝과 달리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맥박은 희미했다. 자발적 호흡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경련이 일어나거나, 구토를 하며 기도가 막힐까 봐 주머니에 있던 설압자를 입에 넣고, 고개를 젖혀 놓은 채 방금 출발한 구급차를 향해 다시 뛰었다. 조금 전까지, 풀코스를 완주한 마라토너처럼 지쳐 쓰러져 있었지만, 우사인 볼트처럼 뛸 힘이 내 몸 어디엔가 남아 있었다. 다행히 비포장도로라 비틀비틀 질척대며 천천히 가고 있던 앰뷸런스를 향해서 크게 팔을 휘저으며 무섭게 달려갔다. 내 모습을 알아챈 운전병이 차를 돌리는 것을 보자마자 나는 다시 쓰러진 병사에게 돌아갔다. 상태는 변함이 없었다. 구급차에서 내린 내과 군의관도 빠르게 병사를 살펴본 후, 내 생각과 같은 말을 내뱉었다.


“맥박 없어요, CPR 합시다!”


외침과 동시에 곧바로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날이 마침 체력검정 날이었기에, 다른 의무지원 일정이 없었고, 그래서 그 현장에는 밀린 체력검정을 하기 위한 다섯 명의 전문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한 명이 흉부압박을 하는 동안 구급차에 있던 의무병과 다른 군의관들은 스트레치 카를 내려 폈다. 개인적으로 실로 오랜만에 시작한 심폐소생술이었고, 예상하지 못한 심폐소생술이었다.


2.


“띵동~ 코드블루, 코드블루, 내과 중환자실, 띵동~ 코드블루, 코드블루, 내과 중환자실”


의사를 하면서 맞이하는 여러 긴박한 순간이 있지만, 심폐소생술은 그중 손꼽히는 순간 중에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인턴 시절, ‘코드블루’(심정지 환자 발생을 알리는 신호)는 나에겐 일종의 아드레날린이었다. 1초라도 빨리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환자에게 달려가고, 멎어버린 심장을 되살리기 위해서 환자의 몸 위에 올라 내 어깨와 팔꿈치와 손목과 손을 거쳐 심장에까지 압박을 전하는 그 순간은 인턴으로서의 존재감을 느끼는 순간 중에 하나였다. 내가 속한 과의 환자가 아니어도, 며칠 잠을 못 잔 채 하루 종일 서 있다가 잠깐 눈을 붙이려 하는 순간에도, 코드블루가 울리면 벌떡 일어나 뛰어나가곤 했다. 흰 가운을 펄럭이며 전력질주하는 나를 영문 모를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지나칠 때, 그리고 중환자실로 급히 옮겨 가는 환자의 이동하는 침대 위에 올라 흉부 압박을 할 때는 마치 내가 실제 영화 한 장면의 주인공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뛰어가 열심히 압박을 할지라도, 보통은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환자가 속해 있는 해당과 인턴과 주치의, 윗년차 레지던트, 또는 교수들이 금세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환자의 상태를 살핀 후 투약을 지시하고, 누군가는 내가 하던 흉부 압박을 인계받았다. 게다가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 중에 심폐소생술을 받게 되는 환자들은 대부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때문에, 나의 역할은 재빨리 달려가 급한 불을 진압하는 초기 대응반 같은 그런 존재였다. 대학병원이라는 큰 틀 안에서, 인턴이 하는 일들은 극히 제한적이었지만, 온몸을 바쳐 환자에게 의료 행위를 하는 그 순간. 신속히 시작은 하되 누군가가 환자를 책임을 지어주는 그 상황을 나는 하나의 경험으로서 부담 없이 즐기기도 했던 것 같다.


3.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나는 더 이상 인턴도 아니고, 뒤를 봐줄 윗년차나 교수도 없었다. 쓰러진 병사는 평소 운동을 즐겨 하던 스물 두 살의 젊은이였고, 건강히 잘 지내겠거니 하고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계실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야기한 ‘위국헌신’(爲國獻身,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침)이 군인의 본분이었다면, 군의관의 본분은 ‘살려야 한다’였다. 총, 칼을 들고 싸우진 않지만, 우리가 맞이할 수 있는 가장 치열하고도 비장한 전투를 시작했다. 흉부 압박은 쉴 새 없이 계속되었고, 미리 연락한 간호인력과 의무병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심장제세동기를 몸에 붙이고, 분석을 준비하는 동안 동시에 달려들어 재빨리 정맥 투여할 혈관을 세 군데 확보하고, 수액을 달았다. 우리의 판단이 틀렸길 바랬다. 하지만, 제세동기마저도 태어나 줄곧 규칙적으로 뛰어오던 젊은이의 심장이 갑자기 딸꾹질이라도 하듯 이상하게 뛰고 있다고 알렸다. 심장충격을 가했지만, 별로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한시가 급했다. 강심제로 에피네프린을 투여하고, 몇 가지 의무실에 가지고 있는 약들을 얼른 챙겨 대학병원 응급실로 출발했다. 한 명이 엠부백(수동식 인공호흡기)을 맡고, 다른 두 명이 환자의 흉부 압박을, 그리고 군의관 중 가장 심폐소생술 환자 경험이 많은 내과 출신 군의관이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예상하지 못한 응급 상황이었고, 방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무료한 일을 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이 호흡을 맞춰 신속하게 움직였다. 꼭 살려야 한다는 의지 하에 쓰러져 있는 병사의 의식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연신 이름을 불러댔다..


“영호야 눈 떠봐! 영호야~ 포기하면 안 돼! 정신 차려봐!”


하지만 우리는 이 구급차 안에 한 명의 이방인이 더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구급차의 운전을 맡은 박 병장은 곧 제대를 앞둔 수송대대 출신 병사였다. 입대 전 임용고시를 통과하고, 지방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1년간 선생님을 하고 왔다던 그 병장은 앰뷸런스를 조금이라도 빨리 몰기 위해서 온 힘을 쏟고 있었다. 병사의 회복을 위해 빠른 후송이 중요함을 그도 알았을 것이고, 그 자명한 사실은 고스란히 운전대를 잡은 박 병장의 손과 팔로 전해졌다. 하지만, 부대에서 대학병원까지는 거리가 꽤 되었고, 초조한 마음과 바로 뒷좌석에서 일어나는 긴박한 상황이 운전병의 이성을 점점 잃게 만들었다. 혹시 의학을 주제로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가장 비현실적인 장면이 있다면 그게 무엇인지 예상이 되는가? 경험을 하기 전엔 몰랐지만, 지금은 달리는 구급차 안에서의 완벽한 심폐 소생술 장면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조그만 진동에도 자세가 흐트러져 제대로 흉부 압박을 할 수가 없었기에, 몸이 최대한 움직이지 않게 요상한 자세로 서 있었다. 어설프게 자세를 잡고 서 있기에, 온몸의 잔근육이 힘을 내다 못한 나머지 떨리기 시작했고, 흥분한 운전병의 차가 코너를 지나거나 차선을 바꿀 때마다 고정된 침대와 환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흔들어대는 페트병 속의 음료수처럼 휘청댔다. 걔 와중에 심장 리듬 분석도 몇 번 더 해야 했고, 심장 충격도 해야 했으며, 필요한 약도 투여해야만 했다.


“박 병장, 진정해.. 몇 분 차이 안 나니까 안전하게 운전해. 그러다 우리 모두 다칠 수 있어!”


연신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운전병은 듣지 못했다. 길을 비켜주지 않는 차에게 클랙슨을 연신 울리며 길을 비키라고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질러댔다. 아수라장이었다. 이미 30분이 넘어가버린 흉부 압박을 하는 내 팔도 후들거리기 시작했고, 쓰러진 병사와 운전병을 동시에 신경 써가며 제발 빨리, 그리고 안전하게 도착해주기만을 바랐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드디어 대학병원 응급실 간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의료진이 재빨리 환자를 인계받아, 상태를 살폈다. 얼마 전까지 나도 대학병원에 있었지만, 그 공간에 서 있는 게 괜스레 낯설게 느껴졌다. 살려야 한다며 필사적으로 데리고 온 나는 그 병사의 상관이자, 보호자이자, 주치의였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선 순간, 나는 갑자기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군복을 입고 있는 나의 의사면허는 여기선 쓸모가 없었다. 내가 그때부터 할 수 있는 거라곤 간절히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1시간 거리에 있던 부모님이 연락을 받고 허겁지겁 도착을 했고, 그동안 환자의 심장은 가까스로 제 리듬을 찾았지만, 심장을 제외한 장기들이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기도에 삽관된 관을 통해 인공호흡기가 호흡을 도왔고, 망가진 장기를 되살리기 위해 에크모(체외막산소공급기)가 준비되었다. 몸 여러 곳에 주삿바늘이 꽂혔고, 그 주삿바늘을 통해 투여되는 약물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렸다. 부모님은 계속되는 설명과 동의서에 정신이 없어 슬퍼할 겨를도 없어 보였다. 관상동맥의 상태를 보기 위해 심혈관 조영술로 옮겨가는 동안, 환자가 의식을 조금이나마 회복했다.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말은 할 수 없었지만, 괜찮으면 눈을 깜빡여보라는 말에 말을 알아들은 건지 확실친 않지만 부르르 떨어가며 눈꺼풀을 한 번, 두 번 깜빡였다. 그 힘없는 깜빡임에도 병사의 부모와 우리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더 이상 병원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기에, 우리들은 부대로 복귀했다. 부모님은 연신 감사하다고 했지만, 우리는 무거운 마음으로 인사를 받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후송을 하고 돌아온 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그 일에 대해서, 그 병사에 대해서 우리는 좀처럼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병사의 상태를 전해 들을 때마다 잠자코 들을 뿐, 무언가 말을 한다는 게, 입 밖으로 뱉는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워서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의무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부대 내에서 갑자기 쓰러진 병사를 군의관들이 신속하게 조치하였고, 한 시간 가까이 심폐소생술을 시행하며 후송해 결국 ‘살려냈다’고 기뻐했다. 웃긴 일이었다. 그는 분명 살아는 있었지만, 본인 혼자 힘으로는 숨을 한 번 제대로 들이마시고 뱉을 수도 없었다. 그 생명은 너무도 희미했고, 솔직히 그의 몸은 점점 그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진한 아쉬움과 죄책감, 무거운 책임감들이 나를 한꺼번에 덮쳐 삼켰다. 도망쳐 아무도 없는 어딘가에 숨어버리고 싶었지만, 여기저기서 공(功)을 치하하겠다면서 연락이 왔고, 어떤 이는 찾아와서 기쁜 얼굴로 수고했다고 말했다.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 내가 서 있는 곳과 그 병사가 누워 있는 곳을 철저히 분리시켜 이야기했고, 그 병사를 ‘살려서’ 밖으로 인도한 우리들을 칭찬했다. 혼란스러웠다. 고문과도 같았다. 억지로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건 내가 속해 있는 곳이 부대라는 특수한 환경이라서 그랬다. 하루가 더 지나, 병사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에야 그 불편한 순간들이 사라졌다.


4.


군 생활을 마치고 전공의 때 수련했던 곳보다 더 큰 대학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턴 시절이었을 때로부터 시간도 흘렀지만, 그 병원 시스템은 이전과 달랐고, 나는 더 이상 코드블루라는 방송에 뛰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전공한 과가 불안한 생체징후를 가진 환자를 다루는 과가 아닌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입원해 있는 환자가 많은 만큼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코드블루 방송을 들을 때마다 뭔가 마음 한 켠이 불편했다. 의료진 이외의 내원객이 듣고 있기 때문에 코드블루 방송은 보통 차분하다. 상냥한 여성이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나는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그 예쁜 목소리와 간결한 어조 자체도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있는 영혼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매일 수없이 펼쳐지는 생사의 재판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나는, 나를 완전히 분리해내지도 못한 채, 마음 불편한 방관자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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