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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보미 쬬이마마 Aug 24. 2023

가짜 온기

모든 인간은 과연 사랑받아 마땅한가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 인간을 하느님이 창조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박완서 <행복하게 사는 법> 중에서







   자, 이모의 좋은 점을 손으로 꼽아보자... 칠십 평생 열심히 살아오셨고, 정이 많으시고, 솔직하시고, 미모가 빼어나시고... 어느 정도 좋은 점이 떠오르기는 한다. 이모에게 서운한 감정이 있어도 오래도록 생각해왔던 이모의 좋은 점은 내게 변함이 없다. 내게 이모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내게 이모는 둘이다. 엄마 손위 언니인 큰이모, 엄마 손아래 이모인 막내 이모. 우애 좋은 다섯 남매 중 딸 셋은 더욱 우애가 깊었다. 나는 우리 엄마도 든든했지만, 이모들은 더 든든했다. 예쁘고 능력 있고,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며 사는 여장부 이모들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상황이 달라진 건 엄마가 치매를 앓고 나서였다. 긴 병에 효자 없다지만, 이미 효자도 아닌 내가 불효자로 본격적인 전향을 하기도 전에 다섯 남매들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발병 이후에도 홀로 큰 오빠네 작은 오빠네에 들러 일손을 돕는 엄마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고, 급기야 큰 삼촌은 엄마를 시설행 급행열차에 태워버렸다. 엄마가 치매라는 것도 아직 받아들이기 어려운, 돌봄 2년 차에 요양원 이야기를 꺼내는 삼촌이었다. 그 사이 말릴 수 없게 고집이 쎄진 엄마는 삼촌 집에 계속 일손을 도우러 다니셨다. 엄마의 발자취를 따라 손에 돈 봉투며 선물을 잔뜩 실어 함께 다녔다. 그럼에도 엄마를 바라보는 삼촌의 경계심이 짙어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분명 옮기는 병이 아님에도 견뎌내야 하는 고립감이라는 골이 깊어져만 갔다. 당연하다 생각했던 형제애를 기대할 수 없으니 엄마를 돌보는 내 감정에는 균열이 찾아왔다. 무너져가는 감정에 더욱 힘들어졌다.


   그런 엄마와 나를 걱정해 주는 것은 이모였다. 남매들 모임에 엄마를 데려가고, 때론 함께 여행을 다녀오시기도 했다. 일 년에 서너 차례는 이모에게 엄마를 맡기고 편히 2~3일 보내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돌봄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던 아이와 남편을 챙길 수 있는 시간을 준 이모에게 너무나 감사했다. 나도 숨통이 트였다. 이모를 만나면서 챙겨드린 용돈과 선물들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렇게 유일한 도움처라고 여겼던 이모와도 연락을 끊고 지낸지 4개월째가 되어간다. 하나의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엄마가 주간보호센터에 적응하는 첫 주 주말이었다. 애쓴 엄마를 위해 도시락을 싸 집 근처 공원에 소풍을 갔다. 맛있게 김밥과 과일을 먹고, 잔디밭에서 맘껏 뛰어노는 아이를 뿌듯하게 바라보다 마지막으로 공원 산책을 했다. 그 길에 엄마는 음료수 병 하나를 주어왔다. 다급하게 말리는 손길에도 불구하고 모두 마셔버렸다. 말리니 더 빨리 비워버린 것이다. 배워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만약 치매인이 먹지 못할 것을 먹고 있다면 빼앗을 것이 아니라 실제 먹을 수 있는 것과 맞바꿔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최대한 다정하고 친절하게, 웃는 얼굴로.


   딸에게 빼앗기기 싫었던 엄마의 다급한 행동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렇게 화장실을 찾던 엄마는 공원 한복판에서 오줌을 누었다. 언젠가 님에게 맘껏 사랑을 받았을 엄마의 엉덩이는 여전히 뽀얗고 통통했다. 마주한 내 심장이 요동쳤다. 떨리는 심장은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었던 것 같다.


   부들거리는 몸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나만큼이 놀랐을 아이를 씻기고 재우는 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이모였다. 이모에게 오늘 일을 전부 이야기해야지, 이 순간 내 마음을 공감해 줄 세상 유일한 사람은 이모일테지, 이모는 어쩜 이리 시간도 정확할까. 하나님이 이모가 되어 왔나보다. 어느새 반가운 마음이 되어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에는 딴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쌍욕이 들렸다. 전화를 받으며 건낸 인사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일까, 왜 내가 이런 말을 들어야 하지. 이모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천천히 말씀해 보시라고 기분좋게 타일렀다. 이윽고 듣게 된 이유가 다름아닌 돈이었다. 엄마가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빌려 간 천만 원을 달라고 했단다. 아니 그게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가.


"치매에 걸린 니 어미가 내가 빌려 간 돈을 어떻게 기억을 하니. 니가 옆에서 시켰구나. 이 싸가지 없는 것. 감히 엄마를 시켜 돈을 달라고 해."

"이모, 오늘 내가 무슨일을 겪었는데...이모까지 이러면 나는 어떡해요..."


   울음소리를 듣고, 거실에 있던 신랑이 들어왔다. 밖에서 듣고 있었던 건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전화를 이어받으며 방을 나섰다. 신랑은 침착하게 이모를 달래보려 했다. 나와 아이는 방에 있고, 이모와 통화를 하는 신랑은 벽 너머에 있었다. 이모의 고함 소리가 그 벽을 뚫었다. 그보다 많은 벽과 더 두꺼운 벽이 있다한들 막을 수 있었을까. 결국 그 고함이 도착할 곳은 내 심장일 것이다. 왜 나를 헤치려는 건지 모르겠으나 정확히 내 심장을 관통하는데는 성공했다. 초점을 잃고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다독이는 것은 여섯 살까지 아이였다. ‘오늘은 네가 나의 하나님이었구나.’ 고사리 손이 닿는 곳에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심장에 꽂힌 비수로부터 시작된 핏물일 것이다.




   통화는 아이가 잠이 들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그 사이 점잖게 상황을 마무리하려던 신랑의 말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체온이 느껴졌다. 그래 나는 알고 있다. 우리 이모는 뜨거운 사람이라는 걸. 그 뜨거움으로 평생을 혼자 자식 셋을 길러냈듯이, 중년이 되어 남편을 잃은 동생에게 세상 든든한 언니가 되었다는 걸. 이제 치매를 앓게 된 동생이 불쌍하다며 밤낮으로 울고 집으로 불러 예쁜 새 옷을 사 입히고, 함께 놀러 가고,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가며 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걸. 형제들이 외면했던 엄마를 홀로 두지 않았다는 걸 말이다.


   뜨거움에  마음을 녹였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오늘 삼켜진 뜨거움은 마음을 차갑게 식혀버렸다. 검게 그을리고 바짝 타버린 온몸을 마주하고서야 말았다. 내가 든든했던 것은 이모가 아니라 엄마가 아니었을까. 모진 세월을 꿋꿋하게 버텨온 엄마가 이모에게도 나에게도 뜨겁고 따뜻한 유일한 온기가 아니었을까. 이모의 뜨거움은 가짜다. 결국   만원이라는게 우습다. 엄마라는 알곡 없는 이모는 그저 쭉정이일 뿐이다. 더이상 아름다울 수는 없다. 모든 인간을 저마다 사랑스럽게 만드셨다는 하느님의 말씀받아들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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