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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보미 쬬이마마 Sep 21. 2022

엄마의 사과

한 치매인을 위해 한마을이 필요한 이유 (1)

"괜찮습니다. 앞으로도 저희 가게 많이 이용해주세요."


엄마가 낮에 깎아준 사과를 먹으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마트에 들렀을 때였다. 지난번에 방문하여 미리 말씀은 드려놨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굉장한 초조함이 밀려왔다. 마트에 일하시는 많은 직원들 틈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았다. 카운터에 있는 직원분께 해당 직원을 찾아달라는 까다롭고 간절하기도한 부탁을 했다. 마침내 얼굴을 마주한 직원에게서는 생각지도 못한 친절한 화해의 대답이 도착했다.









엄마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사과 하나였다.

추석을 맞아 지역에 있는 마트마다 빛깔이 좋은 과일들이 예쁘게 진열이 되고 있었다. 박스로 파는 복숭아, 알맹이마다 실한 샤인 머스켓, 수박만큼이나 큼직한 멜론, 과즙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커다랗게 잘 익은 배까지 종류는 다양하다. 그중에 8개에 만원, 10개에 만원 하는 사과는 가난한 살림에도 기꺼이 주머니를 열기에 가장 만만한 과일일 것이다. 그런 사과를, 엄마는, 단 한 개만 돈을 주고 사 왔다고 했다.



웃으면서 깎아주는 엄마의 사과맛있었다.

과일 중에 사과를 가장 좋아하는 아이는 할머니에게 착 달라붙어 웃으며 그것을 즐겼다. 엄마도 흐뭇해하는 눈치였다. 이런 포만한 행복은 찰나이기에 나는 웃으며 이 순간을 즐기려 했다.


그러면서도 집 앞 마트에 들러 사과값을 갚아야지 생각했다. 엄마를 못 믿어서가 아니다. 그저 그 마트에서 사과를 진열해놨던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매장 밖에 진열된, 반질반질하게 닦아 화려한 광을 뽐내는 사과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면 누구나 탐욕이 자리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탐욕을 해소하는 방식이 거칠어진 엄마를 돕고 싶었다. 순진무구해진 엄마를 이해하고 싶었다.




어쩌면 올초에 겪었던 그 끔찍한 일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누나 놀라지 말고 들어라는 말로 시작된 전화였다. 그래 무슨 일이 벌어졌구나, 분명 작은 일은 아니겠구나 하며 담담해지기 위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정작 벌어진 상황보다 나를 더 울린 것은 전화를 건 이의 태도였다. 그동안 눌러 담아왔던 설움이 터진 듯 다 큰 남자 어른의 몸에서 어린아이 같은 울음소리가 났으니까.


나는 그의 눈물에 약하다.

기억하기로는 우리의 어린 시절 동생은 나보다 눈물에는 더 솔직했다. 그것은 같은 부모를 만나 겪어야 했던 우리만의 무수한 사건들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설움에 북받쳐 거친 호흡과 함께 시작된 그의 울음은 마치 단단하게 굳어버린 나의 사지를 깨우는 듯했다. 이건 슬픈 일이 맞아, 우리의 절규는 충분히 마땅해.


때문인지 울고 있는 그를 달랜 기억보다 맘껏 울고 있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기억이 더 선명하다. 그의 울음은 너무나 불쌍하여 딱하기도 하고, 동시에 너무나 시원하여 극심한 목마름에서 해방되는 것도 같았다.



어느새 나는 그 흐느낌에 올라탔다.

울부짖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건의 전말보다는 극심한 갈증에서 해소되는 느낌에 비로소 젖어든 것이다.


초월한 솔직함에는 힘이 있다. 오랜만의 단비 같은 위로였다.










커다란 행사(?)를 거쳤으니 미리 조심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미리 대비해서 나쁠 것이 없을 것이었다. 엄마의 사건이 아무리 벌금형으로 끝났다고는 하나, 그 일을 직접 겪은 엄마와 해결하려고 동분서주 뛰어다녔던 자녀들에게는 필요 이상의 피로함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자주 오시기에 우선 우리 집 근처에 있는 마트 두 곳에 엄마에 대한 설명을 미리 해두었다. 경찰에 신고하지 말아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함께 곁들여서 말이다.





"괜찮습니다. 앞으로도 저희 가게 많이 이용해주세요."


아무리 공손한 부탁을 미리 했다지만, 이런 답변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사과를 후불로 먹게 된 것, 손녀에게 사과를 깎아주며 기뻐하던 엄마의 미소 등의 값을 모두 매기고 싶은 심정인데. 너무 감사할 때는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표현을 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얼떨떨해하며 가게를 나왔다.



친절한 화해가 쌓이니 아직 오지 아니한 한가위 달님이 벌써 가득 찬 듯 마음이 덩실거렸다.



달뜬 마음으로 돌아가던 중 신랑은 치킨을 주문했다.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번 달 첫 치킨을 가장 기쁜 순간에 주문하는 신랑을 보며 결혼 생활의 지혜가 쌓였구나 농담을 던졌다. 모든 게 다 즐거웠다. 가볍게 곁들일 무알콜 맥주를 고르기 위해 또 다른 마트로 향했다.



그 사이 추석을 맞아 예쁘게 파마를 마치고 나온 엄마도 함께 동행을 했다.

마트 문 앞에 서서 기다리시기를 당부하고 얼른 맥주를 골라야지 했다. 내가 시간을 지체한 만큼 예측 불허한 일들의 가능성이 늘어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이 여기서 마무리가 되어야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열심히 생애 첫 무알콜 맥주를 고르는 건 돌봄이 삶의 대부분이 된 내가 불시의 사태에도 기꺼이 대비하기 위한 나름의 양보였다.


계산대에 앉은 주인장을 무심코 바라보았을 때였다.

주머니에 뭔가를 연신 구겨 넣는 시늉을 한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엄마가 서있다. 어김없이 틀림없는 엄마였다. 일그러진 건지 당혹감에 헛웃음을 짓는 건지 표정이 곱지 않은 주인장의 눈치를 자꾸만 살피게 되었다. 엄마도 내 감정을 알았는지 주머니에 넣은 초코바를 제자리에 놓으려 했다.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거칠어진 탐욕마저 이겨내는 자식에 대한 아득한 염려가 흔들리는 두 눈에 고스란히 어려있었다. 초코바 두 개로 엄마의 존엄이 무너지지 않는다.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엄마의 사과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주머니에 든 초코바 두 개를 포함해 계산을 마쳤다. 이야기로만 들었던 엄마와 주인장은 눈인사를 나누었다. 눈을 한 번 찡긋하더니 잠시 내 한쪽 어깨를 가볍게 토닥인다. 됐다 이걸로 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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