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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의 숲 May 05. 2021

왜 나는 아직도 내가 찌질한가

나는 일곱 살 때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 새로운 유치원으로 들어갔다. 어렴풋이 기억하는 것은 전에 다니던 유치원에선 친구관계도 좋고 뭐든지 적어도 평균은 하는 아이였는데 갑자기 새 유치원에 오니 모든 것이 뒤쳐진 느낌이었다. 나 외에 모든 아이들이 시계를 볼 줄 알았고 자기의 이름을 흔들림 없이 또박또박 쓸 수 있었다. 한 번은 종이접기를 친구 것과 바꾸어 가위질을 해야 했는데 선생님의 말을 잘 못 알아들어 친구의 작품을 의도치 않게 망가뜨린 적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한 해 내내 항상 도움이 더 필요한 아이 었고 주눅이 들어있었다. 특히 유난히 성장이 빠르고 키가 컸던 한 여자 아이는 나를 무시하는 눈빛과 말투가 항상 어려있었는데 결국은 그 아이와 같은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가게 되었다. 문득문득 아직도 그 아이가 생각나는 걸 보면 내 상처가 깊었던 듯하다. 


그러다 정말 서른이 다 되어서야 나의 어릴 적 뒤쳐짐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는 2월생이었고 이사를 하면서 다섯 살과 함께 수업을 듣던 나를 초등학교에 빨리 보내기 위해 우리 가족은 나를 일곱 살 학년에 넣어버렸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그 작은아이는 뒤쳐진 1년을 "내가 못나서 그런가 봐" 하며 기죽어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후, 다행히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행복했다. 고등학교 때 유학을 가서 미국 아이들 틈에 고생을 조금 했지만 훗날 학교 파티에서 프롬 퀸 후보로 오르기도 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그 학교 외국인으론 처음으로 졸업연설도 하게 되어 졸업식 날에는 동네 신문 1면에 나기도 하였다. 많은 이들이 꿈꾸는 아이비리그 학교를 졸업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직장에서 인정도 받고 지금은 사랑하는 친구들과 나를 전폭 지지해주는 가족들과 남자 친구에게 둘러 쌓여 더 이상 나는 바라는 것이 없다. 


그렇게 내 기준에선 많은 것을 이루고 쌓아왔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못나 보일 때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 운다거나 필름이 끊기거나 꼬장을 부리 듯 각자의 주사가 있다. 나에게 주사가 있다면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왔을 때, 마치 나는 그 일곱 살, 모든 것에 뒤처졌던 아이인 양 나 자신이 너무 못나 보이며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모든 것을 잘못한 것 같고, 말실수를 했던 것 같고, 술자리에 있었던 잘난 사람들 틈에 내가 어울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나를 무시했었던 그 유치원 여자아이와 페이스북으로 연락이 되어 반갑다고 만나자는 연락이 온 적 있었다. 그래서 딱히 생각 없이 그 아이를 만나러 갔었는데, 날 그렇게 내려보던 아이는 너무나도 실망한 모습으로 커 있었다. 하고 싶은 것도 없어 보였고 불안해 보였고 무언가를 이루려 노력하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상황이 변했을까. 이제 나는 나를 무시하던 아이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았고 그 증거가 눈 앞에 버젓이 앉아있었지만 나의 불안감은 해결되지 않았다. 대체 나는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이었을까. 



얼마 전 우연히 또 다른 초등학교 친구를 16년 만에 처음으로 만났다. 


내 기억에 그 친구는 인기도 많고 운동도 잘하던 아이로 기억해 지금은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남편과 이곳저곳 여행 다니며 멋지게 살고 있다. 특히 그 친구는 철저한 자기 관리로 군 살 하나 없이 예쁜 몸매가 인상적이다. 그런데 그 친구와 대화하다 보니 알게 된 것은 그 친구는 초등학교 졸업 즈음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고 당시 아이들이 통통했던 자신을 돼지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친구가 말했다. 


"나는 살이 찌면, 혹시 그때의 나로 돌아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이렇게 관리하는 이유도 커."


16년 전의 일이고 우리는 이제 서른이다. 그 세월 동안 누군가는 생각 없이 던진 말과 평가에 내 친구는 근거도 이유도 없는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나 멋지게 자란 아이인데... 


그때 생각했다. 도대체 우리의 과거는 무엇이기에 아무리 벗어나도 벗어나도 악몽처럼 우리를 쫓아오는 것일까. 왜 나는 20년도 지난 일을 기억하며, 내가 이뤄놓은 많은 것들은 과소평가하며, 알고 보면 나는 아직도 그 일곱 살 못난 아이이면 어쩌지 라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안고 사는 것일까.


이번 주말에도 낮 술을 하고 돌아와 침대에 누웠는데 어김없이 나는 부족하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오래 뒤척이다 문득 이 불안함을 마주해야겠다, 꼭 해결해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한번 눈을 감아보았다. 그러고는 내가 다니던 유치원에 돌아가는 상상을 했다. 유치원 문을 열어보니 많은 것이 혼란스럽고 풀이 죽어있는 꼬마 봄이가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다가가 무릎을 굽혀 그 아이를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말해보았다. 


"이 모든 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너무 잘 견뎌내고 있어."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가 녹아내려고 스르르 잠이 왔다. 


다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확실 한 건, 우리의 과거는 결국 우리의 숙제이다. 하루 만에 풀리지는 않는. 내가 헝클어트린 적 없어 억울하지만 꼭 풀어야 하는 실타래랄까. 나는 이제 이 실타래를 한 올 한 올 풀어가며, 미워 보였던 순간의 나도 장했던 순간의 나도 사랑하며 그리고 안아주며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숙제를 풀어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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