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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의 숲 May 01. 2021

26살, 내가 마비라니요

힘들게 달려왔던 나의 시간이 멈춰 서다.

내 나이 만 26 살, 의사 선생님 앞에 앉았다. 


"예상치 못한 결과네요. 종양입니다." 

난생처음 찍어본 MRI 사진을 보니 내 척추 속에 돌덩이만 한 주머니가 하반신으로 내려가는 신경을 막고 서있었다. "어떻게 발이 마비가 된 걸 몇 년을 모르고 살았어요." 



만 16살 때 되지 않는 형편에 유학길에 나섰다. 아빠는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나는 엄마의 전부였다. 어릴 때부터 미국에 보내달라는 나의 철없는 성화에 못 이겨 안 그래도 외로웠던 엄마는 하나 있던 딸을 타지에 보냈고 나는 어느 누구도 우리 엄마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꼭 성공하리라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미국에 도착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후회했던 것 같다. 한국에선 썩 잘했다고 생각했던 나의 영어는 점심시간 친구들의 해리포터 이야기에 끼는 데에도 쓸 수 없을 정도로 허술했다. 한국에서도 가뜩이나 못하던 체육시간엔, 어릴 때부터 각종 스포츠를 하며 자랐던 외국 친구들을 보며 나는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눈물이 날 것 같으면 화장실로 총총 걸어갔고 변기 위에 앉아 생각했다. 엄마에게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해볼까.


하지만 조금씩 버티다 보니 내 빈틈 많은 영어와 서툰 행동들을 귀엽게 생각해주는 친구들이 생겼다. 그렇게 많은 도움을 받아 전교 1 등으로 졸업도 했고 아이비리그 대학교에 진학도 해서 감사하게 원하는 직장과 도시에서 꿈꾸던 일을 하며 지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서 나는 잘 살았다고 생각했다.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했고 괜찮은 인생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나의 오만이었다. 몸도 돌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온 나의 기만함이었던 것이었다.


수년간 친구들과 가족들은 내 걸음걸이가 이상하다고 말해왔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요즘 운동을 안 해서 그래 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그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거짓말을 해왔다. 


돌아보면 그렇게 달려왔던 긴 시간 동안 내게 마비된 것들은 발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너는 왜 연락 한 번을 안 하니 라는 말엔, 내가 원래 핸드폰을 잘 안 봐서 그래 라는 핑계

너는 이런 것들을 잘해서 좋겠다 라는 말엔, 나는 아직 멀었다는 대답

슬퍼 눈물이 나려고 할 땐, 이 정도는 울 일이 아니야 라는 나에게 했던 거짓말


나를 필요로 했던 사람들에 대한 관심

작은 것들에 대한 감사함

내 소중했던 많은 감정들


더 빨리 많은 것을 이루려고 했던 나에게 

그 소중했던 것들이 뭐가 그리 버거워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의사 선생님께선 종양이 더 자랐다간 하반신 마비로 이를 수 있으니 수술을 바로 해야 한다고 하셨다. 신경을 건드려야 하는 수술이기 때문에, 후에는 정상적인 배변활동을 할 수 없고, 성생활에 지장이 올 수 있고, 뭐 하반신 마비가 되기도 한다는 끔찍한 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씀해주셨다.


그 의사 선생님을 보며 저분의 감정도 마비된 것이 틀림없겠구나 싶었다.  


나는 그렇게 말없이 눈물만 흘렸고 옆에 있던 엄마는 물었다.

"암일 수도 있나요?"

"그렇죠" 


그렇게 내 인생은 잠시 멈춰 섰다.


힘들게 달려왔던 나의 26년의 세월이 멈춰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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