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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모마일 May 16. 2021

배우고 가르치고 자라는 수업시간에 대하여

책 ㅡ 우리들의 문학시간, 하고운


대학교 입학 전 12년간의 학창시절 중 좋은 기억으로 내 마음 속에 남아있는 세 명의 선생님이 있다. 국어, 영어, 불어 선생님이 그 주인공인데, 세 분 모두 어문계 전공자이시긴 했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영국신사처럼 온화한 미소와 세련된 문장의 화법을 구사하시던 영어선생님을 만나고 나의 영어 성적은 급상승했다. 외모부터 이국적이고 여행을 즐기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불어선생님. 나는 불어성적 만점으로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려 노력하던 선생님의 열정에 보답했다. 그리고,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는 가장 없었지만, 나 혼자 존경하던 국어선생님. 당시 40대 초반의 왜소한 체격에 두꺼운 안경을 낀 채 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아이들에게 사적인 대화나 장난이나 농담 전혀 없이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수업으로 진격하시던 분이니, 인기와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참고서나 교육방송교재에도 나오지 않는  심층분석을 줄줄이 말씀하시는 바람에 이게 과연 대입에 도움이 되는 수업이냐 아니냐 아이들 사이에 불만도 있었고 의견도 분분했다. 그러나 나는 처음 접하는 수준 높은 문학작품 분석과 신선한 표현, 정교하면서도 매끄러운 논리로 풀어나가는 국어선생님의 수업에 반하여 한글자도 빠지지 않고 필기하려고 노력했고, 난이도와 중요도에 따라 빨강, 파랑, 초록 등 총천연색으로 표시된 내 국어 노트와 교과서는 시험기간이면 아이들이 번호표를 뽑고 빌려가는 '족보'가 되었다.

고 3 여름방학, 어느 지루했던 국어 보충수업 시간. 반 이상 아이들이 더위에 지쳐 비몽사몽하는 모숩에, 간신히 수업을 이어가던 국어 선생님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수업을 끝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후끈했다. 선생님은 창 밖에으로 교정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교탁으로 돌아와서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어....내가 얼마전 문학지에서 비평 부문에 수상을 해서.. 등단을 하게 되었다."

이 뜬금없는 고백에 아이들은 여전히 비몽사몽 어리둥절했고, 수학시간에는 나도 비몽사몽 그룹의 선두주자라였으나, 유독 국어 선생님 말씀이라면 한 글자도 놓치지 않던 나는, 이 기쁜 소식에 놀라 나도 모르게 즉각 짦지만 확실한 리액션을 보냈다.

"어머!!!" 짝짝짝짝짝.

정신을 차려보니 나만 혼자 박수를 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쑥스러워진 나는 얼굴이 빨개지며 박수를 멈추고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침, 수업종료를 알리는 ''소녀의 기도' 음악소리가 스피커로 나오고, 아이들은 "감사합니다~" 대충 인사를 하고는 우당탕탕 백미터 달리기 선수들처럼  매점으로 달려갔다.

순식간에 어수선해진 교실에서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교단을 내려오면서, 선생님은 나를 보고 보일듯 말듯 미소를 짓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축하해줘서 고맙다는 인사임을 안 나는 선생님이 교실을 떠나신 후에도 한참 얼굴이 빨개져서 책받침으로 부채질을 한동안 해야 했다.

그 뒤로 수업시간은 전과 다를 것 없이 이어졌다. 선생님은 여전히 날카로운 논리로 교과서와 참고서 문제를 분석했고 나는 눈에 띄지않게 조용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시험과목 중 국어성적이 제일 높아졌다는 것 정도? 물론 선생님과 개인적인 교류는 커녕 사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다. 하지만 스승의 영향이란 매우 커서, 나는 지방 소도시의 여학교였지만 현직 비평가에게 국어 수업을 받았다는 자부심에  대학에 들어간 뒤에도 한동안 내 마음은 든든했던 기억이 난다.

............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 순간을 이 책을 읽고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입시위주의 주입식 교육 속에서도 새로운 세계로 눈을 뜨게 해주던 선생님이 있었고, 그 길을 따라 눈이 휘둥그래지며 배움의 기쁨에 가슴벅차하던 학생인 내가 있었다. 이 책에서도 치열한 경쟁과 무시무시한 학습량 속에서도 삶과 인간을 표현하는 문학수업을 통해 아이와 선생님이 서로 배우고 가르치며 새로운 길로 나아간다. 이제는 이런 선생님을 보면, 내 아들이 이렇게 좋은 선생님과 행복한 수업을 꾸려나가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아줌마이지만, 자기의 일을 소중히 여기며 한 걸음 한 걸음 성장하는 사람의 이야기인 만큼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책 끝 부분의 부록은 국어교사인 작가가 소중히 여기는 도서 목록이 있는데, 그 부록만으로도 이 책은 소장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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