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마음은 건강한 몸으로부터 나온다
<마녀체력>을 읽고
(2019년에 쓴 글입니다)
내가 한 때 지났던 길의 풍경을 닦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보면, 마음 속에 여러 가지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다시 그 길을 걸어가고 싶은 향수, 그 길을 걷는 이와는 일면식 없이도 샘솟는 동지 의식, 익숙했던 풍경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은 마음, 그 길을 떠나온 이후 겪은 삶에 대한 회한.. 나는 철인3종은 뛰지 않았지만, 등산을 매우 심각하게 몇 년 다닌 적이 있다. 지금 직장에 들어왔던 시기가 그 절정기였고, 아무래도 회사일과 병행할 수 없어 차츰 접었더랬다. 저자는 책에서 운동을 시작한 이유에서부터 철인3종 선수 트라이애슬릿 또는 마라토너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중년 이후를 살아가는 모습을 펼쳐 보인다. 편집자가 쓰고 만든 책이라서인지 독자가 어디서 어떤 생각을 할 지 꿰뚫어보고, 사이사이 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팁과 Q&A를 넣어가며 짜임새 있게 책을 엮었다. 문장은 운동하는 사람답게 힘있고 속도감 있게 흘러가며, 1분 1초를 아껴가며 워킹맘 겸 트라이애슬릿으로 살아온 이답게 내용의 밀도가 아주 치밀하다. 주말 저녁에 책의 첫 장을 시작했는데 다음날 아침 식사 전에 끝냈다. 이렇게 가독성이 좋은 책을 읽고 나면 한참을 뛰고 나서 찬 물 한 잔 들이키듯 속이 아주 후련해진다. 여느 책과는 달랐던 점은, 책을 읽은 시간보다 책을 읽은 후 책과 관련 있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한 시간이 훨씬 길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의 내 모습으로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고 나 역시 말하기 쑥쓰럽지만, 한 때 나의 꿈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자
가 되는 것이었다. 아마도 혼자서 조금씩 등산을 다니기 시작한 초창기 무렵이었을 것이다. 이 결심에 영향을 미친 이들을 열 명쯤은 이름을 댈 수 있으나 당시 가장 영향을 미친 이는 소설가 김훈이었다(이 책에서도 여러 번 인용된다). 수 십 년 간 기자와 편집장 생활을 하며 팩트가 중시되는 세상에 살았으면서도 김 훈 작가의 글은 문학의 향기를 잃지 않고, 자전거 레이서로서 몸을 쓰며 사는 사람 특유의 힘이 문장에 배어 있다. 당시 프리랜서 번역으로 먹고 살던 나에게 그의 글은 가장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한글의 전형이었으니 그의 생활을 닮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다 우연히 네팔로 출장을 가게 되면서 나의 등산 인생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업무 일정이 끝나고 나 혼자 남아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루트(ABC)를 2주에 걸쳐 걸었다. 그 무용담을 늘어놓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하늘과 만년설과 바위밖에 없는 큰 산에서, 바람 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없는 그 산에서 내 젊은 날에 마침표를 찍고 어른으로 살아가는 새 날을 시작했다.
그 후 돌아와 산악회에 가입하고, 국내의 국립공원과 도립공원을 대부분 섭렵하고, 우연히 등산학교에 들어가 6주 동안 교육을 받고 암벽 등반의 매력을 깨닫고 여름 일주일간, 암벽반 코스를 이수했다. 그러다 겨울에 암벽 등반을 할 수 없게 되어 (주위의 꼬임에 넘어가) 겨울 빙벽반까지 이수했다. 빙벽반 코스는 참가 인원이 적어 공군구조대의 군인 들과 같이 훈련을 받았다. 구조대의 리더격인 상사님은 사십대 초반으로 두 아이의 아빠라 했는데, 나를 신기하게 보며 무슨 일 하는데 이렇게 험한 곳에 등반다니냐고 묻기도 했다. 구조대는 유사시 파일럿을 구하러 가는 부대라 스카이다이빙, 수영, 스쿠버다이빙, 암벽 빙벽 등반 다 배운다고 그는 내게 얘기해주었고, 나는 맹랑하고 철없는 아가씨답게 그 모든 걸 돈받고 하니 얼마나 좋냐고 대꾸했다. 어쨌든 군인들과 다른 동기들과 겨울산에서 일주일을 보낸 후 마지막에는 무슨 상도 받았다. 그리고 삼삼오오 인수봉과 설악산 등을 주말마다 다니며 벽에 올랐다. 그 중 내가 가장 사랑한 산은 겨울 설악이었다. 빙벽 등반의 추억에 대해 어딘가에 써놓았던 글을 여기에 옮긴다.
....."내 등산 역사의 마지막은 역시나 빙벽 등반이었다.
음양오행이 부딪힌다. 나 역시 불로 달구어 만든 낫 비슷하게 생긴 아이스 바일로 얼음을 찍어 방폭에 몰랐었다. 찍을 때마다 부서지며 떨어지는 자잘한 얼음조각은 작은 칼날처럼 날카로와서 열굴을 베일 때도 있었다. 얼음 절벽 위에서 오르지도 내려가지도 못할 때 등반자의 몸은 뜨거워진다. 그렇지 않으면 빙벽의 한기에 얼어붙어 버린다. 뜨거워진 몸에 마침내 피가 돌고 근육에 다시 힘이 들어가면 빙벽은 다시 오를 수 있는 곳이 된다. 빙벽의 끝은 항상 눈부셨다. 차가운 음기를 견디며 얼음을 수직으로 올라 직각으로 꺾어지는 순간 햇빛이 얼음에 반사되어 시리게 빛났다. 수직의 벽을 올라 수평의 지면에 발을 디디는 순간은 조금 슬펐다. 천둥처럼 쏟아지던 폭포는 고요한 얼음벽이 되었고, 그 차가운 벽에 매달린 나는 하찮을 뿐이었다. 빙폭 말고 겨울 골짜기 등반은 몹시 즐거웠다. 여름의 계곡은 사람이 놀기에 위험하고 적당치 않으나 겨울의 계곡은 얼음길이 되어 눈 쌓인 등산로보다 단단했다. 간간히 나타나는 폭포 빙벽만 오르면 능히 산꼭대기까지 올라갈 만 했다. 그 길을 오르며 나는 깊고 조용한 산의 품에 안긴 듯 안온하였다."...
등산을 그만둘 때는 아무 미련 없이 중단했다. 일주일에 3일은 산에 가다가 안 가니 시간이 많이 남았다. 남들은 산에 안다니고 어찌 사냐고 물었다. 나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고, 그냥 때가 되었다고만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직장 업무가 전환되면서 생판 모르는 분야를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더듬더듬 공부해 낸 힘도 등산에서 나왔고, 아이를 낳고 힘들게 키운 힘도 등산에서 나왔다. 아니, 직업인으로서의 삶도, 엄마로서의 삶도, 한 가정을 꾸리는 주인인 주부로서의 삶도 결국은 다 등산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나는 나의 산을 떠난 게 아니다. 다른 여러 모습의 산을 올라왔고, 지금도 오르고 있다. 그 산이 어떤 산이든,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나이가 들면서 나는 삶의 균형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알고 있다. 일과 생활, 정신적 활동과 육체적 활동, 자신의 한계를 깨며 올라가는 신체 능력과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갈 줄 아는 인품을 균형있게 가꾸어 나가야 한다. 큰 산과 큰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우아하게 나이들고 싶다.
참! 책을 읽고 나서 너무 운동을 등한시한 생활 방식에는 깊이 반성하고 아파트 단지 헬스장에 꼬박꼬박 나가고 있다. 한창 등산을 다니던 시절에는 Seven Summit (킬리만자로, 에베레스트 등 5대륙 최정상과 남극 북극)같은 꿈도 잠시 꾸었지만, 이제 세 식구가 함께 세계의 멋진 트레킹 루트를 걸어볼 계획을 세우고 있다. 책에서 나온 몽블랑이며, 뉴질랜드의 밀포드, 스페인 산티아고, 일본의 후지산, 그리고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 오래 전 안나푸르나는 혼자 갔지만, 이제 세 명이다. 길 위에서 우리 가족은 함께 자랄 것이다. 새로운 계획을 꿈꾸게 해 준 이 책에 감사한다. ㅡ끝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