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가슴 속엔 자기만의 순대국집이 있지
단 하나의 소울푸드
회사 문을 나서니 태풍이 몰고온 북태평양의 뜨거운 날씨에 숨이 턱 막혔다. 더운 여름엔 운동량을 최소화하니 조금만 먹어도 바로 체중계의 바늘이 오른쪽으로 간다.
생각해보니 나의 최애 순대국을 먹은 지도 1주일이 넘었다. 너무 더우니 밖에 나갈 엄두가 안나서 약속이 없으면 집에서 가져간 간단한 음식을 먹거나 구내식당에서 적당히 먹고 만다. 보통 때는 ㅡ 덥지 않거나 추운 계절에 ㅡ 약속이 없는 날이면 혼자 12시반쯤 애정하는 순대국집 "장터순대국밥"에 간다. 단골답게 사장님과 익숙하게 눈인사를 나누고 "내 자리"인 창가 카운터 석에 앉아서 푸짐한 순대국밥을 천천히 먹는 것이 내가 직장 생활 중에 누리는 몇몇 은밀한 즐거움 중 하나이다. 비오는 날, 혼자 호젓하게 창 밖을 내다보며 뜨끈하게 순대국을 먹노라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다.
이 집의 순대국은 깨끗하고 맑고 자신있는(?) 곰탕 수준의 국물에 잘 다듬어진 돼지고기와 내장, 백암스타일 순대 네덧개가 들어있다. 식당 벽에는 양념 조제법이 붙어있다. 다진 마늘 1스푼, 다대기 1스푼, 들깻가루 1~2스푼, 새우젓 취향껏, 그리고 나는 잘게 썬 청양고추와 대파 수북히 얹는다. 다대기는 일본말이라 양념장이라 써야 한다지만 양념장은 양념간장의 줄인 말이고, 다대기는 고춧가루 베이스이니 엄연히 다른 종류의 소스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 생각없이 한 숟갈 한 숟갈 열심히 국밥을 먹고나면 배는 든든하고 가슴이 후련해진다. 오전 동안 아무리 골치아프거나 맘 상하는 일이 있었어도 리셋하고 새로 오후를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은 청양고추 양념에 들어있던 캡사이신 때문에 분비되는 아드레날린 때문일까? 아님 돼지고기에 듬뿍 든 비타민 B 때문일까.
옛날에는 순대나 순대국이 값이 저렴한 서민음식의 대명사였지만, 다른 모든 외식메뉴와 마찬가지로 순대국도 한그릇에 만원 시대에 진입했다. 나는 순대, 그리고 순대국의 가격상승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이라고 누누히 말하고 다닌다. 옛날에는 돼지를 잡고나서 부패가 빠른 선지와 내장을 헐값에 팔았고, 가난하지만 솜씨 좋은 식당주인들은 상하기 전에 부지런히 순대를 만들었다. 순대 제조 과정은 소세지와 거의 같은데, 다진 채소와 쌀 당면 등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니 더 맛좋은 건강영양식이다. 손이 많이 가고 재료배합의 노하우가 필요하며, 순대를 만든 후 솥에 쪄서 식힌 후 가지런히 칼로 썰어내기까지 어느 과정도 소홀히 하거나 뺄 수 없다. 소세지가 유목민 몽고인의 음식에서 시작하여 그들이 침략한 유럽을 거쳐 전 세계로 퍼져나간 정복의 음식인 반면, 순대는 한국의 북방지역ㅡ유목의 비중이 높은ㅡ에서 특별한 날 만들어 나누던 기쁨의 음식에서 6.25 이후 실향민이 생계를 위해 만들어 판 애환의 음식으로 그 정서가 달라졌다. 유목민의 전통이 있는 영국과 프랑스에 순대를 똑 닮은 음식ㅡ 블랙푸딩과 부댕ㅡ이 있다는 사실은 놀랍고도 반가왔다. 언어는 universal하다고 일찌기 촘스키 교수님이 말씀하셨으나, 이 위대한 명제에 감히 한 마디 보태어 '음식은 universal하다'고 숟가락을 얹어본다.
효율성을 최고로 치는 자본주의 시대에 이런 노동집약적 음식의 수명은 얼마나 지속될까. 순대를 만들 줄 아는 아줌마 할머니들도 점점 식당에서 사라져 갈 텐데, 시골의 농업인구와 지방 소도시의 맛집들이 동남아 외국인노동자로 채워지고 있는 것처럼, 순대국집의 주방도 그렇게 될까. 나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외국인이민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사람이지만, 순대국만큼은 매니아로서 한국인의 전통을 고수하는 수구세력으로 남고 싶다.
사실 내가 순대를 먹기 시작한 것은 스물대여섯 무렵부터였다. 그 때서야 친정 근처에서 전국구 순대 명소인 병천순대를 먹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 때 입 안에 순대를 넣고 씹기 시작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이 생생히 떠오른다. 고소하고 담백하며 감칠맛 팡팡 터지는 속을 감싼 돼지내장은 부드럽고도 살짝 쫄깃하여 식감의 균형이 훌륭했다. 나는 그 날, 순대를 먹지 않은 지난 25년 세월이 아까워 한탄했다. 특히, 초등학생 무렵, 시골 외할아버지의 환갑잔치를 준비하느라 돼지를 잡은 어느 겨울날, 집으로 초빙해온 푸줏간 주인이 돼지를 잡은 후 서비스로 외갓집 어른들과 함께 순대를 만들었더랬다. 돼지 한 마리에서 나온 내장으로 모조리 순대를 만들어 큰 가마솥에 또아리를 크게 몇바퀴인지 모르게 틀어서 쪄내던 충격적(^^:) 풍경이 눈에 선하다. 그 순대를 썰어넣고 가마솥 가득 국을 끓여 온동네 사람들과 환갑잔치 전야제를 했고 어르신들은 이렇게 맛난 순대국은 없을 거라며 감탄을 연발했다. 나와 언니를 포함한 어린애들은 매우 곤란한 얼굴로 대충 국물만 뜨는중 마는둥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나는 인생 순대국을 그 때 이미 놓친 거였다.
나의 순대국 사랑을 주변에서도 잘아는지라, 같이 밥을 먹게 되면 먼저 알아서 '순대국이지?'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장터순대국밥집을 향해 걸어간다.
.언니는 왜그리 순대국을 좋아해?
.누구나 가슴 속엔 자기만의 순대국집이 있는거야.
.음, 언니 가슴 속엔 한 열군데 있는 거 같은데.
장터순대국밥, 시청앞 농민백암순대, 병천 청화옥, 낙원시장 전주집.. 일단 이렇게 네 개가 지금 내 가슴 속에 있는 순대국집이다. 점점 늘어나서 열 개를 채우면 좋겠다. 그 열 개 순대국집이 계속 그 맛 변함없이 번창하기를.
어서 더위가 지나면 좋겠다. 순대국 먹으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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