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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euli Oct 19. 2024

에필로그: 모든 것이 너무 완벽했다

모든 것이 너무 완벽했다. 그래서 무서웠다.

너와 나. 우리 둘.

너무 행복해서 조그마한 것도 바꾸고 싶지 않았다.


만일 아이가 생기면 자주 다투게 되지 않을까?

지금 우리 둘이 너무 행복한데 이 행복이 깨지는 것 원치 않아.

늦게 결혼해 서둘러야 할판에 우리는 이러한 이유로 아이 갖기를 차일피일 미루었다.


과정도 결과도 행복한 그런 스토리의 영화, 드라마, 책을 보았다.

조금이라도 우울한 내용, 사고, 병, 죽음 등의 이야기가 나오면 티비 채널을 돌렸고, 책을 덮었다.

마치 그것이 내게 옮겨올까 봐 두렵기라도 한 듯.


주인집 할아버지가 직접 지었다는, 단열 공사를 하지 않은 외벽과 홑창 집은 겨울이 되면 아무리 난방을 해도 춥고, 여름이 되면 대지의 모든 열기를 다 머금은 듯 더웠다. 이 오래된 시골집에서 우리가 가장 애정하는 공간은 주방이었다. 늦은 오후까지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 앞 식탁 테이블에 앉아 우리는 함께 밥을 먹고,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사소한 것으로 말다툼을 하기도 했고, 별것 아닌 농담에 더욱 과장해 가며 하하하 웃기도 했다. 나는 이곳에 앉아 독일어 공부를 했고, 독일어 시험 준비를 하면서 독일어는 왜 이따위냐며 괜히 베니에게 심통을 내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즈음이 되면 한국에 계신 장인장모님께 편지를 쓴다고 베니는 이곳에 앉아서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들여 한글을 써 내려갔다. 연초록 언덕 위에서 한적하게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을 창문 너머로 한참을 구경하고 있다 보면, 지난 7년 홀로 고군분투했던 힘들었던 해외 생활을 위로받는 듯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사와 넘쳐흐르는 행복한 마음에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저는 지금 이대로가 너무 행복해요. 그래서 무서워요. 이 행복이 사라질까 봐. 주님, 저 아시죠? 저는 큰 고난은 견뎌내지 못할 사람이란 거. 대단한 인생 바라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아요. 그냥 큰 기복 없이 딱 지금만큼만 잔잔하고 소소하게 행복해하며 살 수 있도록 해주세요."



2022년 11월 11일 빼빼로 데이

베니는 MRI 검사를 하러 갔다. 한국에 있을 때 두통으로 힘들어하는 베니를 보고 엄마가 독일에 가면 꼭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름휴가 차 베니와 함께 한국에 갔을 때였다. 두통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베니를 두고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는 나를 보며 엄마는 혀를 쯧쯧 찼다.

"남편이 저리 아픈데, 너는 친구를 만나러 가니?"

"한국에 일 년에 한 번 오는데, 친구도 미국에서 살아서 지금 안 보면 기회가 없단 말이야. 그리고 베니 저렇게 두통 있는 거 종종 그래. 몇 번 병원도 가보고 기본적인 검사도 받고 했는데, 의사가 그냥 혈압이 조금 높은 것뿐이라고 괜찮다고 그랬어. MRI 찍어볼 필요 없다고. 베니 어머님도 젊으셨을 때 그랬고,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꽤 있는데 좀 심한 편두통이래."

엄마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말이 되니? 편두통이 저렇게 까지 아프다고? 휴가 끝나고 독일 돌아가면 꼭 MRI 찍어봐."

독일로 돌아와 우리는 여느 때처럼 일상에 치여 살아갔고, 그래도 엄마 말은 들어주자는 생각에 별생각 없이 MRI를 예약했다. 베니는 병원 방문 덕분에 연차를 써서 회사에 안 가도 되는 게 좋은 듯했다. 재택근무를 하고 있던 나는 아침에 병원에 가는 베니에게 밝게 손을 흔들며 평소와 같이 인사를 했다.

"잘 다녀와!"

병원에 다녀오고 나면 몰래 아시아 마트에서 사두었던 빼빼로 한통을 줘야지.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병원에서 돌아온 베니를 대충 반겨주었다. 빼빼로를 건네주려던 계획은 잊은 채로. 검사를 잘 받았는지, 결과는 어땠는지 조차 묻지 않았다. 분명 별 이상 없을 테니까. 우리가 애정하는 그 공간 - 창문 앞 식탁 테이블.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며 일에 몰두하고 있던 내 옆으로 베니가 의자를 끌어와서 앉았다.

"있지... 놀라지 말고 들어."

베니가 평소답지 않게 뜸을 들였다.

키보드를 치고 있던 손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나, 뇌종양이래."



깨질까 불안했던 행복이 깨졌다.



2024년. 8월 27일.

베니의 뇌종양 수술 후, 꼭 일 년 하고 이틀 째가 되는 날.

정신과 상담을 마치고 정말 오랜만에 스타벅스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라테 하나를 시켰다. 이층으로 올라가 창가 옆 테이블에 앉았다. 밝은 여름 햇빛이 평범한 작은 도시를 찬란하게 만들었다. 창문 너머 광장 분수대 주변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트램과 버스가 오가는 거리. 그 사이에 손을 잡고 걷는 노년 부부가 보인다. 자전거를 비스듬히 세워놓은 후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 둘. 전화를 하며 어디론가 분주히 걸어가는 남자. 터번을 머리에 쓴 여인이 유모차를 끌고 천천히 몸을 움직여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는 양갈래로 머리를 곱게 딴 금발의 꼬마 아이가 한 손에는 흰색 곰돌이 인형을 들고 비둘기를 쫓아 폴짝폴짝 뛰고 있다. 아이의 엄마와 아빠는 여유롭게 아이스크림을 베어 먹으면서도 시선은 아이의 움직임을 부지런히 쫒고 있다.

 

지극히 소소하고 평온한 일상의 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앞에 놓인 아이스라테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아- 맛있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는데도 여름의 햇살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예전에는 평온함이 깨질까 노심초사했지.

이제 평온함이라는 것은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렇지만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잘 이겨낼 것이고, 잘 이겨내려고 분투할 것이다. 그 과정이 다소 오래 걸린다 하더라도, 반복된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찰나의 소소한 행복을 찾을 것이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낼 것이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의 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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