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대한 자기기만은 대학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문학과는 상관없는 학과에 진학했지만 여전히 ‘작가’에 대한 환상에 휩싸여 있었다. 대입 스트레스에 벗어난 철부지는 예술가 코스프레를 하며 학점관리를 등한시했다. 전공과목보다는 문학 관련 교양수업에 열정을 쏟았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예술가의 특징으로 정당화했다. 하지만 실제 그 기간에 쓴 글은 몇 편 되지도 않았고, 글을 쓰는 기술이나 통찰력을 키우지도 못했다. 여전히 글쓰기는 좋은 포장지에 불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충동조절장애, 욕구 조절 장애 수준의 삶이었지만 그때는 그게 한 점의 의심 없이 진심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런 모래성 같은 자기기만은 치열한 현실의 파도 앞에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낭만적인 대학교 1학년이 지나고 찾아온 직업을 갖기 위한 인고의 시간은 글쓰기에 신경 쓸 여유 같은 것은 주어지지 않았다. 하물며 혼자서 맞서야 했던 현실 속에 누군가에게 과시하기 위한 위선은 끼어들 틈은 없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20대의 시간 속에서 글쓰기는 자취를 감추었다.
결국 20대 이전까지의 글쓰기는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그 행위의 이유와 목적 그리고 더 좋은 결과물을 위한 노력을 간과했다. 그저 떠오르는 생각을 토해내기 바빴으며 문장과 단어, 맥락에 대한 고민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자신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고, 뒤쳐질 것 같은 불안감에 언제나 시달렸다. 그런 불안감에서 도피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다. 무너지는 자존감을 지탱해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글을 쓰기 위해선 우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했다. 철저한 자기반성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고,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먼저 찾아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어디로 향하고자 하는지 고민해야 했다. 그렇지 못했기에 20대 이전의 글쓰기는 불확실한 자신을 가리고 평범한 일상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에 휩싸인 현실도피에 머무르고 말았다.
그럼에도 글을 쓰는 행위 자체는 적성에 맞았던 것 같다. 어쨌든 지금까지도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글을 쓰는 행위가 성장 과정에서 꽤 긍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경험에 의하면 결과물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책을 읽고, 생각하고, 정리하고, 창작하는 그 행위 자체는 사람을 성장시키는 힘이 확실히 있다. 결정적으로 평생 즐기는 취미를 안겨준 것만으로도 그 시간들은 의미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게다가 부족한 시작이었을지 몰라도 그 취미는 30대를 지나오는 동안 작은 버팀목이 되어 주었기에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