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이별에 대하여
어느 날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아들이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두 손바닥을 모아 내밀었다. 작은 두 손바닥 위에는 애기 주먹만 한 토마토가 올려져 있었다. 아들은 그 토마토를 새로운 친구 '토실이'라며 소개했다. 너무 귀엽지 않냐고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니 차마 키우지 말란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수업시간에 토마토에 눈알을 붙이며 무언가를 한 모양인데 '쉽사빠'인 아들은 토실이에게 순식간에 훅 빠져 버린 모양이었다.
그날 이후 아들의 토실이 사랑은 궁서체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를 시키고, 햇빛을 받을 수 있도록 베란다에 올려놓았다. 등교 전에는 본인이 없을 때 심심할까 봐 다른 장난감 친구들과 함께 놓아두고, 밤에는 모기에 물리지 않도록 이불을 덮어주었다. 우리 부부는 아들의 그런 기행(?)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쏟을 수 있는 거라고. 아들이 토실이를 챙기고 케어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잘못 키우고 있지 않은 것 같아 내심 안심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무언가를 키우는 과정을 통해서 아이들은 배우는 것이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 대상이 채소인 토마토라는 것에 살짝 당황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예전에 어느 책에서 아이들에게 채소나 과일을 키우게 하면 그 야채와 과일을 애완동물처럼 여겨 먹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그냥 이 모든 과정이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지면서도 한 가지 걱정이 앞섰다. 바로 토마토가 실온에서 얼마 버티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토마토가 썩으면 벌레가 꼬이는 것도 문제지만 아들이 상심을 느낄까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토록 좋아하는 아들에게 키우지 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삼일쯤 지났을까, 역시나 걱정하던 상황이 닥쳤다. 어김없이 아침 등교 전 토실이를 씻겨주던 중 토실이의 옆구리가 터진 것이다. '아빠~'하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달려온 아들은 이미 눈물로 그렁그렁했다. 바쁜 등교 시간이었지만 윽박을 지를 수도 없고, 별일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도 없고 어찌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언제나 낯선 순간을 마주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부모로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너무 받아주면 아이들이 생떼만 늘고 교육상 좋지 않을 것 같다가도, 제대로 반응해주지 않으면 왠지 아이들의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 같아 불안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결국 울먹이는 아들을 않고 토닥이며 달랠 수밖에 없었다.
"아들, 뭐든지 영원할 순 없어. 토실이는 토마토니까 시간이 지나면 그럴 수 있어."
"일단 등교는 해야 하니까 우선 씻자 아들~"
말을 하고 나서도 참 건조하고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은 바쁘고 시간은 없고 멘붕이 온 건 아빠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딱히 다른 말이 생각나지가 않았다. 그래도 아들은 그 말에 또 꾸역꾸역 이빨을 닦고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했기에 혹시나 맘 상하지 않게 어르고 달래며 등교 준비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풀 죽은 채 버스를 타고 갈 때까지 아들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했다.
회사에 출근을 해서도 토실이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저녁에 아들한테 토실이와의 이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어쨌든 이번 일로 아들이 상처받지 않게 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퇴근해서 집에 가까워질수록 어떻게 해야 할지 막연하고 한숨만 나왔다. 하지만 퇴근 후 맞이한 아들은 당황스럽게도 너무도 평온하고 해맑았다.
'뭐지?'
부랴부랴 토실이를 찾아보았더니 토실이는 아침에 고이 모셔 둔 그곳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렇다고 잘 있는 애한테 괜히 토실이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고, 어린 아이라 그새 잊은 건가도 싶고 혼란스러웠다. 아침의 그 난리는 무엇이었나 억울하기까지 했다. 하루 종일 속 끓인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역시 애들은 애들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 생각 역시 섣부른 판단이었다. 자기 전 아들이 갑자기 쪼르르 달려와하는 말을 듣고 한참을 벙쪄 있었다.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의 생각보다 한 발짝 더 앞에 있기 마련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아들은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두 손바닥을 모아 내밀었다. 작은 두 손바닥 위에는 아들 주먹만 한 고구마가 올려져 있었다. 아들은 그 고구마를 새로 생긴 친구라고 소개했다. 아직 이름은 정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아들은 이제 고구마가 생겼으니 토실이를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런 아들의 모습에 상처를 받은 것 같지 않아 다행이면서도 이런 반응이 정상적인 것인지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토실이를 보내주자며 입꼬리가 하염없이 내려가는 아들을 보면 기우인 것 같다. 어쩌면 아들은 이미 죽음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어느 정도 이해하고 받아들인 건지도 모른다. 아이는 이미 내 생각보다 더 큰 모양이다. 오늘 하루는 정말 아들 때문에 여러 번 놀라게 되는 것 같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들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하면서 스스로 성장한다. 부모 역할은 그런 아이들을 잘 지켜보며 곁을 지켜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자신의 인생은 결국 스스로 이겨 내야 한다는 냉정한 현실을 아이들이 잘 적응하도록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아이들 덕에 부모도 좀 더 성숙해질 수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