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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지 Jan 18. 2021

[단편소설] 하녀

영화를 소설로
<하녀>




 짧지만 그래도 긴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무언가를 제대로 가져본 적이 있었나. 은이는 까마득했다. 들어오는 족족 빚으로 나가는 푼돈부터 남들이 이 세상의 가장 소중한 가치라 말하는 일말의 애정까지도, 은이의 몫은 없었다. 기억나지도 않는 어린 시절에는 아마 은이도 무언가를 가졌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지금 은이의 두 손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제 그런 것들에 대해 아쉽다거나 스스로를 불쌍하다 여기기엔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빴다. 이런 자신의 삶에서 과거는 돌아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스스로를 위로하는 길이었다. 안 해본 일이 없다. 가출한 다른 소년, 소녀들과 주유소에서부터 시작해 신문도 돌려봤고, 갈비집에서 얼굴이 녹아가는 것을 느끼며 저녁 시간 내내 숯을 구운 적도 있었고, 또…. 다 늘어놓기엔 비참한 전적이 너무도 화려했다.


 그래서 은이는 이곳에 들어와 있는 것이 행운이라고 여겨졌다. 이런 집과 이런 집에서 사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TV속에서나 있는 줄 알았다. 자신같이 없는 사람들에겐 위화감을 주고, 있는 사람들에겐 빈부의 격차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 위해 지어내는 그런 이야기의 배경인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그 속에 있었다. 말이 좋아서 홈 메이드지, 잔 일거리 하는 21세기의 하녀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제공되는 숙식은 지금껏 겪어왔던 그 어느 조건보다도 좋았고 일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잔심부름이나 허드렛일에는 이미 잔뼈가 굵어 집안일이라 할지라도 은이는 야무진 손으로 척척 해낼 수 있었다. 집주인, 사모님이라고 부르라 한 여자, 그리고 다른 가정부들은 다들 은이에게 만족해했고 은이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이 집에서 남자는 집주인뿐이었다. 남자는 이런 으리으리한 전원의 주택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젊었고, 늘 깔끔하고 단정했다. 그를 볼 때면 은이는 새삼 태생의 비운을 느껴야했다. 아마 그는 은이가 갖지 못한 모든 것을 다 가졌을 것이다. 더듬더듬 말을 배우던 시절, 그는 '없다'라는 말을 어떻게 배웠을까. '없다'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는 있었을까.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있는데. 태어났을 때부터 둘러싸인 환경이 자신과는 정반대였을 남자를 바라볼 때마다 은이는 기이한 기분에 휩싸였다. 결핍 속에서 자란 자신과 동시간대에 모든 것을 누리며 행복했을 저 남자는 어떤 사고를 가지고 있을까. 더 갖고 싶은 것이 있을까. 움켜쥐고 싶은 욕망이라는 것이 있을까. 그의 얼굴은 늘 침착하고 평화로워 알 수가 없었다. 자신처럼 갖지 못해 허덕이는 사람과는 눈동자의 빛부터 달랐다.


 사모님이라는 집주인의 아내는 아무리 임산부라지만 지나치게 몸을 사렸다. 은이는 아주 사소한 걸음도 하지 않는 그녀에게 온갖 수발을 들어야 했다. 은이는 그녀가 진심으로 웃는 것은 잘 보지 못했다. 그녀는 언제나 무언가를 요구하는 표정이었다. 자신에 대한 지나친 배려를, 좀 더 화려하고 값비싼 옷과 패물을, 그리고 집주인의 애정을. 은이가 보기에 남자는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친절을 베푸는 듯 했지만 여자는 늘 만족해하지 않는 눈치였다. 남자는 임신한 아내에게 더없이 다정했기에 은이는 그 점이 이상했다.



 어느 날, 여자는 친정에 가겠다며 커다란 가방에 옷가지들을 챙겨 집을 나섰다. 옷만 들었을 텐데도 사람 한 명쯤은 들어있는 것처럼 묵직한 가방을 차 트렁크에 싣고 나서야 은이는 조금 갑갑했던 것이 풀리는 듯 했다. 이 집에서 자신을 가장 불편하게 하는 사람은 남자의 아내였다. 소일거리를 가장 많이 주는 사람도 그녀였기에 한동안은 편하게 지낼 수 있겠다는 것이 은이의 생각이었다. 흑색의 길고 커다란 차가 정원을 가로질러 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이는 집 안으로 들어왔다. 곧이어 2층 계단을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배웅 잘 해드렸어요?”

“네.”

“나도 나가보려고 했는데, 급한 전화가 와서 말이야.”

“잘 가셨어요.”


 남자는 미간을 모으며 사뭇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남편이 따라 나오지 않은 것에 집 어딘가를 향해 눈을 흘기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막상 은이는 무덤하게 대답했다. 당분간 이 집에는 남자와 자신 둘 만이 남게 되었다. 다른 가정부들은 남자의 아내가 친정에 간 틈을 타서 좋은 휴가를 얻었다. 돌아갈 곳이 없는데다 이곳에 아무도 남지 않으면 집을 돌볼 사람이 없어 은이만이 남았다.


 남자는 그대로 은이를 지나쳐 1층 홀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그랜드 피아노에 다가갔다. 은이는 그가 피아노를 치는 것을 종종 보아왔다. 가꿔온 음악적 소양이 없기에 그가 연주하는 곡이 어떤 곡인지, 그리고 그가 훌륭한 연주자인지 같은 것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듣기에 나쁘진 않았고 유려했다. 그가 피아노 덮개를 열고 자리에 앉아 하얀 건반위에 손가락을 살포시 얹는 것을 은이는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남쪽으로 트여진 커다란 창문으로, 먼지까지 비쳐 보일 고운 햇살이 마치 무대의 조명처럼 곧게 쏟아졌다. 남자의 머리칼이 햇살에 빛나는 것에 은이는 저도 모르게 넋을 잃었다. 조용한 실내에 곧 남자가 연주하는 이름 모를 피아노곡이 잔잔히 퍼졌다.


 문득, 남자가 연주를 멈추고 은이를 돌아보았다. 빙그레 짓는 미소는 그의 뒤에서 비쳐오는 햇살처럼 눈이 부셨다.


“피아노, 쳐 볼래요?”

“전 배운 적이 없는데요.”

“가르쳐줄게요.”


 은이는 머뭇거리며 망설였다. 피아노 건반 따위 만져본 적이 없는데다, 겉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가죽이 덮여진 피아노 의자에 자신이 앉는 모습은 쉽게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남자가 이끄는 대로 건반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린다 해도 우스운 모습만 보일까 차마 쉽게 그의 친절한 제안에 수긍할 수 없었다. 남자가 와보라는 듯 은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은이는 차마 자신에게 뻗어진 손을 거절할 수 없어 어색한 걸음으로 그의 곁에 다가갔다. 남자는 은이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며 옆으로 비껴 앉았고, 은이는 한 번 더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나란히 그의 옆에 앉았다.


“달걀을 손에 쥔 것처럼, 손에 힘을 빼고 살짝 얹어 봐요.”


 은이는 그의 눈치를 보며 시키는 대로 손을 건반 위에 얹었다. 이상하게도 이 낯선 상황은 은이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고상한 취미는 은이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뭐가 묻을까 겁이 날 정도의 깨끗한 건반 위에 자신의 손이 얹어져 있는 모습은 설레면서도 조바심이 나는 장면이었다. 남자가 은이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얹었다. 그가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은이의 손을 지그시 누를 때마다, 자신의 손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투명하고 맑은 피아노음이 울렸다. 도, 레, 미…. 천천히 음계를 읊으며 남자는 은이의 손을 감싸 건반을 눌렀고 은이는 자신의 손을 제외한 모든 부위가 굳어가는 것을 느끼며 그가 이끄는 대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손이 예쁘네요. 피아노 치기 좋은 손이에요.”

“….”

“난 이렇게 손이 투박해서요. 별로 안 좋거든요.”


 그가 은이의 손등에서 떼어낸 자신의 손을 은이의 눈앞에 펼쳐 들어보였다. 자신보다는 마디가 굵은, 그리고 끝이 뭉툭한 적당히 남자다운 손이었다. 남자가 펼친 손가락 사이로 그의 밤색 눈동자가 은이에게 오롯이 향해있었다. 좁은 틈으로 마주한 눈동자는 그 손가락 사이의 틈새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깊었다. 순간 은이는 발끝부터 타고 올라오는 묘한 기분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아직 어색하게 건반 위에 놓여있는 자신의 손이 남의 것인 양 느껴졌다.


“방금 했던 거, 혼자 다시 해봐요.”


 그의 말에 은이는 망설이다가 처음으로 온전한 제 힘을 주어 건반을 눌렀다.


 그 날의 낯선 경험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은이를 설레게 했다. 연주라고 할 것도 없지만 자신이 처음으로 만들어낸 악기를 통한 소리는 이명처럼 귓가에 오래도록 남았다. 하지만 단순히 그뿐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손을 잡고 건반을 함께 눌러주었던 남자의 손에서 느껴지던 온기, 그리고 그가 벌린 손가락 사이로 마주쳤던 시선들을 떠올릴 때마다 은이는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을 곱씹을수록 그와 나란히 앉아있었을 때 닿았던 어깨, 팔, 다리 같은 부분들이 불에 덴 듯 화끈거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솔직히 표현하자면 갖고 싶기까지 했다. 은이는 지금까지 이런 것에 욕심을 내 본 적이 없었다. 커다란 통유리에서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우아하게 피아노를 치는 취미를 향유하기엔 자신의 지위는 너무나 낮았다. 그런데 지금, 그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조금 더 그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졌다. 그 순간만큼은 지금까지 힘들었던 은이의 하루하루가 꿈인 것처럼, 그 황홀한 시간이 진실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할머니나 다름없는 가정부가 챙겨준 매뉴얼을 따라 은이는 남자의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마주하게 될 그의 얼굴을 떠올리니 은이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사뭇 긴장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깊은 밤색 눈동자를 떠올릴 때마다 은이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는 은이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렴풋이 생각하기론, 그가 자신에게 지금껏 꿈꾸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식탁 위에 그의 수저를 챙겨 올리며 은이는 문득 자신의 손에 시선이 갔다. 그리고 마치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그의 입술이 떨어지던 소리부터 시작해 '손이 예쁘네요.'라고 말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은이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피아노 치기 좋은 손이라는 칭찬보다, 예쁘다는 말이 조금 더 좋았다. 그리고 남자는 평소의 아침 식사 시간 그대로 맞추어 정갈한 모습으로 식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잘 잤어요?”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남자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은이는 그가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한술을 뜨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저, 오늘도 피아노 가르쳐 주시면 안돼요?”


갑작스러운 은이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입을 우물거리는 것이 천천히 멈춰지더니 은이에게도 쉽게 지어주던 예의 단정한 미소를 지었다. 마저 입안의 것을 삼켜낸 남자가 그제야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래요. 이따 오후에 내려와요.”


 그 날 오후, 은이도 잘 알고 있는 어느 동요를 배웠다. 은이는 남자와 함께 서툴게 연주하면서 진심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마 보통 사람들이 일주일치 웃는 정도의 웃음을 은이는 남자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모두 소비했다. 남자는 은이에게 잘한다며 몇 번이나 칭찬을 해주었고 그 때마다 은이는 수줍은 웃음으로 그와 마주했다. 피아노를 잘 친다는 말이 좋은 것인지, 그가 자신을 칭찬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 자신이 지금까지 누려보지 못했던 소박하지 않은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처음엔 그와 이 집에 남게 된 것이 두렵고 긴장되었지만, 막상 그와 이렇게 피아노를 치고 있으니 계속 단 둘이고 싶어졌다.


 며칠을 그렇게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매일 너그럽고 자상하게 은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은이는 아이가 젖을 빠는 것처럼 간절하고도 무섭게 그가 가르쳐주는 대로 흡수해 건반을 두드렸다.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더 칭찬받고 싶었다. 그리고 더 관심을 받고 싶었다. 그러다보니, 가지지 못해왔던 자가 욕망을 품게 되면 그것은 상상 이상으로 걷잡을 수 없게 커진다는 것을 은이는 깨달았다. 그와 함께 피아노를 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은이는 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시간 뿐만 아니라 남자 자체도 갖고 싶어졌다. 둘 다 처음부터 은이의 것은 아니었고, 은이의 몫으로 내어 준 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욱 갖고 싶었다. 피아노든 남자, 그러니까 훈이든.


 훈과 시선을 마주할수록 은이는 그의 아내가 어째서 그렇게 결핍된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는 소유하고 싶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너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서일까. 훈을 온전히 갖는 것은 힘든 듯 보였다. 그래서 그녀도 그렇게 그를 갈구했는지도 모른다. 은이는 하다못해 훈의 시선이 닿는 사물까지도 모두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저와 있을 땐 저만 바라봐 주세요. 다른 것은 만지지 말고 그 손길을 저에게만 주세요. 아무 것도 듣지 말고 제 목소리만 들어주세요.

 

 아니, 계속 저와 있어주세요.     



 이 집의 흠이 있다면, 외관 때문인지 유리창이 너무 얇다는 것이었다. 클래식한 창틀이 감싼 유리는 폭풍우에 무섭게 흔들리며 빗소리를 고스란히 전해왔다. 은이는 유리창 바로 아래의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 큰 소리 탓에 자신이 바깥에 내던져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잠들지 못하고 이불만 머리 끝까지 덮고 있으니 자꾸만 훈이 떠올랐다. 이 방문을 열고 뛰쳐나가 복도를 달려 가장 안쪽의 큰 방문을 활짝 열면, 바로 정면에 보이는 커다란 침대 위에 그가 누워있을 것이다. 그는 지금 잠을 자고 있을까. 아니면 누워서 책을 보고 있을까. 혹은 이렇게 폭우가 몰아치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까. 은이는 자신이 요즘 그에게 위험한 욕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밤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그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었다. 그의 품 안에서라면 하늘이 쪼개질 것 같은 천둥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투명한 피아노곡이 서로를 감싼 공기를 타고 흐를지도 모른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번쩍이는 번개의 섬광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 은이는 어느새 침대 위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고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은이는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훈의 방문 앞에 서서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숨을 고르고 있을 때, 기다렸다는 듯 그가 있는 방문이 열리더니 얇은 나이트 가운만을 입은 그가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슬리퍼도 신지 않고 맨발로 달려온 은이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직 채 가다듬지 못한 숨을 크게 몰아쉬었고, 그는 그런 은이를 조금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마주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목조로 된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은이는 그의 품 안으로 뛰어들다시피 안겨버리고 말았다.


“저, 저랑 같이 있어주세요.”

“…천둥소리가 무서워요?”

“네….”


 그가 마지못해 은이를 안으며 묻는 말에 은이는 거짓으로 대답했다. 이깟 천둥소리쯤 은이는 두렵지 않았다. 다만 폭우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애달파한 시간동안 그를 더욱 갈망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빗소리가 두드린 것은 은이의 방 창문이지만, 이 밤에 은이의 가슴을 두드린 것은 그였다. 이것을 빌미로 그의 품에 안길 수 있다면 다른 거짓말이라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와 피아노 의자에 나란히 앉을 때마다 잔잔하게 풍기던 향은 그의 나이트 가운에 코를 파묻자 지독하게 느껴질 만큼 진했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심장 박동도 느껴졌다. 은이의 가슴이 뛰는 것처럼 그도 똑같이 뛰고 있었다. 은이는 그의 가슴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그리고 훈은 은이를 안은 채로 방문을 닫았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은이는 참을 수 없는 욕망에 휩싸여 그가 홑겹으로 입고 있는 가운을 다짜고짜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황한 훈이 은이의 손목을 붙들었다. 가운의 허리끈을 붙들고 손을 덜덜 떨고 있는 은이는 자신만큼이나 파리하게 떨고 있는 그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평소에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도 자신을 원하고 있다고. 하지만 훈은 은이의 생각과는 다르게 차분하면서도 조금은 냉정하다 싶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래요.”

“…저랑 이러고 싶으셨던 거 아니었어요?”

“…….”


 은이는 잡혀 있던 두 손을 뿌리치고는 자신이 입고 있던 얇은 티셔츠부터 벗었다. 갑자기 피부에 닿는 찬 공기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은이는 그에게서 천천히 뒷걸음질 쳐 침대 가까이 있는 창가로 가 몸을 기대었다. 내가 당신을 가질 수 없다면, 당신이 나를 가지면 돼. 나는 가지는 것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당신이 나를 가져.


 훈이 은이에게 다가와 그녀의 몸을 확 낚아챈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가 그의 아내와 누웠을 침대 위로 몸이 던져지다시피 눕혀지며 은이는 아찔함을 느꼈다. 자신의 몸이 닿자 출렁이던 침대처럼 은이의 온 몸의 세포도 함께 출렁이며 깨어났다. 자신의 입술을 물어뜯는 그의 행동에 은이는 더욱 흥분을 느끼며 환락에 젖은 얼굴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나는 다 잘 할 수 있어요. 은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보다 뭐든지 더 잘하고 싶었다. 그와 피아노를 치든, 그의 밥을 차려주든, 그와 이렇게 섹스를 하든 무엇이든 그에게 칭찬받고 싶었다. 은이가 그의 손가락 틈새로 보았던 고요한 밤색 눈동자는 어느새 은이 못지않은 욕망에 축축이 젖어 은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흡혈귀처럼 그는 이제 은이의 목을 물고 더 내려가 가슴 위의 오른 살을 물며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은이는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야릇한 신음소리를 과장 섞어 내지르며 그를 계속 달구었다. 그의 움직임에 커다랗고 묵직한 침대도 함께 요란을 떨었다. 삐걱삐걱 흔들리는 침대의 소리가 귀에 거슬렸지만 은이에겐 지금 그런 것에 오래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온몸으로 퍼지는 흥분을 다 느끼기에도 모자랐다. 조금 그의 움직임에 익숙해질 무렵, 은이는 자신의 모습에서 값싼 창녀를 떠올렸다. 적은 화대에도 쉽게 몸을 주고 싸구려 신음을 끝없이 내지르는 그녀들. 은이는 그녀들 못지않게 색스러움을 가득 담은 소리를 계속 입 밖으로 흘렸다. 지금 그에게 몸을 맡긴 자신도 다를 것은 없었다. 다만 지금 이 남자를 진심으로 차지하고 싶다는 욕망만이 다를 뿐이었다. 그녀들이 받는 화대 같은 것은 필요 없다. 지금 은이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훈이라는 남자 그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은이의 모습에 훈은 더욱 미쳐가는 것 같았다. 그의 움직임이 크고 빨라질수록 서로의 숨소리와 간간이 터지는 신음은 더욱 커졌다. 은이는 감당할 수 없는 쾌감에 고개를 젖혔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폭우가 내리고 있어 두 사람의 낯 뜨거운 살이 부딪히는 소리는 아마 그 누구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온몸이 땀에 젖은 채로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었다. 마주 치는 시선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서로를 향한 욕망에 가득 차 있었다. 은이는 눈을 아래로 내리며 한 번 깜빡였다. 여전히 그에게 안겨있는 상태였다. 그가 은이의 뒤통수를 잡아당겨 자신의 어깨에 묻고는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모든 걸 가지고 있어 욕망이라는 것이 없을 것만 같은 이 남자가 이젠 자신에게 욕망을 가져주길. 은이는 간절히 바라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미소 지었다. 당신이 지금 날 가졌으니, 난 이제 당신을 낱낱이 먹어 치울 거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영화를 본 기억이 없다.

보지도 않고 썼나 보다...

그나저나 문장 무슨 일이람 급하게 썼나 봄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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