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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D 문화 브로셔 Sep 21. 2022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볼 수 있으나 보지 않으려는 자들

 본 영화의 원작은 눈먼 자들의 도시(포르투갈어 원제: Ensaio sobre a cegueira)라는 소설이다. 작가는 포르투갈의 주제 사라마구로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주제 사라마구는 예수복음, 수도원의 비망록, 눈뜬 자들의 도시 등의 작품을 쓰기도 하였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1995년에 포르투갈어로 출간되었다. 영화는 2008년에 동명의 이름으로 개봉했다. 시티 오브 갓 감독인 페르난도 메이렐레스가 연출했고, 줄리안 무어, 마크 러팔로,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산드라 오 등이 캐스팅되었다. 2008년 칸느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

 소설 원작은 작가에게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가져다줄만큼 문학적 작품성을 크게 인정 받았으나 영화는 그만큼의 작품성을 인정 받지는 못했다. 영화 자체는 원작의 재현에 충실하고자 한 것으로 보이며, 영화 나름의 단독적인 각색은 보여주지 못했다. 이 글에서는 소설이 영화로 각색되면서 어떠한 차이를 보이며 영화적 특성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이야기하고, 작품이 가진 다양한 의미와 메시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인간과 문명의 보편적인 문제를 제대로 드러난 작품으로 그 작품성을 인정 받고 있으나 이 글에서는 정치적 우화로서 드러내주고 있는 문제 의식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소설과 영화의 차이점

 영화는 소설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충실했다. 영화라는 장르가 가진 특수성을 제대로 연출하려면 원작 스토리의 과감한 개작이 필요하다. 소설을 영화로 각색할 경우 소설은 드러내고 싶은 부분만 말 하면 되지만 영화는 보여주고 싶었던 부분이 아니더라도 시청각적으로 모두 묘사해야한다. 그것은 주요 강조점 외의 다른 부분들에서도 디테일적으로 모두 살려줘야 한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소설을 영화화할 때는 소설에서 비어있던 부분을 모두 채워 넣어야 한다. 그런 부분을 어떻게 채워 넣었는가를 보는 것은 새로운 재미를 준다고 할 수 있겠다. 영화에서는 시간적으로 크게 압축할 수밖에 없어 시간적인 디테일을 사용할 수 없으나 공간적으로는 모든 부분에 균질하게 디테일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이 소설과 영화에서는 특히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인간들이 얼마나 더럽게 변하느냐를 묘사하는 부분이다. 소설에서 말로만 하던 묘사가 영화에서는 훨씬 강력하게 이미지로 전달해줄 수 있다. 그러한 상태에 대한 혐오감을 극 중에서 주인공만이 느낄 수 있었던 그것을 관객은 함께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다.

 영화는 소설의 모든 스토리를 다 담으려는 듯 대단히 빠른 스피드로 전개된다. 너무 빨라서 주의집중이 조금만 떨어지면 어느 요소에 담긴 세부적 내용을 놓칠 수도 있는 정도다. 소설에서는 길게 묘사되는 부분이 매우 짧은 시간에 잠깐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은 그 부분을 무심코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다. 이는 영화가 가진 시간적 한계 때문에 원작을 그대로 모두 담으려고 하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한계이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는 원작을 그대로 담기보다는 차라리 각색을 통해 다른 중심점을 설정하고 그것에 충실하면서 연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적 각색 측면에서는 소설 원작과 다른 작품성을 보여줬다고 하기에는 어렵다 하겠다.

 개연성의 문제가 소설에서는 어느 정도 설명이 되는 반면에 세심한 디테일들이 사라지는 영화에서 원작의 스토리만을 그대로 진행시키면 관객으로 하여금 개연성을 획득하도록 하기 어려운 경우가 발생한다. 이 영화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에서의 개연성 부족을 지적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원작 자체가 가진 상징성과 우화성의 표현을 위한 개연성의 포기도 있을 수 있겠지만 영화가 디테일적으로 표현하는 중에 관객들이 그것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도록 하지 못했다는 면도 포함된다.

 마지막에 나레이션으로 눈먼 것의 의미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작품의 영화적 완결성을 떨어뜨리는 것인데,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에 있어서 영화적 장치를 포기하고 소설적 장치를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소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충실하고자 하였음을 다시금 재확인시켜주는 마지막 씬이다.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특성은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장면과 사건으로 메시지를 용해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영화적 특성으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소설적 특성인 말로 설명하려는 자세는 영화의 작품적 완결성을 해치는데 큰 몫을 했다 할 수 있겠다.     


영화로서의 기법

 의사가 장님이 되는 아침에 여러 가지 아침에 일어나는 행동들을 묘사하는 장면이 있다. 소설에서는 청각을 묘사하면 되지만 영화에서는 시청각에서 청각을 드러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사고하면 그냥 장님인 의사의 입장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소리만 들리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감독은 의사의 아내의 시각에서 그것을 묘사해내었다. 감독은 클로즈업 장면을 감정적 몰입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클로즈업함으로써 사물의 형태를 온전히 보여주지 않고 부분만 보여주었다. 시각적으로 전체를 인식하지 않도록 함으로 시각을 방해하고 청각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한다. 안정되게 피사체를 잡지 않는 이러한 카메라워크는 장님들과 관련된 묘사에서 자주 반복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영화에서 아쉬운 점은 음향적 효과가 거의 사용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시각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민감한 요소는 청각일 수밖에 없다. 작품 전반적으로 청각적 요소가 강조되어 사용된 씬이 별로 없으며, 사람들의 감정적인 동조를 위한 배경 음악 사용도 거의 배제되었다. 매우 건조하게 전개되는 씬들은 그저 상황을 보여주는 것에서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의 감정적 동조를 이끌어야 하는 처절한 도시 장면을 보여주는 씬이나 폭력적인 장면이 나타나는 씬에서조차 배경음악은 배제되어 감정적으로 매우 가라앉은 상태에서 영화를 보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관객들이 이성적으로 판단하도록 하는 장치일수도 있겠지만 감정적인 동조가 필요한 장면에서는 효과적인 연출이 되지 못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의 화면 톤의 사용

 영화에서는 여러 가지 화면 톤이 계속 바뀌면서 사용된다. 특히 브라운(brown) 톤과 사이안(cyan) 톤을 번갈아 가며 사용한다. 또한 기본적으로 화이트 톤은 눈먼 자들의 입장으로 들어갈 때 주로 사용된다. 사이안 톤은 암울한 상황에서 주로 사용되지만 사실 가장 암울한 상황은 화이트 톤에서 묘사된다. 폭력자들의 공간에서는 브라운 톤이 사용되고, 주인공들의 방에서는 사이안 톤이 사용된다. 브라운 톤은 붉은 계열로 감정과 본능을 상징하고, 사이안 톤은 푸른 계열로 이성과 합리성을 상징한다. 브라운 톤은 불이 나는 장면에서 가장 강렬하게 붉은 빛을 보여주고 그것으로 폭력적 집단이 없어짐에 따라 그 사용 용도도 마감된다. 사이안 톤은 또한 암울한 상황을 묘사할 때 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는 매우 전형적인 사용이긴 하다. 또한 사이안 톤을 밝게 사용하는데 전형적으로는 암울한 묘사에서는 사이안 톤을 어둡게 사용하는 것과는 반대적 사용이다. 그것은 본 작품의 눈먼 자들이 하얗게 보게 된다는 것을 반영하느라 그렇게 했을 것이다. 후반부에 들어서면서는 브라운 톤이 주인공 집단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그것은 따뜻함과 인간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끝으로 사람들이 시각을 찾은 이 후에는 톤은 사라진다. 실제 세계의 색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계속 과다 노출된 화면을 사용하고 있고 화이트 플래시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물론 이는 맹인들의 증상이 하얗게만 보인다는 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더불어 탈색이 이뤄짐에 따라 맹인들의 세상이 시각적으로만 색을 잃어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가졌던 다양했던 문명과 문화가 사라져감도 상징해주고 있다.     


처참한 세계에 대한 묘사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처참하게 변해 버린 주변 상황에 대한 묘사이다. 더럽게 변해 버린 주변 상황을 매우 처참하게 묘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세계에 대한 묘사는 주로 정리되지 않은 쓰레기들이 마구 버려진 상황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과 시체들로 묘사된다. 원작에도 묘사되었지만 개들이 시체를 뜯어먹는 장면은 가장 처참함을 드러내는 극적 장면으로 나타난다. 이어 성당에서 눈 가려진 성상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처참함의 의미를 더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워낙 짧은 시간으로 묘사되어 그러한 처참함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장면의 묘사에서 극적 효과나 시간적 연장 또는 강렬한 배경음악 등의 감정적 격정을 끌어오기 위한 장치들이 모두 사용되지 않았다. 바깥 세상으로 나왔을 때 쓰레기들이 많고, 사람들이 서로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싸우는 장면들로 묘사는 되지만 배설물로 뒤엎인 더러운 장면의 묘사는 부족하다. 사람들이 집을 찾아 들어갔을 때에도 더럽게 묻은 것들을 해결하는 장면이 생략되어 있다. 배설물이 퍼져있어 사람들이 최악의 상황으로 떨어져있음에 대해서 원작은 자주 묘사하고 있는 반면에 영화에서는 그 부분에 대해서 매우 조악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영화적 불쾌감을 줄이려는 의도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상황이 가진 실제적 느낌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이라는 아쉬움을 줄 수밖에 없다.     


문명과 사회적 규범성

 영화의 첫 장면은 검정 화면에서 신호등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줌으로 시작된다. 한 운전사가 갑자기 안 보이는 현상을 보이며 교통을 마비시키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신호등은 사회적 약속, 규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이 작품이 일반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중심적인 주제이다. 사회적 규범이 모두 무너지는 상태에 처한 인간에 대한 묘사이다. 시각에 기초한 문명은 모두가 맹인이 되는 순간 한 순간에 허무하게 무너져버린다. 규범이 무너지는 순간 상실되는 인간의 존엄성이 나타나고, 그로 인해 드러나는 인간들의 폭력성과 원초적 본능이 묘사된다. 이 주제는 일반적으로 이 작품이 가진 중심적 주제로 자주 논해지는 부분이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가 그러한 규범의 해체를 나쁘게 평하고 사람들의 사이에는 조직적, 규범적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하고자 하는데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작품에서 볼 수는 있으나 사실상 중심적인 메시지로 여겨지지는 않는 것이다.

 작품에서는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모두 직업이나 그 성격으로 불리워진다. 그것은 마치 시각을 상실하게 됨에 따라 상실되게 되는 엄밀한 기호성을 보여준다. 시각은 매우 세밀한 판별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이다. 언어와 이름은 바로 그러한 세밀한 인식을 상징한다. 이름이 나타나지 않고 그 직업과 성향으로만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세밀한 인식들이 상실된 세계와 맞닿아있다.

 애꾸눈은 시각을 잃어버림에 따라 보여주기 위한 것들에 치중했던 사람들에 대해 비난적인 어조로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작품 전체적으로 시각이 가진 능력과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반면 시각으로 인한 부작용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각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거추장스러운 시각으로 인해 불필요한 무언가를 만들어놓은 것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점차 강고하게 자리를 잡아갈수록 욕망과 육체에 기초한 덩어리들은 점점 커져가고 욕망의 가장 큰 관문인 시각을 통한 자극과 규칙들은 더욱 힘을 발휘하게 된다. 자본주의가 시각에 기초하여 욕망을 생산하고 상품의 소비를 자극하는 현대의 체계에 대한 이야기다.     


타자성의 문제

 첫 장면은 가장 시각적인 능력이 필요해 보이는 운전 상황으로 시작된다. 시각을 잃은 사람에게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는 다른 운전자들의 모습은 맹인에 대한 사회적 타자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 운전사는 일본인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맹인이 가지는 타자성을 우선적으로 보여주는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백인 사회에서 일본인이라는 민족적 소수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민족적인 소수자이지만 집은 대단히 부유한 모습으로 연출됨으로 그 타자성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부유하고 부러울 것 없이 살아가던 사람도 시각을 잃어버리는 순간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시각을 잃는다는 것의 손실감을 더욱 강렬한 대비로 보여주는 셈이다. 소설에서는 전혀 사람들의 인종은 나타나지 않는다. 소설에서 묘사되지 않는 부분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보충한 부분이다. 일본인 주인공은 소유물로 타장성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한 그렇게 극복한 타자성이 시각을 잃음으로 잃게 되는 소유물들의 소유성의 상실로 다시 타자화됨을 보여주고 있다.

 눈 먼 자가 되어가는 사람들의 순서가 유의미하다. 가장 먼저 눈이 머는 사람은 우선 민족적 소수자인 소수 민족인이다. 그 다음은 도둑과 창녀이며, 그 다음으로 안과의사이다. 소수 민족인, 도둑, 창녀 모두 사회적인 타자들이다. 도둑과 창녀는 사회의 규범과 테두리에서 벗어난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물론 영화의 주제로 나타나는 사회적 규범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사회적 타자를 나타내기도 한다. 끝으로 안과의사의 시력 상실은 시력에 대해 규정하는 의학 권력자가 자신이 규정해왔던 타자로 스스로 진입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타자를 만들어내는 권력의 타자화의 허무함을 보여주는 상징이라 할 수 있겠다.     


정치적 우화와 상징성

 이 작품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인간의 본질적인 면들을 잘 보여주었다는 것들이다. 인간이 아주 나쁜 조건으로 처해졌을 때 얼마나 비겁하고, 악하게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는 것과 인간에게 질서와 문명이 사라졌을 때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워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는 식의 해석들이다. 더 나아가 눈이 안 보인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안 좋은 것인가를 잘 나타내준다는 등의 그런 식의 해석은 매우 일차원적이고 조악해보인다. 이 작품에서는 우화와 상징이 매우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다. 우화나 상징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억압되는 곳에서 우화나 상징으로 돌려 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눈이 멀어버린 현대인의 상태에 대해서 우화적으로 잘 묘사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그러한 정치적 측면이 상징적으로 들어있다는 것은 원 작가의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 좀 더 명시적으로 나타나있다.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는 눈먼 자들의 도시 이후의 상황을 그리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경험함으로써 정치적으로 각성하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주인공은 눈 먼 자들의 도시의 처참한 모습을 홀로 모두 보고 있다. 마치 이 세상의 처참한 현실을 홀로 깨달은 선각자와 같이. 진리를 먼저 깨달은 자가 인도해야한다는 당위는 영화에서 그 여자가 당연히 부여받은 리더의 지위만큼 명확하지 않다. 실제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이 눈 먼 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 사회적 영역으로 가면 눈 먼 자들이 치명적으로 증대된다. 아니 그들은 눈 먼 자가 아니라 눈이 가리워진 자들이다. 그들이 눈이 멀었기에 이 사회는 처참하다. 그리고 눈이 멀었기에 애써 그 처참한 모습을 보지 않을 뿐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보지는 못한다. 세계의 온갖 부당한 모습들, 억압받고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애써 보지 않으려 한다. 그저 그 처참한 세계에 점차 익숙해지려고 할 뿐이다.

 상대편 리더를 죽였을 때 군중들의 반응은 인상적이다. 리더를 죽인 자를 찾아서 넘기고 음식을 계속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마치 모세가 이집트인을 죽였을 때 군중들이 모세를 반대하는 모습과 유사하다. 군중들은 처참하게 억압받고 무기력해진 상태에서 자신들을 해방할 그 어떤 요소에도 처음에는 부정하고 반발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집단에 비해서 다수 집단이었던 그룹이 미처 대항하지 못한 설정은 매우 강한 메시지와 강력한 리얼리즘으로 다가왔다. 이는 극 중에서는 눈 먼 것으로 인한 공포가 그 원인인 것으로 설명하였고 이는 현실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무력해진 그들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하며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부정에 타협하고자 한다. 더러워지는 주변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부당항 폭력에 대해서도 무력해진 그들은 쉽게 포기하고 무릎 꿇는다. 실제로 그들이 그것을 해결할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무력감이 그들을 점점 비인간적인 세계를 받아들이고 수용하게 만들어간 것이다.     


환경주의적 해석

 환경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면이 보일만한 텍스트다. 도시가 가지고 있는 자급성의 결핍이 단연 돋보일 것이다. 도시는 몸뚱아리만 가지고 있지 입도 항문도 없는 곳이다. 몸뚱아리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고 나면, 아니 그 이전에 폐기물을 제대로 분출할 수 없어서 죽을 몸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가 보여주는 처참한 도시의 장면은 도시라는 곳이 가진 원천적인 부실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도덕적 해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도시 자체가 수많은 사람들이 집적되어 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물자의 공급과 폐기물의 처리를 방법적으로 처리하고 있을 뿐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있지 못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마치 자전거를 타고 가듯이 항상 불안정한 상태이다. 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무너져버리는 취약한 구조라는 것이다.     


 본 작품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눈이 멀었을 때라는 상상력에서 시작하여 인간 조직의 본질적인 측면을 다루어주고 있다. 인간이 함께 모여 살게 됨에 따라 나타나는 문명적 측면들과 도시 생활에서의 복잡성이 모두 시각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러한 시각의 상실은 사람들에게 그간의 모든 문명과 조직적 기초를 모두 상실하게 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측면을 나타내는 것이 이 작품의 모든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정치적 상황에 대한 우화와 상징으로 가득차 있다. 특히 현재와 같이 미디어가 사람들이 제대로 정치적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고, 정치적인 조작으로 사람들의 인식을 조정하는 모습이 강해지는 대한민국의 지금은 더욱 이 작품의 정치적 해석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 작품이 계속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이미 눈이 멀어져 있으며,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으려 한다는 이야기는 현재의 모순과 억압적 상황에 눈을 돌리고 외면하려는 현대인에게 큰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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