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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D 문화 브로셔 Mar 27. 2020

조커가 보여주는 위험한 철학자 니체

영화 조커 리뷰

니체가 위험한 철학자였듯이 이 영화는 위험한 영화다. 워낙 좋은 평도 많이 받았고,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영화라 많은 리뷰들이 나와있으나 이 영화의 제대로된 다른 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니체를 소환해와야 한다. 니체의 철학에서 불러올 부분은 바로 도덕의 계보에서 이야기하는 도덕의 전복이 중심이겠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그의 철학 전반에 흐르는 정신이 다양하게 호명되어야 한다.      


기존 도덕을 넘어서는 춤

이 영화에서 매우 인상적인 장면은 조커가 추는 춤일 것이다. 춤이 가지는 비언어적 상징성 때문에 이 영화의 예술적 수준이 많이 높아졌으리라 본다. 통상적으로는 조커의 춤을 그의 심리 상태를 보여주는 것으로만 해석하는데 니체에 있어서 춤은 단순한 심리적 표현이 아니다. 니체는 춤을 좋아했다. 니체에게는 춤이야말로 엄숙함과 기존의 선을 이겨내는 것이었다. 춤을 춘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긍정하고 그 삶을 가벼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춤은 기존의 엄숙함과 억누르는 도덕적 억압을 극복해내는 행동이기도 하다. 조커가 일반적인 도덕에서 보았을 때 악을 행한 이후에 추는 춤의 모습은 그렇게 기존의 도덕의 관념을 극복해나가는 모습이다. 그러한 춤은 이후에도 자기의 도덕을 세운 이후의 당당한 그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으로도 그려진다.      

웃음의 초월성

그러한 춤만큼이나 조커의 기존 도덕을 조소하고 그러한 도덕의 엄숙함을 비웃는 모습은 그의 웃음이다. 조커의 웃음은 억압에서 벗어난 자유함을 얻을 때 생기는 유쾌함이다. 그는 웃음으로 세상의 도덕적 기준을 넘어서며 비웃는다. 조커가 세상이 주는 부조리함을 느꼈을 때 그는 웃음으로 대응한다. 세상의 부조리함에 진지하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그저 웃음으로 대응하고 자신은 그로부터 독립하는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그의 웃음을 살펴볼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다른 이들의 코미디를 볼 때 웃는 포인트이다. 조커는 남들이 웃을 때 웃지 않고 사람들이 전혀 웃지 않을 때 웃는다. 웃는 포인트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조커는 세상이 정하고 있는 웃음의 기준에 대해 자신과는 맞지 않음을 느끼고 타자의 기준에 자신이 따르지 않겠다는 선포를 하게 된다. 웃긴 것과 웃기지 않는 것을 자신의 외부에서 정한다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옳고 그름 선함과 악함을 타자가 정하는 것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게 된다. 그가 머레이를 죽일 때를 보자. 머레이가 조커의 조크에 대해 부정하고 웃기지 않은 것으로 규정할 때 그는 머레이를 죽임으로 머레이가 정하고 있는 웃음의 기준에 대해 사망을 선포한 것이다. 세상이 규정하는 기준에 대해 부정함을 선포한 것이다.    

 

세상의 도덕을 단계적으로 넘어서기

조커가 죽이는 대상은 증권가 직원 세명, 엄마, 동료 직원, 머레이, 토마스 웨인으로 변해간다. 맨 처음 등장한 것은 조커가 광고판을 들고 일할 때 조커를 린치한 자들이다. 그들은 일반적인 도덕 기준에서 매우 나쁜 사람이지만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다. 첫 죽음인 증권가 직원은 일반적인 도덕적 평가에서도 나쁜 행동을 하는 자들이었다. 어느정도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죽음만큼은 아니지만 그런 처벌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에는 대부분 동의할만한 사람이다. 즉 그들은 완전한 악한 자들이다. 그 다음 단계인 엄마는 일반 도덕 기준에서는 죽여서는 안되는 사람이다. 그러나 엄마가 조커에게 준 고통과 거짓들을 보면 악하다고 할만한 사람이다. 처벌을 받아야할 악함이 있지만 처벌해서는 안되는 사람이 바로 영화에서의 엄마라는 존재다. 악하지만 처벌을 주기에는 어려운 사람의 단계이다. 세 번째는 동료 직원이다. 동료 직원 또한 고의로 총을 빌려주는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다. 하지만 조커에게 직접적인 악을 행한 것은 아니다. 악한 자이긴 하지만 완전히 악하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단계이다. 세 번째 머레이는 조커를 비웃었다는 비난을 받을만한 자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악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토마스 웨인은 세상적으로는 매우 선한 존재이다. 조커가 죽이는 사람들은 점점 더 선함에 가까워지고 있다. 기존의 악함을 처벌하는 단계에서 세상에서 선이라고 부르는 자들까지로 살인의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세상의 선악의 기준에서 악에 가까운 자들을 죽이지만 점점 세상의 선악의 기준에서 선에 가까운 사람을 죽인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선악의 기준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기존 도덕이 얼마나 진리로 말하기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기존 도덕이 개인의 의지를 억압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또한 그러한 도덕의 성 위에서 엄숙하게 자신을 지켜가며 위선을 보여주고 있는 자들을 격렬히 비난했다. 동료직원이 자신을 엿먹었을 때 조커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 조커는 그가 어머니를 추모하러 왔다는 위선을 드러냈을 때 진심으로 분노했다.  

   

인생은 비극이 아니라 코미디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폴론적인 것은 정돈되고 규정화된 선과 빛을 의미하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혼돈과 카오스 그리고 규정되고 분리되지 않은 열정적인 모습을 의미한다. 영화에서 토마스 웨인은 아폴론적인 것을 상징한다. 그는 이미 정해지고 규정되고 명료화되어 있는 코스모스의 세상을 대표한다. 이와 반대로 조커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상징한다. 혼돈된 카오스의 세계에서 불타오르는 변화와 열정을 나타내고 있다. 조커가 등장하면서 도시는 마치 디오니소스의 축제 때와 같은 광란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한 광란도 또한 인생의 한 모습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 자체가 그리스 비극처럼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조화롭게 접합되었다면 이 영화에서의 코미디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니체가 비극의 탄생을 썼다면 이 영화는 코미디의 탄생을 썼다. 사실 비극은 그냥 슬픈 극이 아니다. 그것은 영웅으로 태어났으나 고난을 겪고 그것을 이겨내는 일종의 고정된 장르극이다. 니체는 비극이야말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잘 어우러진 예술이라고 평했다. 조커는 비극을 넘어서 코미디 또한 그렇다라고 말하는듯하다. 전형적인 코미디는 정리되고 한 가지 방향으로 쏠려있는 아폴론적인 것이다. 조커의 코미디란 그렇게 정형화된 웃음과 즐거움만의 코미디가 아니다. 조커의 코미디는 무조건 웃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비극적인 슬픔을 내재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밝고 가벼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명료하게 보이는 아폴론적인 웃음 속에 디오니소스적인 명료하지 않지만 영혼을 흔드는 슬픔을 담아내었던 것이다. 이는 반대로 슬픔과 고통의 현실을 긍정하면서도 그것을 밝음과 가벼움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니체의 모습과도 일치한다. 니체는 가벼움과 흥겨움을 지향했다. 그런 점에서 조커 영화는 현실의 비극적인 상황들에서도 웃음과 가벼움이라는 코미디를 통해 혼재적으로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적절한 곳에 망치를 휘두르기

니체를 흔히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부른다. 그만큼 기존 철학의 형이상학적 보편성을 부수었고, 누구나 의심하지 않았던 도덕의 원칙들을 부정했다. 이 영화는 그만큼이나 강렬하다. 기존 도덕적 기준을 깡그리 부수어버린다. 미국 사회에서 이 영화에 대해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하다. 니체는 기존의 도덕 규범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도덕적 원칙을 세우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이던가. 니체 철학의 의미를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해버리면 극단적인 행동마저 가능해진다. 보편적인 기준이 없이 모두가 자유롭게 자기 마음대로 도덕 기준을 세우고 행동한다면 사회가 얼마나 혼란스러울 것인가. 그러한 니체 철학이 가지는 위험성을 영화는 화면을 통해 리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히틀러가 자신의 행위를 니체 철학으로 합리화하려 했었던 역사적 기억도 되씹어보게 된다. 철학은 상식을 넘어서기에 창의적인 것들을 만드는 기반도 되지만 또한 그러기에 몰상식의 모습으로도 갈 수 있다. 문제는 단편적으로 자신에게 맛있는 부분만 떼어내서 먹고는 그 철학을 이해했다 착각하는 것이다. 니체의 망치는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위한 것이었다. 새로운 창조가 가려진채 파괴만을 보여주는 것은 진정한 니체의 반영이 아니다.     

영화 조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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