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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혜숙 May 13. 2024

목욕탕


일요일, 엄마는 수건을 돌돌 말고 때수건과 샴푸 린스, 비누를 넣은 핑크 목욕 바구니를 왼손에 들었다. 오른 손으로 머리가 뽀글한 여섯 살 꼬맹이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일요일 미사처럼 목욕탕에 목욕재계를 하러 간다. 엄마와 나들이를 가는 것처럼 마음이 들떴지만, 나는 미사의 설교가 싫듯 때밀이가 싫었다. 엄마는 내 몸을 도마 위에 고깃덩어리처럼, 때수건으로 거칠게 문지르고 비누 칠을 박력 있게 했다. 


그래도 탕에서 몸을 불리며 하는 구경이 재밌다. 나체의 여자들이 각기 자기 나름대로 자기 몸의 때를 밀었다. 미끌미끌한 목욕탕 바닥, 벽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물방울, 창에는 거꾸로 된 빨간 금자가 보였다. 천장에서는 석류 동굴에서처럼 큰 물방울들이 가끔씩 뚝뚝 떨어졌다. 거울에 하얗게 김이 어릴 때마다 한 바가지를 끼얹는 아주머니. 누군가의 등에서 물줄기를 타고 씻겨 내려가는 검은 때, 그리고 세신사의 착-하고 작업 개시를 알리는 손뼉 치기, 그리고 소독향과 오묘하게 섞인 수증기가 목욕탕 냄새가 났다. 가끔씩, 물을 틀어 놓고 가는 손님을 단속하러 주인아주머니가 옷을 입고 나타났다. 밖의 찬 기운이 훈기를 싹 가르는 것처럼 우리 사이를 가로질렀다. 손님들은 짐짓, 주인이 지나가기까지 조용히 때를 밀거나, 수압을 조금 조율하는 척했다. 


탕에서 지나가는 할머니들의 늘어진 젖을 구경하고, 내 엄마 같은 젊은 엄마들의 탱탱한 젖을 보았다. 축 처진 엉덩이, 넓고 둥근 엉덩이, 떡 벌어진 어깨와 그 아래로 쭉 이어진 굴곡 없는 상체, 쭉 뻗은 젊은 언니들의 희고 매끄러운 피부와 봉긋한 가슴들. 나는 몸 박물관에 관람 간 어린이였다. 


인중에서 땀이 나고, 뜨거운 물이 불쾌해질 시점에 딱 맞춰 엄마가 나를 부르는 일은 없었다. 어쩔 때는 너무 이르게, 어쩔 때는 좀 더 늦게. 너무 일찍 부른 날은 내 등에서 때수건이 살 위에서 버텼다. 너무 오랫동안 불린 날은, 줄줄 국수처럼 흘러내리는 때가 엄마를 기쁘게 하는 건지, 신명 나는 때 밀기 때문에 내 어깨가 발갛게 부어올랐고, 어떤 때는 옆구리가 쏠려서 아팠다. 


그날은 엄마의 마음이 바쁘고, 일도 많아서 자기 몸을 밀기에 힘이 부치고, 어쩌면 다른 생각이 많아서 나를 너무 일찍 탕에서 부른 날이기도 했을거다. 엄마는 내 등에 뜨뜻한 물 한 바가지를 끼얹고 등진 내 의자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몸에 착 달라붙어서 쭉 미끄러질 듯이 내리면서 때가 나와야 하는데, 때는커녕, 때수건이 밀리는지 멈췄다.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를 공격했다. 목덜미, 등과 옆구리. “아아, 아파.” “아니, 뭐가 아프다고 엄살이야.“ 

 

엄마는 나를 자기 쪽으로 돌 내 손목을 잡고 팔을 밀었다. 엄마의 늘어진 가슴과 배가 출렁거렸다. 가끔씩 물을 확 끼얹었다. 그 사이에 불었던 것인지 목욕탕의 훈훈함에 저절로 때 공장의 라인이 예열된 것인지 때가 잘 나오기 시작했다. 엄마는 전투적으로 변했다. 엄마는 내 어깨와 팔을 때수건으로 힘껏 밀었다. “엄마 너무 아파. 그만해.” 나는 칭얼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엄마를 팔꿈치로 밀쳤다. 엄마가 내 등짝을 후려쳤다. “계집애야, 가만 좀 있어봐.” 


‘엄마는 엄마 팔 힘이 얼마나 센지 모르지?’ 엄마는 모를 거다. 내가 엄마에 비해서 얼마나 여리고 부드러운지를. 그런 엄마의 손바닥 자국이 내 등에 빨갛게 남았겠지. 한바탕 소동을 치르고 나면, 엄마는 아쉬운 대로 어린 내 손에 기대어 등을 좀 밀어야 했다. 


엄마는 큰 손때 수건을 내 손에서 척 얹었다. 나는 젖은 때 수건을 손에 억지로 끼고 세신사처럼 찰싹 박수를 쳤다. 엄마의 등 뒤 앉은뱅이 의자에 앉았다. 내 엄마의 닭살 같은 등, 그리고 튀어나온 옆구리 살. 목덜미로 삐져나온 고슬고슬하고 까만 파마머리. 엄마가 끼얹힌 물이 쭈르륵 엄마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엄마가 내게 했던 대로 목덜미, 어깨, 그리고 등을 따라 열심히 밀었다. 


“야는, 힘 좀 있게 밀어봐.” 나는 벌떡 의자에서 일어나서 왼손을 오른쪽 때 수건에 포개서 온몸을 앞뒤로 움직이면서 밀었다. 엄마의 등이 불긋해졌다. 얇은 막 같은 때가 나오기 시작했다. 때수건 아래 뭉치는 때들, 그 아래로 미끈해지는 엄마의 등, 그리고 울퉁불퉁한 옆구리를 지나 엉덩이까지 내려가니 나는 온몸에 진이 빠졌다. “엄마, 다했어.” 엄마는 엄마의 성질대로 얼른 몸에 비누 칠을 하고 헹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흐물해진 비누를 쭈글쭈글 따뜻한 내 두 손 안에서 뱅글뱅글 돌렸다. 엄지와 검지를 맞대 동그라미를 만들고 그 안으로 후, 불면 비눗방울이 나왔다. 여기저기 터지는 걸 구경하는 사이에 엄마가 돌아왔다. 두 손에는 요구르트가 쥐어 있었다. 냉장고에서 갓 나온 시원한 요구르트. 시큼하고 달달한 그 살구색 요구르트를 한 입 쭉 빨았다. 입과 천장, 식도, 위를 타고 내려가는 시원한 폭포수, 내 관자놀이는 감미로 젖었다. 뽀송한 수건이 축축해지도록 몸을 닦고, 선풍기 앞에서 머리를 말렸다. 금천 목욕탕 문을 나오며 내 귓가에 스치는 찬바람. 그날은 내가 잊고 있었던 엄마와 함께 한 많은 날 중의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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