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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영 Aug 07. 2023

가족이란 뭘까

일요일이던 어제, 휴가라고 우리 집에 방문한 엄마는 캐리어에 뭘 또 잔뜩 담아 왔다.


인견이라 시원한 호피 무늬 속옷(그런 무늬 안 입어 엄마 입어), 반짝이는 뜨개 수세미들(미세 플라스틱 나와 엄마도 그런 거 쓰지 마), 우리 집에 없어 보여서 가져왔다는 한 무더기의 행주(전에 준 거 아직 많아 도로 가져가), 동생 붓기 빼라고 만들어 온 호박 식초(는 안 먹을 거면 버리라고 해서 결국 내가 먹기로 했다), 오는 길에 맛있어 보여서 샀다는 지하철 빵들(도 내가 먹기로 했다..), 남원에서부터 가져온 참기름(그래요...), 어디 좋은 데서 구했다는 들깨 한 봉지(잘 먹을게....), 내가 참여했으니 자랑하겠다며 가져갔던 비혼 잡지들까지 고이 챙겨온 거였다.


함께 점심을 먹고 혼자 도서관에 갔다가 늦게 돌아왔다. 엄마가 아직 가지 않아서 반가웠는데, 그 밤에 우리 집에서 야채를 볶고 있었다. 아까 점심 때 내가 먹고 싶다고 했던 고구마 순, 미역줄기, 깻잎, 옥수수, 심지어 김치까지 땡볕에 집 근처 슈퍼에서 사와서는, 미역줄기를 삶고 당면을 식히며 다른 프라이팬에 잡채용 야채를 볶는 중이었다. 괜히 좁은 거실이 매캐해서 눈물이 났다. 사람이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맨날 닦달했으면서 웬일로 '너는 고기 빼줘야 하지?' 하면서 동생용 잡채에는 고기를 섞고, 내 잡채에는 버섯을 섞어서 볶아 주었다. 날이 이렇게 더운데 내가 내일 할 테니까 그만하자고 하니 잡채를 끝으로 같이 까무룩 잠들었다.


일어난 아침에는 정신없이 출근을 하고 퇴근 후 집에 와보니 어제 없던 들깨 고구마 순 볶음, 미역줄기 볶음, 깻잎장아찌에 된장국까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가 다녀간 부엌은 반짝반짝, 현관은 가지런해서 그런 집에서 혼자 엄마를 떠올리고 있자니 오랜만에 '가족'을 생각하게 됐다. 지난 5월 호 잡지 주제는 가족의 달을 맞아 '가족'이었고 기존 가족의 개념을 타파하자는 글이 전부였다. 나도 페미니즘을 접한 뒤 늘 그렇게 생각했으니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정작 잡지가 발간된 직후에 나는 인생에서 거의 처음으로 엄마에게 가족으로서 위로를 받고 도무지 알 수가 없어졌다.


1차 시험을 일주일 정도 남겨둔 때에 동네 도서관이 휴관이어서 마음이 조급했던 나는 김밥을 포장해 옆 동네 도서관에 갔었다. 김밥 집 아주머니는 야채만 넣어달라는 주문을 잘못 알아들어 달걀을 빼지 않으셨고, 나는 그날따라 배가 불러 김밥을 조금 남겼고, 오후쯤 남은 김밥을 먹는데 쉰내가 나는 것 같았다. 먹는 데엔 면역력이 강한 편이라 생각 없이 남은 김밥을 씹다가 시험이 일주일 후라는 게 생각나서 그제야 씹던 김밥을 뱉고 나머지도 버리기로 했다. 그러고 열람실 자리에 앉았는데 그때부터 불안함에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김밥 식중독'같은 단어를 찾아보니 여름 김밥 식중독의 주된 원인이 달걀이라고 했다. 그리고 식중독의 잠복기는 일주일 정도라고 했다. 왜 하필 시험이 일주일 남은 오늘 달걀을 안 뺀 쉰 김밥을 먹었나.


스트레스가 치솟고 스스로가 원망스럽고 감정 조절이 어려웠다. 한 시간을 넘게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오랜만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에게 내 불안을 구구절절 말하고 합리화하고 억지로 긍정적이려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엄마가 날 정말로 잘 안심시켜줘서 놀랐다. 엄마가 이렇게 현명하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나? 처음 생각해 봤을 정도로. 내가 아는 목소리, 내가 아는 엄마, 그 엄마가 날 잘 안심시켜줘서 나는 엄마의 조언대로 '그렇게 불안하면 유자차나 쌍화차로 면역력을 높여보자!'라는 마음으로 뜨거운 것들을 잔뜩 먹고 폐관 시간까지 다시 공부하다 집에 왔다. 식중독 같은 건 시험날까지도, 그 이후로도 없었다.


그 일 이후로 인정해야 했던 사실은 내가 엄마를 내내 무시해왔다는 거였다. 엄마의 직업이 번듯하지 않아서, 대학을 나오지 않아서, 성격이 어수룩해서, 그리고 그런 엄마를 무시하는 아빠를 보면서 자란 탓도 컸을 거다. 성인이 되고서나 페미니즘을 알고 나서는 이제 엄마를 이해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면서 그럼에도 기성세대의 문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엄마를 한심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정말 힘들고 불안했을 때 엄마가 떠오른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우리 집은 단란한 가정이 아니었고 엄마는 내게 한 번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독립적인 성격이었던 건 그래서였다. 그런데 서른이 넘어서야 엄마가 의지가 됐다. 이제는 내가 많이 자라서 엄마에게 오롯이 의지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일까? 이제는 김밥 식중독 걱정을 의지하는 일 정도는 가능할 만큼 기대가 가벼워져서였을까.


오늘에야 어쩌면 엄마가 내게 말 그대로 '가족'이어서였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걸 인정하면 내가 앞으로 꾸리려는 가족은 언제까지나 '진짜 가족'이 되지 못할까 봐 줄곧 그 생각을 외면해왔다. 혈연으로 묶인 애증의, 한국 사회에서 너무나 보편적이어서 괴롭든 단란하든 지겹든 원망스럽든 공통으로 분류되는 '가족'. 엄마에게서 가족의 안도를 느낀 후에 나는 다시 이런 '가족'이라는 주류에 속하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내가 비혼 여성들과 꾸리려는 가족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고, 최근에는 가족이 될 수도 있을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멀어져도 봤으니까. 내가 꿈꾸는 가족이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 한편 의심의 싹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에야 인정하기로 했다. 언젠가 내게 나름의 사랑과 믿음으로 꾸린 각별한 가족이 생기더라도, 그와 별개로 엄마와 같은 가족을 갖는 건 영원히 불가능하겠다고. 불안했던 그날 내가 좋아하는 어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더라도 엄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마음 깊이 위로를 받지는 못했을 거라는 걸 안다.



어제 비혼 잡지를 돌려주는 엄마에게 진짜로 엄마도 읽은 게 맞는지 궁금해서 어땠냐고, 어떤 글이 제일 재밌었냐고, '가족'호를 읽고 뭔가 느낀 게 있을까 조금은 기대하면서 물어봤다.


"세상에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많더라. 바라보는 세상이 넓어졌어. 그 '가좍'이란 것도 재밌더라. 근데, 그래도 엄마는 네가 결혼은 했으면 좋겠다."


가족 호에서 내가 담당했고 재밌어했던 '가좍' 글을 재밌게 읽었다니 기쁨과 동시에 아직도 내 결혼에 희망을 품고 있다는 엄마의 말에 맥이 풀리기도 했다. 아직도 이럴 수가 있나. 언제쯤 포기하려나. 그런데 그런 생각도 했다. 고기도 먹어줘야지,라고 잔소리하면서 동생의 고기 든 잡채와 내 잡채를 따로 볶아주는 엄마를 봐서. 그래서 나도 희망을 가져보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꾸리고 싶은 가족도 가족이지만, 내가 가진 가족도 그대로 가족이구나,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실 지난 '가족'호에 엄마에 대해 쓰고 싶었다. 지나고서야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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