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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린 Aug 25. 2020

1. 깻잎을 부탁해

커버 이미지 Photo by Tirza van Dijk on Unsplash


“태권!” 기합을 마지막으로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BTS 팬이라는 독일 꼬마아이에게 빌린 머리끈을 돌려주고, 간이 탈의공간으로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코로나 때문에 샤워실이고, 탈의실이고 모두 닫아야 하는 탓에 도장 측에서 마련한 공간이었다. 한 바가지 땀을 흘린 탓에 어정쩡하게 걸쳐진 치마를 어쩌지 못하고 허겁지겁 도장을 빠져나왔다. 


선생님 요하네스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급하게 자전거에 오른 이유는 박언니, 신언니와의 약속에 ‘더’ 늦지 않기 위해서였다. 꼭 약속 시간에 늦을 때 얄밉게도 신호등은 내 편이 아니다. ‘아, 또 늦었네.’ 생각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오늘 배운 돌려차기 동작을 되새기는데 여념이 없다. 


나는 구글맵이 최종목적지가 곧 내 왼편에 나타날 것이라는 안내를 하기도 전에 이미 도착 사실을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타파스바가 시야에 들어오기도 전에 귓가에 들려온 언니들 특유의 하이톤 웃음소리였다. 깔깔대는 소리가 들리자 살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자전거를 주차하고 언니들이 앉은 야외 테이블에 달려가니 양쪽에서 벌써 한 마디씩 훅이 들어온다. 


“또 뭐 하다가 늦었어. 얼른 앉아, 이 와인 마셔 봐.” 


“오, 가방 뭐야, 샀어? 너 점점 베를린 힙스터 되어 가는데?”


따로 둘이 만나거나 다른 친구들을 왕창 껴서 만난 적은 종종 있었지만, 베를린 반상회의 주요 멤버인 우리 셋이 두 달만에 만난 데에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깻잎.


박언니는 9월에 친구 결혼식을 비롯해 프랑스에 두 번 정도 갈 일이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중간에 낀 비행기와 기차가 자꾸 취소되는 탓에 그냥 중간에 베를린에 왔다 갔다 하는 일정을 아예 없애버렸단다. 아예 한 달을 통째로 프랑스에서 있기로 한 것이다. 역시나 화끈한 박언니다운 결정이었다. 그런 쿨한 박언니에게도 걱정되는 것이 있었으니, 한 두 달 전부터 어딘가에서 씨앗을 받아와 애지중지 키우던 중인 깻잎이었다. 


한국에서는 집 앞 동네마트만 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깻잎이지만, 이곳에서는 감히 '금'잎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귀하다. 어느 누군가가 깻잎 씨앗을 성공적으로 밀수(?)해 오게 되면 그 씨앗을, 또는 그것을 키운 모종을 알음알음 나누는 것 이외에는 깻잎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옛날 우리네 품앗이 마냥, 그렇게 어렵사리 받아온 (박언니의 말에 따르면) ‘내 새끼’같은 깻잎을 우리에게 맡긴다는 말에서 괜히 몽글몽글한 감정을 느낀 것은 어느새 슬며시 찾아온 가을 냄새 때문였을까. 


우리는 깻잎 아니었으면 우리 얼굴은 보지도 않고 프랑스로 떠났을 것이라는 등의 농담을 주고 받으며 와인 병을 비워갔다. 박언니는 프랑스 남자친구와의 다툼에 대해 열을 올리며 얘기하다가도 곧 다가올 그의 생일 선물을 걱정하며 내 바이커 가방 브랜드명을 물어보았고, 신언니는 이번에 정말 좋은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본인은 과일 서리하러 출근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도 옆에서 열심히 또르띠야를 입으로 직행시키며 중간 중간 그리스 휴가 계획 등에 대해 털어놓았다. 


Photo by Maddi Bazzocco on Unsplash


와인 병이 반쯤 비워 졌을 때 쯤 일기예보대로 천둥 번개가 치기 시작하더니, 와인을 끝내고 추가로 시킨 갈리시아 맥주병을 털어낼 때쯤 비는 멈췄다. 화요일이기도 하고 다음 날 출국하는 박언니의 일정을 위해 평소보다 일찍 마무리를 해야했다. 타파스바를 나서서 그 길 코너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깻잎은 걱정하지 말라며, 한달 후 셋의 만남을 약속했다. 


박언니가 파리에 있는 동안 나는 신언니네 집으로 가서 깻잎을 수확하고 가져가기로 했다. 박언니가 깻잎 향이 너무 강해 잘 먹지도 않는다는 신언니에게 깻잎을 맡긴 것은 식물박사인 신언니에 대한 신뢰일 것이다. 또한 온갖 식물이란 식물은 시듦의 길로 누구보다 재빨리 안내하는 나에 대해서도 잘 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책임은 신언니가 지고 콩고물은 내게 떨어지다니, 이래도 되는 건가 싶으면서도 다음주에는 삼겹살을 오랜만에 깻잎에 싸먹을 생각을 하니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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