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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김치를 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친구가 보내 준 레시피를 찾으려 왓츠앱을 켜 kimchi로 검색했다. 수많은 메시지가 떴다. 무슨 kimchi에 대한 이야기를 이리 많이 했을까 생각하며 한참을 스크롤하니 Ingredients 1 cabbage로 시작하는 레시피를 발견했다. 대충 훑어보니 웬만한 재료는 집에 있는 듯했다. 두 가지 항목을 제외하고. 배추와 고춧가루.
배추랑 고춧가루가 없는데 김치를 담글 웬만한 재료를 갖추었다고 생각한 대담한 나는 먼저 배추를 사러 길을 나섰다. 베를린에서는 배추도 아무 마트에나 있는 게 아니라서 가까운 Penny 대신 한 블록 더 멀리 위치한 Lidl로 향했다. 채소 코너를 이리저리 둘러보다 덩그러니 놓여있는 배추 세 통을 발견했다. Chinakohl €1.99/1kg. 제일 튼실해 보이는 걸로 하나 집었다.
이제 남은 건 고춧가룬데 아무래도 이 동네에서 한국 고춧가루는 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우리 동네'라는 말이 아직 낯설 정도로 이사 온 지 두 달 밖에 안된 이 동네 Fridrichshain은 아시아 식당은 발에 치일 정도로 넘쳐나도 아시아 마트 황무지다. 이웃 동네 아시아 마트라도 다녀와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귀찮음에 굴복하고 과감히 고춧가루는 포기하기로 했다. 백김치를 담그면 되니까. 이러면 김치 꽤나 담가본 사람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사실 내 인생 통틀어 김치를 담가본 적은 단 한 번이다. 그것도 평소에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친구 두 명 사이에 껴서 '깍두기'처럼 주방 보조 역할 정도를 했을 뿐이다. 다시 생각해도 대담한 결정이었는데 원래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지 않았나.
배추를 깨끗하게 씻고 배추 밑동 부분에 칼로 열십자 모양을 냈다. 생각보다 배추가 커서 손에 힘을 주어 배추를 쪼갰다. 배추가 쪼개지는 소리는 왠지 만족스러웠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배추를 절여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시간도 열정도 부족한 나는 친구의 약식 레시피대로 서걱서걱 배추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었다. 굵은소금을 노랗고 뽀얀 배추 위로 골고루 뿌려주며 '얼른 숨이 죽기를' 하고 되뇌었다. 배추가 절여지는 동안 마늘 양파 등을 다듬어 양념을 준비했는데 믹서기에 넣어 갈아지는 재료들을 바라보는 것은 배추가 쪼개지는 소리보다도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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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절여진 배추와 골고루 잘 갈린 양념을 버무리니 그럴싸한 백김치 모습이 되었다. 한 점 집어 먹어보니 맛 또한 백김치 맛이었다. 속으로 셀프 칭찬을 한 번 하고서는 남에게도 칭찬을 받고자 주방으로 남자 친구를 불렀다. 내가 무엇을 요리하든 항상 감탄해주는 그는 이번에도 역시 양 엄지를 치켜세웠다. 비어 있는 유리병 두 개에 김치를 담고 트로피 마냥 테이블 한가운데에 올려 두었다. 평소에 커피콩이나 쿠키를 담아놓는 유리병인데 백김치가 담겨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잠시 투명한 병 안으로 보이는 백김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왜 갑자기 김치를 담그고 싶어 졌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누가 '명상을 하느냐'라고 물어보면 '마늘 까는 것이 나만의 명상'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아예 깐 마늘을 팔 정도로 남들은 귀찮아하는 일인데 내게는 이만한 명상이 없다. 아무 생각 없이 흙 묻은 통마늘을 반으로 가르고 우리 집에서 가장 무겁고 퉁퉁한 칼을 꺼내 한 알 한 알 꾹꾹 눌러준 후 노란 속이 드러나도록 껍질을 벗기는 동안 온갖 잡생각에서 멀어진다.
요즘 한참 회사 일로 고민이 한참 많다. 일에 흥미를 잃은 지는 이미 오래, 이 때문에 일을 더 이상 열심히 안 하게 되니 티가 나기 시작했다. 예전만큼 성적을 내지 못하는 내 모습이 보기 싫어졌고 나는 더 의욕을 상실했다.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되자 매일 속이 타 잠을 편히 못 잔 지도 꽤 됐다. 자꾸만 악몽을 꾸는데 대게는 '내일이 수능날인데 아직 공부를 끝내지 못한' 꿈 또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어 달아나야 하는데 신발끈이 자꾸 풀리거나 바닥이 미끄러워 힘차게 달리지 못하는' 꿈 등이다. 어쩌면 이런 근심 때문에 나는 세 시간이 넘는 긴 명상의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김치라도 잘 담가서 직장에서 못 느끼는 보람찬 마음을 오랜만에 느껴보고 싶었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김치나 먹고 정신 차리고 싶었던 걸지도.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갑자기 양손이 살짝 아리기 시작하더니 손가락 부분이 타오를 듯이 아파왔다. 홍고추였다. 백김치에는 홍고추가 들어간다길래 위생장갑도 없이 홍고추의 씨를 빼고 채 썰은 탓이었다. 얼음물에 손을 담그고 있는 와중에도 자꾸만 백김치가 담긴 유리병에 눈길이 갔다. 거기에 무언가 답이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