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탄생 365일 차에 적는 지난 1년에 대한 이야기
작년 오늘, 호기롭게 배꼽보다 한참 아래 그 어느 지점을 가로로 15cm 정도 가르고 아기를 탄생시켰다. 수술 경과는 매우 좋았고 임신기간 동안 20kg 넘게 불어난 살과 폐부종 후유증의 흔적은 출산 1달이 채 되지 않아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에게는 오로지 3.64kg의 작은 사람 하나만이 남았다. 아기를 출산하고 이유 모를 항문질환을 겪어 하반신 마취를 한 번 더 했다는 것이 가장 기억에 남을 정도로 감사하게도 매우 안온했던 출산 이후의 날들이었다. 처음은 그랬다.
나의 아기는 병원 신생아실에서도, 조리원 신생아실에서도 늘 머리가 제일로 새카맸다. 아주 멀리서도 보일 정도였다. 그 덕에 안겨서 자는지 누워서 자는지 시시각각 확인할 수 있었는데 병원에서도 조리원에서도 늘 그녀는 안겨 있었다. 일명 ‘손을 탄 아기’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지독한 배앓이를 겪었던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였고, 수유 직후 식도 아래로 내려가지 못한 분유 소리가 꼴깍꼴깍 들리는 속역류도 꽤 오래 겪었기 때문이었다.
아기는 50일이 다 되도록 24시간 중 20시간을 안겨 지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세상에 채 적응하기도 전에 뱃속에서 난 크고 작은 전쟁들 때문에 도저히 편히 누울 수 없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 시절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탓할 곳 없는 무력감이 몰려왔다. 야속하게도 시간이 지나니 그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호전됐다. 시간이 정말 약이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아기 곁을 지키며 재우고 달래는 내 모습이 안쓰럽다 못해 모두 없던 일로 여기고 싶은 날들도 많았다. 그렇게 꽤 오래 지독한 산후우울증을 겪었다.
아기를 바라보면 어떤 생각이 드냐 묻는 상담사 선생님께 나는 “아기가 울면 우는구나, 울지 않으면 곧 울겠구나. “라고 대답했고, 앞으로 나아질 것 같냐고 묻는 정신과 의사 선생님께 “앞으로 나쁜 날들만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라고 답하며 엉엉 울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아기의 탓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임신기간 내내 내 몸과 마음을 돌보지 않고 오롯이 아기의 안녕만을 바라며 집착해 왔던 나의 불찰이었다.
어느 날 1분 1초가 두려움으로 다가오던 순간 아기 물건만 급하게 꾸려 친정으로 도망쳤다. 벚꽃이 갓 피어나던 때였다. 아기가 몸을 뒤집고 네발로 기고 엄마아빠라는 옹알이를 시작하던 때, 이제는 집으로 돌아와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아기와 나는 운명공동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동시에 아기와 나는 별개의 존재라는 것도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토록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도 한동안 신경안정제와 수면유도제를 먹어야 했다.
임신과 출산은 그런 것이었다.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은 그 날것의 모습은 모두 비슷했다. 조리원 각 방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먼저 엄마가 된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주책맞게 눈물을 훔치고 나서야 헤어질 수 있었다.
아기와의 시간이 6개월 정도 지나니 이제는 좀 수월한 부분이 생겼다. 아기의 눈에 내 모습이 정확하게 맺히기 시작한 때쯤이었던 것 같다. 아기는 내 목소리에 웃었고, 내 눈빛에 반응했다. 아기를 향해 등을 보이거나 말없이 자리를 뜨면 울었고, 안아주는 품에 포옥 머리를 기대기도 했다. 아기와 나 둘만의 시간에 둘만의 기억들이 차곡차곡 생기는 것 같았다.
서울로 돌아와 돌봄 선생님께 일주일에 세 번, 하루 3시간씩 아기를 맡겼다.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육아가 아닌 다른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말이 통하는 성인과 말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아주 큰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아기는 돌봄 선생님에게 적응하는 한 달 내내 매일 울고 자지러졌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아기를 돌봐주시고 보듬어주신 선생님 덕에 나의 삶은 많이 나아졌다. 아기와 나에게 큰 산이 되어주신 은인 같은 분.
아기의 돌을 기념해 가족들끼리 작은 식사자리를 마련했다. 아기에게 크고 풍성한 치마를 입히고 그 사이 많이 자라난 머리를 양쪽으로 묶어주었다. 하루 전날 부랴부랴 로켓배송으로 주문한 돌잡이 용품을 테이블에 펼쳐주었다. 아기는 예상대로 가장 눈에 띄는 축구공을 골랐고, 휴대폰으로 가족들끼리 단체사진 몇 장 찍으며 식사를 마무리했다. 나의 출산과 아기의 첫 생일을 기념하기에 딱 좋았다.
아기를 낳고 얼마 간 남편과 나의 삶은 송두리째 바뀐 것처럼 보였다. 여행은 물론이고 같이 산책이라도 나가려면 부모님의 도움이 필요했다. 둘 중 한 명이 아파도 교대로 아기를 돌보는 역할을 감당했을 뿐, 서로의 간병인이 되어줄 수 없었다. 아기가 아픈 날이면 같이 맘 졸이며 밤을 지새우고, 병원 예약이 오픈되자마자 1초 컷이네 10초 컷이네 함께 불평하며 성공을 기원하는 사이가 되었다.
출산 10개월 정도 되었을 때, 처음으로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나는 아기만 바라보고, 남편은 그런 나를 바라보는 그런 1년 아니 임신기간까지 2년, 아니 임신준비기간까지 거의 3년이 넘는 시간을 모두 보낸 후에야 드는 마음이었다.
남편에게 그동안 참 외롭고 힘들었겠노라고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모두 다 전하기도 전에 남편은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들어 좋다기보다 내가 그 마음을 갖게 될 만큼 건강해진 것 같아서 너무 다행이라고 말했다.
남편은 아빠로서 나는 엄마로서 절대적으로 뜻을 함께하는 부분이 생겼다. ‘서로가 없이는 절대 아기를 혼자 키울 수 없다.’는 것. 그러니 서로의 건강과 안녕을 매일같이 바라고 기원하게 되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을 우선하여 바라는 것은 아기의 건강과 안녕이고.
얼마 전부터 우리는 아기를 데리고 연인이던 시절부터 다니던 곳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커피숍부터 커다란 쇼핑몰까지. 우리 부부의 삶을 모두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우리 둘 뿐이던 팀에 거의 10년 만에 새로운 팀원을 영입하느라 잠시 멈추고 기초를 다시 다지는, 꼭 필요한 시간을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팀원을 마음 깊이 사랑하며 보살피다 보니 우리의 삶에 아주 약간씩을 매일 조금씩 업그레이드하고 있는 것이었다. 같은 듯 다른 모습으로, 익숙한 듯 낯선 방식으로.
아기의 첫 생일을 맞아 아끼는 편지지에 짧은 편지를 적었다. 조금은 부끄럽고 일부러 외면하고 싶었던 진심을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적었다. 사실은 지난 일 년이 나에게 가장 행복했던 날들이었다고,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와 주어 너무도 감사하고 고맙다고. 일 년 동안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너를 사랑해 왔다고 조금은 뻔하지만 당연한 고백들을 적어내려 갔다. 함께 오래오래 건강히 생일들을 맞이하고 또 즐거이 보내자는 말로 첫 편지를 마무리했다. 지난 일 년 동안 아기의 생일을 내 자기소개처럼 늘 곁들여 말하는 ‘00 맘’의 인생을 살았더니, 편지 말미에 ’ 23.2.10. 첫 생일에 엄마가‘라는 감동파괴 오탈자를 남기고 말았지만, 아기에게 또 한 장의 편지를 쓰게 될 내년 생일이 벌써부터 기대되기 시작했다.
나의 아기, 사랑하는 나의 딸 우주야. 엄마는 너를 아주 오래도록 기다렸고 너의 존재가 아주 작은 블랙홀만 한 아기집일 때부터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었어. 신생아 시절 목도 가누지 못하는 너에게 혹시나 속상한 눈빛과 마음을 전했다면 용서해 주렴. 엄마는 그때 조금 많이 아팠었거든. 지나고 나서 보니 너무 작은 너에게 너무 가혹한 마음을 가졌던 것 같아 아주 많이 미안해. 그럼에도 엄마를 보며 웃어주고, 언제고 엄마를 가장 먼저 찾아줘서 고마워. 언젠가 너의 삶에 엄마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더 우선되는 것들이 생기더라도 엄마의 인생에 가장 소중한 건 너일 거야!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우리에게 와 줘서 고마워.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