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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지킴이 Nov 10. 2017

나무가 되고 싶은 이유

제주 비자림 산책 중 문득 깨닫다

중학교 2학년 때던가.. <가을동화>라는 드라마가 한참 유행일 때가 있었다.

어린 은서(문근영역)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오빠.. 나는 다시 태어나면 나무가 되고 싶어. 한 곳에 뿌리 내리면 다른 사람과 헤어지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니까 우리 지금은 헤어지자"라는 비슷한 말을 남겼던 걸로 기억한다.

그 드라마가 나왔을 무렵, 많은 소녀들이 다시태어나면 나무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나도 그랬다.



그런데 얼마 전, 제주 여행에서 비자림을 산책하다 문득 내가 나무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건 <가을동화>의 여주인공처럼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만이 간직한 다른 이유가 있어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 동북쪽에 있는 비자림은 수 천, 수 만그루의 비자나무가 모여 있는 비자나무 숲이다. 햇빛이 쨍쨍할 때는 비자나무가 햇빛을 가려주고, 비가 올 때는 비자나무의 그득한 향이 곳곳으로 퍼지니, 머릿속을 맑게 하고 몸을 정화시키기에는 정말 최적의 장소다. 명상을 좋아하는 나의 인생 선배가 알려준 곳인데, 머리가 복잡할 때 이 곳을 걸으면 모든 고민이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제주도 여행을 오면 꼭 들리는 코스가 되었다.


다른 때 같으면 향 좋다~ 하면서 산책만 즐겼을텐데, 이번에는 향보다 나무들의 자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자림을 둘러보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비자림에 있는 대부분의 나무는 비자나무인데, 종류만 같을 뿐 생김새는 각각 다르다. 두 손으로 안을 수도 없을 만큼 커다란 나무가 있는 반면, 두 손으로 거뜬히 잡아낼 수 있는 얇은 나무들도 많이 있다. 


그 중 유독 내 눈을 사로잡은 나무는 바로 나무 기둥이 튼튼할 뿐 아니라 여러 갈래로 갈라진 나뭇가지들이 일반 나무보다도 굵은, 그런 나무였다.



어림잡아, 족히 수 백개의 나뭇가지가 달려 있는 이 나무는 튼튼한 기둥 덕분에,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한가지 방향이 아닌, 수 십 갈래로 뻗어 있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기둥에서 만나게 되는, 그런 나무.


그래, 내가 원하는 모습은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내면의 기둥이 튼튼해서, 나뭇가지가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가도 기준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어도 중심만은 꿋꿋하게 지켜낼 수 있는 그런 모습 말이다. 그리고 가끔 훌쩍 떠나고 싶으면 조용히 나뭇잎을 떨어트려, 세상 어디로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그런 나무 같은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이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냐고 물어 봤을 때 당당히 '다시 태어나고 싶지는 않고요, 그냥 이번 생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냐고 물으신다면 나무처럼 살아가고 싶어요. 한 곳에 진득이 뿌리 내려서 잘 흔들리지 않는 사람, 그러면서도 떠나고 싶을 때는 훌훌 떠나 버릴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거든요'라고 대답하련다. 


2017년 11월 7일, 비자림에서 내 나무를 만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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