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엘로이즈, 조너선, 하이스미스, 이셔우드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리플리 5부작 (2023 을유문화사 번역본)
<리플리의 게임> 위주.
* 위 작품의 내용 포함
도서관을 애용하던 십 대 시절에는 어른이 되면 셜록 홈즈 전집을 사는 것이 작은 꿈이었다. 이제 그건 굳이 갖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대신 톰 리플리 시리즈를 샀고, 필연적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톰 리플리
호들갑을 진작 떨었어야 했는데. 리플리 시리즈를 읽기 앞서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작품을 세 권 읽었다. <캐롤>, <아내를 죽였습니까>, <열차 안의 낯선 자들>. 캐롤을 제외한 범죄심리소설 둘은 물론 뛰어났으나 뭐랄까, 내 취향으로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헌데 톰 리플리는, 몇 장 읽자마자 푹 빠졌던 것이다. 리플리 시리즈는 참으로 유일하다. 그 디테일한 묘사에서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베를린 연작이 사심과 함께 겹치기도 했다. 리플리는 살인도 저지르는 범죄자인데, 전형적 악인-소위 싸이코패스 킬러는 아니고, 그렇다고 ‘불법적인 일에 휘말리는 평범한 사람’도 아니다. 책에서 읽은 표현처럼 ‘경계에 있다’. 톰의 욕망, 절망, 관심사, 흥분, 불안, 타인이나 예술 작품에 대한 견해 따위가 매혹적인 흐름으로 상세히 서술되고, 독자는 이에 동화되어 그의 관점으로 서사를 따라가게 된다. 관조하며 거리를 두고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아마도 재미가 덜하리라. 1권의 예를 들면: 디키를 해하는 톰을 응원할 순 없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그의 ‘불로소득 계획’이 순조롭게 성공하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이상한 기분이다.
톰과 엘로이즈
2권에 등장하는 톰의 와이프 엘로이즈도 잘 만든 캐릭터다. 전형적인 부르주아 물신주의자 미인으로 그려지는가 싶었는데,(굿바이 베를린의 샐리 볼즈도 아주 살짝 겹친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형이 아니었다. 그가 톰의 범죄를 대강 알아채게 된 직후 별로 두려워하거나 캐묻지 않고 지지해(범죄가 아니라 톰이라는 사람을) 줄 때, 얼마나 든든하던지. 그들의 동거에는 부부/연인보단 꼭 로맨틱한 의미는 아닌 파트너/동반자 바이브가 있다. 제 부모님에게 식사를 대접한 후 브로치가 달린 단정한 블라우스를 벗어던져 문 유리를 깰 뻔 하고 톰에게 샴페인을 가져오라고 소리치는 엘로이즈, 바로 급하게 지하실에 내려가 샴페인을 대령하는 톰, 이 커플 좀 최고다. 책에는 ‘톰이 남자와 살았더라면 더 많이 웃었을 것이다’라는 대목이 있으나, 이게 또 엘로이즈에 대한 애정을 축소하는 구절은 아니라는 거다.
베를린 연작과 리플리 시리즈
읽으면서 이셔우드의 베를린 연작이 떠올랐다고 앞에 적었는데, 어차피 사심으로 시작된 글이니 한번 나란히 둬 보겠다. 베를린 시리즈, 특히 굿바이 베를린의 화자는 작가의 분신인 ‘나’다. 리플리 시리즈는 전지적 시점이니 형식적으로 화자는 제3의 전지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주로 리플리다. 이셔우드가 그렇듯 하이스미스도 톰의 예민한 감각을 빌려 인물 사물 사건을 (톰의)주관적으로 생생하게 그린다. 그러나 이셔우드의 ‘나’는 <굿바이 베를린> 도입부에 대놓고 적혀 있듯 ‘카메라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가 자신의 생각과 기분을 말해주고 있음에도, 독자는 끝내 어떤 자인지 알기 힘들다는 느낌을 받는다. 반응하는 관찰자인 그가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은 주변 사람이고 세상이다. 반면 톰이 중심에 두는 것은 ‘나’다. 타인에 대한 생각도 그 자신에게 수렴하는 일이 잦다. 그게 어떻다고 평가하려거나 그가 나르시시스트라고 단정지으려는 게 아니다- 베를린 시리즈는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나 ‘윌리엄 브래드쇼’에 관한 이야기보단 베를린이라는 도시와 그 안의 커뮤니티, 거기 머물렀던 사람들의 이야기인 반면, 리플리 시리즈는 제목처럼 톰 리플리에 대한 이야기임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애초에 겹쳐 보지 말았어야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톰 리플리, 그리고 조너선 트레바니
독자는 톰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불안해하고 누구를 어떻게 평가하며 누구를 왜 좋아하는지 세세하게 알게 된다. 그의 심리를 이해하고 심지어는 약간 이입하게 될 수도 있다. 살인에 동의하지 않음과는 별개로 톰이 이미 처한 곤란한 상황에서 빠져나오기를, 의심받지 않기를, 그가 사랑하는 예술과 와이프와 아네트 여사와 ‘친구’들과 함께 잘 살아가길 바라게 되는 식이다. 톰의 마음을 투명하게 들을 수 있음에도 다음에 그가 무슨 행동을 할지 예측하기는 어려운데, (무의식과 자기부정도 한몫 하지만,) 3권에서 스스로 말하듯 ‘즉흥적으로 일하는 사람’이라서다. 본인도 어떻게 ‘일을 처리’할지 알 수 없으므로 독자도 알 수 없는 것이다.
3권에서 하이스미스는 주인공/화자를 둘로 갈라 톰 리플리와 조너선 트레바니의 입장을 번갈아 서술하며 변화를 시도한다. 처음에는 ‘조너선 트레바니’라는 풀네임이 등장하지 않았다가, 시점이 교차되며 이야기가 점차 퍼즐처럼 맞춰진다. 이런 식이다: 톰이 리브스에게 제안을 받고 ‘트레바니’를 염두에 둔다, (실질적 화자 스위치) ‘조너선’은 자신의 병에 관한 불쾌한 소문을 접하고 근원지를 찾는다, (실질적 화자 스위치) 그 소문을 낸 사람은 사실 톰이었고 조너선의 성은 트레바니였다. 조너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톰은 생경하다. 이제까지 작가가 톰을 톰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보도록 유도했는데, 갑자기 그를 저쪽으로 밀어놓고 상대방의 위치에서 보도록 만든 느낌이랄까(너무 좋다).
특히 조너선이 기차에서 마피아를 어찌 죽여야 할지 몰라 곤란해하고 있을 때, 난데없이 톰이 나타나 주도하는 씬은 굉장했다. 그들은 자경단 같은 것도 아니고, 조너선은 돈을 위해, 톰은 놀랍게도 조너선에게 책임을 느껴서(이게 톰을 미워할 수 없는 까닭 중 하나다. 그는 사람을 죽이지만 인간의 도리나 예의를 저버리지 않으려 애쓴다. 이 기이한…젠틀함, 모럴리티…라기보단 일종의 특수한 보더라인.) 살인에 동참하는 건데… 앞서 적었듯 그런 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들이 성공하고, 끝까지 무사하고,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좋겠다는. 조너선과 와이프 시몬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보다, 시작이 그리 좋지 않았던 조너선과 톰의 관계가 틀어지면 더 속상할 것 같다는- 죄책감 섞인 요상한 기분.
비슷한 소릴 계속 반복하고 있는데- 어떤 크리틱이 적은 대로 독자가 ‘공범’이 되는 거랄까. 마무리는 또 어떤가, 톰과 시몬의 불쾌한 조우다. 조너선이 살해당하고, 톰과 조너선의 행위를 끔찍해하던 시몬은 톰의 예상대로 돈을 지키고 경찰로부터 진실을 숨긴다. 톰은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침을 뱉는 시몬 또한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순수하고 우아한 가톨릭 신자가 타락한 ‘보통 사람들’의 세계로 들어서고 말았다는 것을. 톰은 조너선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며, 시몬을 비웃는 대신 씁쓸하게 응시한다.
(다음 글과 느슨하게 연결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