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스턴스>(2024)
<서브스턴스(The Substance)>(2024, 코랄리 파르자)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호러 이미지 묘사 포함
SNS가 메인 미디어로 자리 잡은 시대에 실물의 TV에서 방영하는 에어로빅 프로그램을 소재로 택한 것부터, <서브스턴스>는 대놓고 인위적이다. 단순화되고 과장된 인물과 배경, 자주 대칭적인 화면 구도는 극이 전하는 공포에 효과적으로 몰입하도록 길을 닦아놓는다. ‘서브스턴스’에 관해 관객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엘리자베스가 아는 바가 다인데, 그것으로 충분하다. 개연성이나 현실성을 따지는 행위는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원본’을 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더 젊고 더 나은 나”를 분열시켜 끄집어낸다는 설정과 함께, 작품은 성공적으로 바디호러 이미지를 구현한다. 손톱에서 척추까지, 피부에서 내장까지- 주어진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주인공의 신체 외에도 두렵거나 싫은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를 영리하게 포착한다. 화장실에서 통화하거나 레스토랑에서 새우를 먹는 하비의 탐욕스러운 입과 언제 씻었는지 모를 소스 범벅이 된 손을 영화는 때로 슬로모션마저 입혀 들이민다. 잦은 클로즈업은 깔끔한 편집을 만나 과하다는 감상을 피해간다.
엘리자베스 스파클은 스타다. 그의 이름은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금색 별로 박혀 있다. 달걀 노른자로 ‘서브스턴스’를 실험하는 모습을 간결하게 묘사하며 오프닝을 끊은 후, 영화가 가장 먼저 보여주는 것은 그 별이 새겨지고 잊히는 과정이다. 엘리자베스는 스타였,다. 그는 오랫동안 진행을 맡아 온 에어로빅 쇼에서 퇴출 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스튜디오 복도에는 그가 젊은 시절에 찍은 포스터가 걸려 있는데, 사실 타이트한 운동복을 입은 데미 무어의 팔다리는 여전히 매우 매끈하다.**(맨 하단 덧붙임 참고) 이름마저 하비인 프로듀서가 엘리자베스를 방송에서 내보내려는 까닭은 단순히 나이다. 엘리자베스가 진행하던 프로그램이 ‘특정한 몸이 아름답다’는 아이디어를 주입 받아온 여성들을 타겟으로 한다면, 수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엘리자베스의 이웃과 같이 댄서들을 성적 대상으로 관람하는 남성들을 타겟으로 짜였다. 카메라가 노골적으로 수의 신체 부위를 클로즈업하는 가운데 정작 안무는 구별하기도 힘든 쇼다. 할리우드의 공급과 수요를 통제해 온 이성애-남성 중심적 시선의 법칙에 따르면,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방송이 잘 팔리고, 나이 든 여성은 외모가 어떠하건 성적 대상일 수가 없다. 그럴듯한 재현에 힘쓰기보다는 픽션적 허용을 통해 곧장 본질substance로 돌진하는 <서브스턴스>는, 대놓고 ‘올드한’ 쇼의 ‘부활’을 그림으로써 할리우드의 낡은 미소지니가 아직도 건재함을 꼬집는 듯하다.
엘리자베스의 경우는 아마 그에게 USB를 건넨 남자의 경우와 다를 것이다. 그가 ‘서브스턴스’ 실험에 참여하는 동기는 젊음을 향한 동경 자체보다는, 계속해서 스타이고자(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에 가까워 보인다. 하비처럼 결정권을 쥔 남자들이 나이 든 여성을 ‘사랑받지 못한다’고 정의하기에 엘리자베스는 젊어져야만 한다. 엘리자베스가 ‘오로지 당신만 남아도 괜찮은가’라는 물음에 괴로워하며 찾은 것은 “넌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애girl야”라고 말한 프레드의 연락처다. 본래 건강검진 결과지 귀퉁이였으며 진흙탕에 푹 젖어 변색된 종잇조각을 엘리자베스는 고이 보관했다. 그는 이제껏 ‘나는 사랑 받을 가치가 있음’을 타인, 특히 남성으로부터 확인 받도록 학습해 왔다. (수가 처음으로 규칙을 어기는 순간이 한 남성과 원나잇을 하기 직전이었다는 점도 유사한 맥락에서 읽어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러므로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매력적임을 인정해 줄 남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거울을 들여다볼수록 엘리자베스는 점점 더 문 밖으로 나갈 용기를 잃는다.
수가 규칙을 어기며 엘리자베스는 급속도로 노화한다. 위협적으로 짜증을 내던 수의 원나잇 상대 앞에서 엘리자베스는 움츠러들었으나, 후엔 자신의 구부정한 실루엣과 쉰 음성을 이웃 남자를 쫓는 수단으로 쓰기도 한다. 그의 신체는 과장된 연출과 만나 싫은 것을 넘어 두려운 것으로 그려진다. 갈수록 불안정해지는 멘탈은 자기파괴적 행동 패턴으로 발현되고, 주방을 어지럽히는 공격적인 몸짓이나 부러 이를 악물고 긁으며 내는 목소리, 먹은 음식의 지저분한 잔해들도 ‘괴물스럽게’ 다가온다. 이는 “자기 관리”가 잘 된 수의 외면, 몸짓과 대조를 이루며, 익히 배운 대로 ‘괴물’과 ‘천사’를 구분하도록 관객을 현혹한다.
그러나 안타고니스트는 사실 수가 아닌가. 수는 엘리자베스가 내면화한 미소지니/메일게이즈의 의인화 혹은 판타지로 보이기도 한다. 영화의 첫 장인 “엘리자베스”는, 관객이 엘리자베스에게 이입하도록 디자인되었다. 두 번째 장 “수”의 화자는 엘리자베스와 수이고 관객 역시 양쪽 모두에게 이입할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낯설지 않은 분열이다. 이성애-남성 중심적 시선에 일상적으로 노출돼 있는 여성의 자아분열: ‘나만으로도 괜찮다’는 목소리와 ‘나는 내가 아니어야만 사랑 받을 수 있다’는 목소리는 충돌한다. 애초에 “하나”인 이들은 완전히 분리될 수 없고, 엘리자베스는 ‘실험을 끝내겠냐’는 물음에 매번 ‘안된다’는 답을 한다. ‘나’가 주인공인 이야기의 빌런을 ‘또다른 나’로 만듦으로서, 작품은 그 ‘또다른 나’가 탄생한 배경을 응시하려 한다.
수는 엘리자베스의 몸을 마치 자신이 아닌 듯 기피해 왔다. 엘리자베스가 실험을 중단하려다 말고 수를 살려 내면서, 두 자아는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수는 엘리자베스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상대의 머리를 붙잡고 거울을 마주보며 그대로 여러 차례 박아 맺힌 상을 깬다. 수는 현재 ‘나’의 외형에 만족할지도 모르지만, 그 특정한 여성성을 지니지 않은 상태의 ‘나’는 용납하지 못한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엘리자베스/수는 스스로를 (여성)혐오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파괴되고, 원본 없이는 환상도 존재할 수 없으므로 새해 전야 쇼를 앞둔 수의 신체 부위는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다. 치아가 빠져 입을 벌리지 못하는 수를 향해 하비는 “예쁜 여자는 웃어야지”라고 말하고, 수는 애써 입꼬리를 올린다. 이야말로 호러다.
패닉한 수는 집으로 달려가 ‘서브스턴스’를 재사용하며 최종 금기를 어긴다. 마지막 장 “몬스트로 엘리자수”, 자아들은 분열되지도 완전히 융합되지도 않은 채로 기이하게 공존한다. 수의 거죽을 열고 나온 존재는 떨어져 나간 신체 부위들을 재조립한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카메라는 이 몸을 전시하며 충실하게 호러적 연출을 하는 동시에, ‘그의 입장에서’ 움직인다. 스튜디오에 도착한 엘리자수는 사람들이 자신을 환영하고 찬사를 보내는 환상을 본다. 엘리자베스의 ‘동기’가 재확인되는 순간이다. 허나 ‘맞지 않는 드레스’를 입고 새해 전야 무대에 오른 엘리자수를 맞이하는 건 침묵. 여기서 주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건 무대와 관중석 사이를 흐르는 긴장과 위화감이다. 웃는 낯으로 굳어 눈알만 굴리는 “예쁜 여자” 백댄서들이 이 광경의 기괴함을 극대화한다. 오려 붙인 엘리자베스의 사진이 떨어지고 얼굴이 대중에게 드러나자 오히려 엷은 해방감이 끼어든다. 이즈음 영화는 엘리자베스/수가 들어 온 말들을 보이스오버로 삽입한다. 꼭 그 평가들을 한계까지 흡수한 몸의 거부반응이 모여 ‘엘리자수’로 실체화한 것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모든 게 제자리에 있군”, “저 코 대신 유방이 달려 있는 게 낫겠어” 오디션 시퀀스에서 캐스팅 디렉터가 뱉은 대사가 화면에 겹치는 가운데, 엘리자수는 유방을 낳는다. 결국 그는 '영웅적으로' 나선 한 남성에 의해 살해당한다.
작품 초반- 낡아 갈라지기 시작한 엘리자베스의 금색 별에 행인이 샌드위치를 떨어뜨려 시뻘건 소스의 흔적이 남는 컷은, 엔딩- 엘리자수의 ‘얼굴 부분’이 터져 별이 피범벅이 되는 컷과 일종의 불쾌하고 슬픈 수미상관을 이룬다. 엘리자베스/수의 ‘교환’ 도중 그들은 수의 내장이 밖으로 흘러나오거나 수의 안에서 닭뼈가 튀어나오는 등의 악몽을 꾸었고, 스튜디오가 은퇴 선물로 엘리자베스에게 건넨 요리책엔 내장을 주재료로 하는 레시피가 가득했다. 이와 같이 인간(주로 엘리자베스)의 신체 이미지는 자주 ‘먹을 것’으로 취급되는 몸들과 연결되었다. 그런가 하면 수의 남자친구와 엘리자베스가 화장실 문을 사이에 두고 실랑이하는 장면에서는 그들의 벗은 둔부가 각각 스크린 중앙에 놓이기도 했는데, 어디에 무엇이 달렸건 주름이 얼마나 있건, 무방비한 인간의 몸은 하비의 손이 흔들던 새우의 몸처럼 초라했다. 댄스 쇼의 카메라가 수의 신체를 의도적으로 확대하듯 영화의 카메라는 그런 것들을 확대한다. 몸 없이는 영혼도 없을 테지만, 영혼 있는 몸은 끊임없이 변하게 마련이다. 고정된 상을 띤 채 하나의 물건이 된,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된’ 몸은 대체 무엇인가. 몸을 가르고 비틀고 조립하고 다시 해체하며, <서브스턴스>는 ‘어떠한 몸’에 대한 계획된 물신에 질문을 던진다.
** 기존 글에 설명이 부족해 덧붙임 (2024.12.15)
젊은 자신을 기준으로 엘리자베스-와 데미 무어-가 꾸준히 관리했기에 그와 같은 신체가 가능했을 것이다. ‘기준의 몸’은 “25세”의 것이므로 애초에 다다르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할리우드만이 아니라 전 세계 ‘뷰티 시장’에서는 ‘불가능한 것에 다다르라’고 ‘안티 에이징’을 부추긴다. 그러나, ‘이상적인/미디어 표준의 몸’은 단지 젊은 것 뿐 아니라 촘촘한 규격을 충족시키는 몸이다. 대부분의 이십대 여성의 신체는 수의 것과는 거리가 멀고, 수의 “완벽함”은 깨지기 쉽다. 이 환상이 옥죄는 것은 ‘나이 든’ 여성만이 아니라 모든 여성, 그리고 ‘생물학적 여성’으로 인식되지만 여성이 아닌 이들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