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윁 레그의 리퀴드 러브

Wet Leg, <moisturizer>(2025)

by 않인



리안 티즈데일은 기괴한 자세로 쭈그려 앉아 이쪽을 노려보며 입꼬리를 씩 올리고 있다. 헤스터 체임버스는 팔로 자신을 감싼 채 등을 보이며 구석에 웅크려 있다. Wet Leg의 소포모어 <moisturizer>의 커버 아트는 두 사람이 오디오, 비디오, 퍼포먼스에서 고수해온 캐릭터의 한 버전을 구현한다. 티즈데일은 원하는 형태로 자신을 전시하고, 체임버스는 선을 긋고 감춘다. (커다란 모자를 눌러쓰고 들판을 배회하거나 뒤돌아 공연하는 체임버스를 보며 긍정적인 의미로 돌아버린 팬은 나뿐이 아니었으리라.) 다만 페스티벌에서 기타를 내려놓고 무대를 활보하는 티즈데일, 이건 좀 새롭다. 민소매와 쇼츠를 입고 팔 근육을 자랑하는 그에게선 보디빌딩으로 다진 근육을 거리낌없이 내보이던 <러브 라이즈 블리딩>(2024) 속 케이티 오브라이언이 얼핏 겹쳐보이기도 한다.

<moisturizer>는 낯익은 인상에서 출발해 새로운 뒷맛을 남긴다. 첫 번째 낯익음은 일관된 개성, ‘윁 레그스러움’이다. 이 밴드의 그룹사운드는 화려하지 않다. 박자감이 두드러지는 리프를 기본으로 디테일에 공을 들여 소리를 풍부하게 채운다. 댄스를 유발하거나 슈게이즈스럽게 찢어지기도 하고 파워발라드를 넘보기도 하다 ‘인디 록’이라는 중심으로 모인다. 메인 보컬 리안 티즈데일은 가창력이나 기술을 뽐낼 생각이 없다. 그가 보컬에 관해 과시하는 것이 있다면 각 트랙에 최적화된 다채롭고 희극적인 음색이다. 그는 그룹사운드를 배경으로 ‘노래’하기보단 리듬 사이로 끼우고 얹듯 ‘보컬링’한다. ‘catch these fists’에서처럼 툭툭 던지고 끊기도 하고, ‘davina maccall’에서처럼 고운 흥얼거림을 뽑아내기도 한다. 이러한 ‘윁 레그스러움’은 여전하나, 여러 트랙에서 확장과 실험이 들린다. ‘mangetout’의 엔딩에 개구진 “ee-ya-ee-ya”가 울려퍼지면 ‘이거지’하는 기분에 입꼬리를 씩 올리게 되고, 머리를 핑 돌게 하는 ‘jennifer’s body’의 후반부 그룹사운드나 ‘11: 21’의 묵직하고 차분한 멜로디가 흐르면 숨을 헉 들이쉬게 되는 식이다.

밴드의 형태가 선명해졌다는 점 역시 하나의 변화다. 이제 윁 레그는 공식적으로 다섯 맴버-리안 티즈데일, 헤스터 체임버스, 조슈아 모바라키, 엘리스 듀란드, 헨리 홈즈-로 이루어진 밴드다. 프론트 퍼슨과 메인 송라이터는 티즈데일이지만, 전 맴버가 작곡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뮤직비디오 속 역학도 조금 다르다. 지난 앨범 비디오에서 세 남성 맴버들이 가벼운 안타고니스트나 엑스트라 역할을 해주었다면, 이번엔 주로 다섯 명이 더불어 움직이는 컨셉으로 촬영됐다.

데뷔 앨범 <Wet Leg>가 솔직하고 유머러스한 연극 한 편 같았다면 <moisturizer>는 적어도 반 정도는 날것 그대로다. 신체적 파워에 대한 자신감을 농담섞어 드러낸 선공개곡 ‘catch these fists’을 통해 예측했던 것과 달리, 윁 레그의 소포모어는 (한 판 뜨자는 앨범이 아니라) 사랑에 관한 앨범이다. 아니, 사랑이 넘쳐흐르는 앨범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들이 그리는 사랑의 모양은 예쁘장한 정형이 아니다. 이를테면 제목의 표현 “모이스쳐라이저”처럼 흐물거리고 끈적이며 피부에 달라붙어 스며드는 것, 액화되고liquidize 또 나를 액화해 바꾸어 놓는 것이다. 여기 이어, 두 번째 낯익음의 정체는 셀 수 없이 많은 아티스트가 다뤄 온 주제, ‘사랑’과 관련돼 있다. ‘love’라는 단어를 비롯한 상투적인 표현들이 가사에 주저 없이 사용되는데,(물론 f*** 역시 아끼지 않는다) 이 언어들은 맥락 안에서 음악과 만나 딜리버리되면서 사적이고 어느 정도 신선한 소리로 와닿는다.


https://youtu.be/HeL2M8jBEI4?si=B897_WlIT2yxfM2A

‘CPR’ mv


데뷔 앨범의 ‘Being In Love’를 떠오르게 하는 첫 트랙 ‘CPR’에선 우리가 기대하는 ‘윁레그스러움’이 물씬 풍긴다. 단순하나 지루하지 않은, 귀에 곧바로 꽂히는 리프. 심경을 그대로 쏟아낸 듯한 가사, 여러 목소리를 넘나들며 연극하는 보컬, 배경에 삽입된 사이렌음까지. “911” / “What’s your emergency?” / “I’m in love!” 따위의 대화가 크린지하게 들릴 법도 한데, 자신들을 그리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이고 보여줄 줄 아는 윁 레그이기에 그저 재미있고 귀엽다. 이어지는 ‘liquidize’는 “head over heels” 상태의 사운드화라고 해도 좋겠다, 마음이 붕 뜨는 동시에 불안이 마구 밀려오는. ‘davina mccall’과 ‘jennifer’s body’는 무엇이든 되게 하고 어디든 갈 수 있게 하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랑의 감각을 노래한다. 둘 다 몽환적이지만 ‘davina mccall’이 부드럽고 애달프다면 ‘jennifer’s body’는 어지럽다. 긍정적인 의미다. 2분 30초 남짓의 러닝타임 동안 온몸의 감각을 개방하게 만드는 트랙이다. 중독성있는 리프와 보컬은 맺고 끊음과 강약을 미묘하게 조절하며 여러 겹 쌓인다. 브릿지의 절제는 뒤따르는 사이키델릭 폭발을 더욱 황홀하게 한다.

소재 면에서 살짝 예외인 트랙은 ‘catch these fists’와 ‘mangetout’이다. 앨범 발매 후 돌아보니, ‘catch these fists’를 가장 먼저 공개하기로 결정한 까닭이 궁금해진다. 호기롭고 재기로운 윁 레그 다운, ‘싸우자는 앨범인 줄 알았지, 실은 사랑 이야기였어’라는 트위스트일까. 하지만 그러한 위장만은 아닐 테다. 프론트퍼슨이 추구하는 에스테틱, 자발적으로 전시/전시거부하는 이미지-가 하나의 트랙으로 탄생한 것이 ‘catch these fists’일 수도 있다고 일단 적어본다. 당연히 음악은 그렇게 의도를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어쨌든. 이유가 무엇이든, 딱히 별 이유가 없었든, 이 순서로 곡을 접한 것은 결과적으로 앨범에 대한 흥미를 더 끌어올렸다. 또한 두 곡도 실은 사랑이라는 대주제와 연결된다. 티즈데일의 경험이 대부분 곡에 영감을 주었기에 더 그렇다. 특별한 사랑은 온 세상에 맞설 수 있을 듯한 에너지를 솟게 하거나, “너 말야 우리 앞길을 막고 있어”(‘mangetout’)라고 말하며 원치 않는 관심들을 단호하게 쳐내도록 도와주기도 하니.

경쾌하고 캐주얼한 ‘pokemon’은 팝에 가깝다. ‘너를 태우고 서둘러 드라이브를 떠나고 싶다’고 고백하는 러브송. 헌데 이어지는 트랙이 ‘pillow talk’이다. 이런 예상을 벗어나는 구성. 일단 드럼을 한 차례 두드리고 보는 오프닝부터 심상찮다. 상대방이 곁에 없는 상태에서 느끼는 일종의 금단현상을 음악화한 것만 같다. 이 갈망은 애절하게 늘어질 겨를 없이 휘몰아친다. 심플하게 속삭이는 벌스, 힘은 싣지만 여전히 멜로디를 제하고 뱉는 후렴은 더티하다. 인더스트리얼st 그룹사운드 소용돌이와 어우러져 헤드뱅잉 혹은 막춤을 유발한다. 이 ‘필로 토크’는 사탕을 입에 물려주기보단 온몸에 문대는 종류의, 끈적이고 지저분하며 몸을 닳게 하는 것이다.

헤스터 체임버스가 쓴 ‘pond song’은 스토리텔링으로 시작해 감정의 엑스레이에 도달한다. 비밀이야기를 나누듯 빠르게 주고받는 파트에선 ‘Chaise Longue’의 유명한 “Excuse me”/ “What?”이 떠오르지만, 이번엔 영혼(?)이 실려 있다. ‘pond song’이 다른 곡들과 맞물려 그 사이에서 개성을 드러낸다면, 체임버스가 쓰고 보컬까지 전부 담당한 ‘don’t speak’은 전작의 ‘Convincing’과 유사하게 별개의 가지를 뻗어 주의를 환기한다. ‘언어가 필요 없는’ 사랑을 노래하는 신비롭고 나직한 곡. 슈게이즈에 발을 걸치고 강약조절에 공을 들인 기타 연주는 체임버스의 별로 앞으로 나설 생각이 없는 몽환적인 보컬과 환상적으로 어우러진다. 음색까지 <loveless>에서 빌린다 버처가 사용한 것과 닮은 구석이 있지만… 거기까지. 사실 더 ‘이상한’ 것은 다음 트랙이다.

‘11: 21’은 낯설다. 윁 레그에게서 기대한 스타일의 사운드가 아니고, 그래서 더 반갑고 놀랍다. 음악 세계의 확장이거나 1집에서 굳이 드러내지 않았던 범위를 공개한 것일 테다. 전체적으로 가라앉아 있는데, 그 가라앉음은 아름다워서 저도모르게 눈물이 고이는 종류의 것이다. 무거운 베이스 연주가 전면에 깔리고, 티즈데일은 거기 화음을 맞추듯 서두르지 않고 처연한 팔세토를 뽑아낸다. “시간은 흐르지만, 너에 대한 감정은 같아”: 유달리 절제한 보컬로 전해지는 가사는 진솔하므로 낭만적이다. 자체로 가느다란 체임버스의 것과 달리 기본적으로 허스키한 티즈데일의 음성이 처리하는 가성은 색다르게 매력적이다. 슬로우버닝 후 가만히 내려놓는 트랙.

마무리는 전작의 ‘Supermarket’ 스타일로 자유로운 분위기의 록 ‘u and me at home’, 가사에는 평범한 날의 ‘너와 나’가 담겨 있다. “슈퍼마켓에 데려가서 원하는 걸 다 사주고 싶은” 너, 그리고 “또다시 우리 둘만 집에 있네, 뭘 시켜먹을까”라던지, “일종의 농담으로 밴드를 시작할까”라는 이야기들을 나누는 로맨스. <moisturizer>가 그리는 현재진행형의 사랑은 심장에 충격을 주고 강렬하게 타오르는 것만이 아니라, 편안하게 하루하루를 공유하며 늘 처음 만난 날처럼 설렘을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더불어 나를 상대와의 관계 안에서 재발견하도록 이끄는 것, 새삼 “who am I?”(‘liquidize’)라는 질문을 던져 정체성을 돌아보고 재정립하게 돕는 것이다. 크러쉬를 당한 “긴급상황”에서부터, 익숙해서 ‘오히려 좋은’ 일상까지. 사랑에서 비롯되어 사랑으로 모이면서도 겪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다양한 상태, 갈망, 정서. <moisturizer>는 단조로움을 피해간다기보단 애초에 다채로울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우리가 들으며 떠올리는-맺었거나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모양과 빛깔을 달리하며, 이 앨범은 매번 새로운 감각으로 스며들 것이다.

https://youtu.be/IFSgIHXvckk?si=lAb9aoS1G2PTwUDF

‘u and me at home’



+ 인터뷰 인용 (오역, 의역 있을 수 있음)

Rhian Teasdale interview with Vogue 2025.07.11 by. Anna Cafolla

"우리에 관한 코멘트를 살피면 겨드랑이 털에 대한 공포에 매몰된 남자들이 정말로 많다.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무언가에 적대하려고 그런 적이 없다. 나는 이전 그 어느 때보다 나다운 상태고, 내 퀴어함을 자연스럽고 또 점진적으로 발견하는 일이 날 더욱 자신감있게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근육질의 신체를 갖고 있는 게 더 편안하기도 하다. (……) 나는 보다 자유롭고, 힘있고, 강하다고 느끼며 행복하다. 난 무언가였고, 지금은 뭔가 그것과 다른 것처럼 보인다. -외모를 바꾸어 되고 싶은 대로 되는 일은 해방감을 준다."

“우리 다섯이 함께 곡을 쓰는 것에 관해 상당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헤스터와 내가 함께 쓴 첫 앨범으로 투어를 굉장히 오래 했다. 듀오로 계약을 했지만, 우리 다섯이 함께 정말 많은 것을 겪었다. 아직도 헨리, 조슈아, 엘리스가 세션 연주자로 인식되는 경우가 너무 잦지만, 늘 그 이상이었다. 온전한, 미친mad, 다섯-사람 오퍼레이션으로 두 번째 장을 여는 일은 좋다. (……)”


https://www.vogue.com/article/wet-leg-rhian-teasdale-moisturizer-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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