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교환일기 제11편 _ 영에게
영에게...
안녕 영!
12월의 시작에 편지를 보내. 이제 머지않아 첫눈이 오겠지? 아마도 영에게 다음 답장을 쓸 때쯤이면 해가 바뀌어 있을 거야. 한 해의 마지막 즈음 찾아오는 첫눈처럼, 시간이 지나도 처음 맞이하는 것들이 분명 있겠지. 난 새로움이 찾아왔을 때 두 팔 벌려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영도 알다시피 나는 겨울보다는 여름을 좋아해. 내게 겨울에 문 밖을 나간다는 건 곧 냉장고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거랑 똑같은 거야. 그래서 겨울엔 주로 따뜻한 이불에 파묻혀 책을 읽거나 밀린 드라마를 정주행 하며 시간을 보내곤 해.
이번 주말엔 전기장판을 틀어놓은 이불속에서 ‘당신이 죽였다’라는 드라마를 몰아서 봤어. 영이 안 봤을까 봐 줄거리만 짧게 말하자면, 남편의 극심한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여자주인공과 그녀의 친구가 남편을 계획적으로 살해하는 이야기야. 그런데 이 드라마는 단순히 ‘폭력’을 말하는 게 아니라, 주변인의 침묵과 방관이 얼마나 많은 피해자를 만드는지, 그리고 단 한 사람이라도 도와주는 사람이 있을 때 삶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어 여운이 오래 남는 작품이었어.
20대 초반의 나는 주인공과 비슷한 경험을 하며 연애를 한 적이 있어. ‘데이트폭력’, ‘가스라이팅’ 같은 말조차 없던 시절이었어. 드라마 속 여자 주인공인 희수는 자신의 친구에게 남편의 폭력 사실을 들키자, 자신이 맞을 짓을 했다고 얘기해. 나 역시도 그 당시 내가 ‘잘못’해서 이런 일들을 겪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비참해서 견딜 수가 없었거든.
한 번은 그가 내 얼굴을 때린 적이 있어. 추운 겨울, 아무도 없던 길거리 한복판에서. 그런데 정작 내가 제일 비참했던 순간은 다음날 아침이었어. 가족들과 함께 아침을 먹다, 아빠가 얼굴에 난 상처는 뭐냐고 물었지. 어제 데이트할 때 스케이트를 타다 넘어진 거라고 둘러댔고, 아빠는 그 상처를 보며 떡볶이 국물이 묻은 것 같다며 농담했어. 나는 식탁에서 빠져나와 화장실로 들어가 소리 없이 울었어.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었던 미로 같은 1년이 더 흐르고 나서야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어. 그때 난, 새장 문이 열려있는데도 날아가지 못하는 새와 같다고 느꼈던 것 같아. 20대 중반의 나는 왜 그때 더 빨리 벗어나지 못했는지, 그에게서 날 지킬 수 없었는지에 대한 자책을 버티며 지냈어.
30대에 접어든 지금은 그 모든 일이 꿈처럼 느껴지기도 해. 여전히 몇 장면은 생생하지만, 더 이상 집에 들어가기 전 어디선가 누군가 튀어나올까 봐 두려워하지는 않아.
그때 나는 내가 하던 사랑이 옳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더더욱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어. (그가 연락 수단의 대부분을 차단하기도 했고)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를 잔인하게 대할 때, 그 관계에서 벗어나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어.
영, 우리는 타인을 어디까지 도울 수 있을까? 그때 나를 진심으로 붙잡아줄 누군가가 있었다면, 나는 조금 더 빨리 벗어날 수 있었을까?
데이트폭력이나 가정폭력이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조용히 신호를 보내는 사람들이 분명 있어. 그 신호가 보일 때, 내가 그때의 나보다 조금 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기를 바랄 뿐이야.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분위기가 조금 무거워져 버렸네. 하지만 눈이 모든 것을 하얗게 덮듯이 지금의 나는 그에게 어떤 원망도 미움도 남아있지 않아. 그때의 나도 더 이상 탓하지 않아.
이 이야기를 쓰며 잊고 지냈던 그때의 일을 왜 다시 꺼낸 걸까, 다른 걸 쓸까 잠시 고민도 했지만, 언젠가 한 번은 이 일에 대해 쓰고 싶었어. 아주 조금은 개운해진 기분이 들어.
영은 최근에 재밌게 본 영화나 책이 있어? 있다면 추천해 줘!
곧 보자.
그럼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