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교환일기 제7편 _ 영에게
영. 안녕.
저번 편지에서 영이 쓴 제목처럼, 우린 지금 뜨겁고 강렬한 여름을 통과하고 있어.
영의 편지를 받고 며칠 후, 우리는 서촌을 함께 걸었지.
저녁 무렵 서촌엔 한바탕 소나기가 내렸고, 골목마다 고인 물웅덩이에는 가로등의 노란 불빛이 일렁였어. 좁고 고요한 골목길을 걸으며 우리는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눴지.
영은 지난 편지에서 나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영감을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어. 난 영을 만나면 꼭 그 부분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어. 왜 '그럼에도'가 붙을 수밖에 없는 건지.
영은 내게 대답했어.
자신이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내보이고 싶다고. 그런 영의 발자취를 보며 다른 사람들이 사랑과 영감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그게 설령 한 사람일지라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어.
영은 무엇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것, 되고 싶은 것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사람이야. 나는 그런 영을 보며, 많은 것에 주저하는 나 자신이 왠지 초라해 보여 질투가 나기도 했었어. 하지만 그 질투심을 땔감 삼아 그동안 생각만 했던 것들을 하나 둘 도전해 보고 나만의 열정을 태우기도 했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영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껴. 생각만 하지 않고 실행할 수 있도록 마음 한편에서 늘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 너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소리 없이 응원해 주는 사람. 그런 영이 내 곁에 있어 내가 더 용기를 가지고 멀리 나아갈 수 있었어.
며칠 전 집에 가는 길, 폭염을 이기지 못하고 택시를 탔었어.
"안녕하세요."
들뜬 말투로 기사님께 인사를 건넸어.
"네."
기사님은 묵직하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셨어.
택시 안 시원한 냉기와 기사님의 짧고 굵은 음성덕에 땀은 금방 식었지. 열기로 데워진 몸이 진정이 되고 택시 내부를 둘러봤어. 택시의 손잡이 윗부분에는 무지개색 배경의 화려한 옷을 입은 트로트 가수와 그 가수의 앨범을 홍보하는 포스터가 붙어있었어. 포스터에 궁서체로 적힌 다섯 곡의 곡 중 첫번째를 제외한 나머지 곡은 유명한 트로트 가수의 대표곡이었어. 혹시나 해서 앞쪽에 있는 기사님 성함을 봤는데, 웬걸. 그 트로트 가수와 이름이 같은 거야.
나는 조금 놀라, 기사님께 물었어.
"혹시 가수신가요?"
기사님은 방금 전과 360도 달라진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대답하셨어.
"맞아요! 내가 그 사람이에요! 허허허! 별 건 아니고~ 그냥 무명가수지. 허허허!!" 기사님이 호탕하게 웃으셨어.
집에 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기사님이 앨범을 내게 된 길고 긴 이야기에 빠져들었어.
"내가 한 번은 나이트 웨이터를 태웠는데, 그 웨이터가 나한테 목소리가 좋다고 가수 할 생각이 없냐고 하는 거예요. 근데 마침 또 다음에 탄 손님이 노래 교실을 가는데 늦었다고 택시를 탔대? 그래서 나도 노래교실에 가서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지."
기사님의 이야기에 푹 빠져든 나는 몸이 저절로 앞으로 숙여졌어.
"노래 교실로는 노래를 배울 수 없겠다 싶어 야간대학을 등록했어요. 낮에는 택시 장사를 하고, 밤에는 가서 노래를 배우고. 그렇게 2년 동안 아주 죽어라 했어요. 노래를 좀 불러보니까 자신이 생겨! 그래서 노래 경연대회에 나갔어요. 나가보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처음 나갔을 때는 예선 탈락이었어. 예선 탈락~ 허허허허"
듣다 보니 왜 기사님이 노래를 불러야만 하는 사람인지 깨달았어. 마이크를 잡지 않았는데도 쩌렁쩌렁한 성량이 대단하셨거든.
"그렇게 수도없이 대회를 나갔어. 많이 나가다 보니까 여기서 본 사람이 저기서 봤던 사람이야. 나가는 사람이 계속 나가는 거지~ 근데 한 번은 내 뒷번호가 상을 휩쓸고 다니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그 아저씨한테 물었지. '어떻게 하면 그렇게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을까요?' 했더니, 그 아저씨가 '노래 봉사를 많이 다녀야 해~~'라고 하는 거야. 그 이후로 그 아저씨 쫓아다니면서 노인 카페, 노인정 이런 데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엄청나게 불렀어."
"그럼 그때부터 가수가 되신 거예요?" 내가 물었어.
"아니~ 그렇게 봉사를 다니니까 어느 정도 인지도를 쌓았는데 어느 날 한 번은 앞에 앉은 할아버지가 나한테 물어보더라고요. 대표곡이 뭐냐고. 나는 지금까지 노래를 그렇게 부르면서 내 노래 하나도 없이 노래를 부르고 다닌 거야! 그래서 그때부터 앨범을 만들기 시작했지. 결국엔 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앨범도 그냥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돈이 엄청나게 들어가. 그러니까 더 열심히 택시를 하는 수밖에 없지. 그렇게 밤에도 운전하고, 새벽에도 운전하고, 3년을 빠짝 벌어서! 지금은 개인택시도 하고~ 내 앨범도 내게 된 거야. 허허허." 기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가 처음 택시를 탔을 때에 그 분과 지금의 이 분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어.
"근데 나는 유명하지는 않어요~ 이미 나이도 먹을만치 먹었고. 내가 뭐 잘되고 그러면 좋겠다만, 나는 그냥 즐기면서 하는 거예요. 즐기면서. 되면 좋고! 안되면 어쩔 수 없고! 허허허허허!" 기사님과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창 밖으로 내가 내려야 할 곳이 보였고 나는 택시에서 내렸어.
언니가 지난번 편지에서 나의 꿈이 뭐냐고 물었지? 내 꿈은 여러 이름을 모으는 수집가가 되는 거야. 언니도 여러 꿈이 있듯이, 나도 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그중 제일 가는 꿈이 뭐냐고 물으면 선뜻 하나를 고르기 어려워. 글쎄, 목표는 많지만 꿈은 좀 더 거창해야 할 것만 같달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는데, 나는 계속해서 새로운 것들을 도전하며, 내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 지금은 직업으로서 가장 많이 불리지만, 앞으로는 작가로 불리고 싶어. 시간이 흐르며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늘어나면 내 이름표에 또 내가 수집한 이름들이 붙겠지.
고백하건대, 나는 작가라는 이름을 갖기 위해 내가 탔던 택시 기사님처럼 열정적으로 글을 쓰지 않았어. 내가 열심히 했는데도, 인정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앞섰거든. 맘먹고 제대로 글을 썼는데, 다른 사람들이 내 글을 읽어주지 않는다면 어쩌지? 이런 고민들이 내 손가락을 주저하게 만들었어.
그럴 때마다 나는 택시기사님이 했던 말을 곱씹기로 했어.
'되면 좋고, 안되면 어쩔 수 없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지나치게 움츠러들지 않기로 했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노력 외에도 때와 운이라는 것도 작용하는 것 같아.
서퍼는 아무리 좋은 파도가 와도, 준비되지 않았다면 무리해서 타지 않아. 그저 노를 저으며, 자신에게 맞는 파도가 오기를 묵묵히 기다릴 뿐이야.
그러니 지금은 내가 서있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해보기로 했어.
겁먹지 않고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면 어느 날 뒤돌아보았을 때 내가 지나온 길의 풍경도 즐길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영이 앞으로 걸을 수많은 걸음과 그 용기를 응원해.
그럼 이만 총총.
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