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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Mar 10. 2021

봉환식

안 팔 거라니까 걍 올림

1.


한 사내가 언덕길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밭을 매던 노인이 허리를 펴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별일도 다 있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종전 이후 외지인은 잘 찾아오지 않았다. 전쟁 전이라고 크게 다른 것도 아니었지만.

노인은 허리를 펴고 땀을 닦았다. 사내의 걸음걸이는 경쾌했다. 얀 베리흐는 잠시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늙어 침침한 눈이 사내의 모습을 읽어내기에 충분할 만큼. 

짧은 금발 머리가 햇살에 반짝였고, 배낭 하나를 맨 채 짐은 단촐했다. 옷차림은 거의 누더기에 가까웠으나 가슴팍에는 무엇인가가 빛나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자 사내는 옛 군가를 음정도 맞지 않는 휘파람으로 부르고 있었다.


나를 집에 보내 주오, 나를 집에 보내 주오

대장님, 나를 집에 보내 주오

어린 자식과 마누라가 있다오

대장이 말했네, 이보게, 병사

자네 자식은 자네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걸세

자네 마누라는 자네 목소리도 기억하지 못할 걸세


“안녕하신가!”


얀이 소리쳤다. 사내가 휘파람을 멈추고 쾌활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얀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내를 보았다. 여행자인가? 그러나 이 마을에 볼 것이라곤 양 몇 마리가 전부였다. 옷차림으로 보아 성에서 온 관리도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군인인가? 가슴팍에서 반짝이던 것이 훈장이라는 것을 얀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는 솔직한 사람이었고 혼자 생각하는 일에는 재주가 없었기에 직설적으로 물었다.


“자네 군인인가?”

“군인이었죠.”

“어디서 왔나?”

“서부 전선에서 왔습니다!”


사내가 우스꽝스럽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서부 전선?”

“예, 그렇습니다! 제3보병대대 1중대 3소대, 소총수 겸 기록병, 기종명 에르인너룽 Mk. 7-“

“전쟁은 4년 전에 끝났어.”


사내는 머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네요. 할 얘기, 하지 말아야 할 얘기가 자꾸 섞여서요.”

“성에서 왔나?”


얀은 호기심을 숨기지 않고 캐물었다.


“성도 갔었던 것 같고, 이곳저곳 다녔네요. 대륙의 반을 돌았습니다. 뭐, 최소한 국경이 다시 그어지기 전까지는요.”

“왜? 아냐, 자네 바쁜가?”

“바쁠 게 있나요. 시간이야 항상 흐른답니다. 저는 잊지 않고요.”

“잘 됐네. 마침 점심 시간인데 마을에 잠깐 들렀다 가지.”

“오, 초대 감사합니다!”


얀과 사내는 달구지에 올라탔다. 


“이 거지 같은 소, 늙어서 그런지 말썽이야.”

“오면서 소를 많이 봤어요. 바스토치에서 전염병이 돈다던데요. 아주 떼죽음이더군요.”

“바스토치면 여기서 한 달은 가야 하잖아?”

“그렇게 멀었나요?”

“그나저나, 자네 이름이 기종명이야? 신기한 이름이군.”

“아뇨, 기종명은 제 모델명이고요. 안드로이드거든요.”


얀은 깜짝 놀랐다.


“안드로이드라고? 세상에, 비싼 몸이셨군.”

“별로 비싸지도 않아요. 요새 나오는 애들에 비하면야 구닥다리죠. 죽지도 못했으니.”

“안드로이드에게도 이름은 있을 것 아냐.”

“전우들은 저를 에르인이라 불렀습죠.”

“그래, 에르인. 만나서 반갑네. 나는 얀이야. 얀 베리흐.”

“반갑습니다, 베리흐 씨.”

“배낭은 뒤에 실어 둬.”

“고맙습니다.”


얀과 에르인은 한참을 소달구지를 타고 마을로 향했다. 에르인은 굉장히 수다스러웠고, 얀은 오랜만의 바깥 세상 소식에 잔뜩 들뜬 기분이었다.


엄마, 엄마, 나는 커서 병사가 될 테요

가슴에 훈장도 달고 양 손에는 금은보화를 들고

집으로 돌아올 테요

커다란 목장을 차립시다, 일꾼도 여럿 부립시다

배꼽 아래가 날아가 소년은 노래했다네


상병님, 그 노래는 그만 좀 부르세요. 말이 씨가 된다지 않습니까?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어, 사전도 탑재되어 있냐?

사전은요, 소대장이 맨날 하는 말 아닙니까.

사전이 없어?

있긴 있는데요, 썩 좋은 출판사 것은 아닙니다.


2.


에르인은 며칠은 굶은 것처럼 음식을 입 안에다 쑤셔넣었다. 온 촌민들이 몰려나와 신기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곧 축제라도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외지인이었고, 대륙의 절반을 돌았으니 이야깃거리도 많을 것이다. 게다가 안드로이드라니. 성에서야 흔할지 몰라도 이 조그마한 촌동네에서는 안드로이드는커녕 자동차도 보기 어려웠다. 그냥 안드로이드도 아니었다. 참전용사 안드로이드였다. 


“맥주도 있나요?”

“그럼, 물론이지!”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졌다. 에르인은 씩 웃으며 맥주를 연거푸 들이켰고, 곧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신이 난 아가씨 몇 명이 식탁 위로 올라가 팔을 엮고 빙빙 돌았고, 에르인은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다가 자신도 손뼉을 치며 발을 쿵쿵 구르다 하늘로 높이 뛰어올랐다. 축제였다. 한참을 웃고 떠들고 나자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마을회관 한가운데의 모닥불 가에 자연스레 사람들은 모여들었다. 사정없이 질문이 쏟아졌다. ‘자네, 술이 꽤 세군.’ ‘아, 알코올 분해 스위치를 오른쪽 끝까지 밀어 뒀거든요.’ ‘그런 기능도 있어?’ ‘거짓말입니다.’ ‘이 친구 아주 웃긴 친구네.’ ‘노래 더 할 줄 아는 것 있나?’ ‘군가라면 몇 곡 할 수 있지만, 노래 실력은 그다지 좋지 않네요. 애초에 군인으로 설계된지라.’ ‘뭣 좀 더 먹겠나?’ ‘아뇨, 배부르네요.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그래, 참전용사라며? 어느 부대에 있었나?”

“서부전선 제3보병대대 1중대 3소대 있었습니다.”

“이 마을에도 전쟁 때 여럿 나가 죽었거든. 다행히도 여기까지 피해를 입진 않았지만.”

“아랫골 산 아래에 페터도 죽었지? 페터도 서부전선 있지 않았나?”

“페터요?”

“그래, 아는 사람인가?”


에르인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양친께서는 살아 계십니까?”

“베네시 부부? 응, 살아 있지, 왜?”

“아, 아뇨.”

“그나저나 자넨 보직이 뭐였나?”

“소총수였죠. 원래는 기록병이었는데 제르반 공세 이후 전사자가 너무 많아서.”

“고생 깨나 했겠군.”

“고생은요. 그래도 이렇게 대접해 주시고, 불가에 앉아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나네요.”

“전쟁 얘기 좀 해봐.” 주정뱅이었고 참전 이후 두 배는 더 주정뱅이가 된 한스가 말했다.


얀 베르히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나쁜 기억 자꾸 들쑤시지 말게.”

“괜찮습니다… 그런데 잘 기억이 나질 않아요.”

“원래 그래.” 외팔이 루돌프가 말했다.

“그 지랄 겪고 나면 사람이 고장이 난다고. 뇌에 구멍이 뚫리는 거야. 기억에 구멍이 숭숭 뚫려서 마누라 이름도 까먹어.”

“맞아요, 그렇게 됩디다.”

“안드로이드도 고장이 나나?”

“예전에.”


에르인이 술을 쭉 들이켰다.


“베르캄프였나요… 어디였지. 이름이 뭐였더라. 키가 작았어요. 대학생이었는데. 불문학과였지요. 입버릇이 있었는데… 항상 조용했어요. 포위됐었고… 공중지원은 오지 않아서 하루하루… 뭐였지… 죄송합니다… 아, 맞아요… 아니, 아니구나… 어쨌든 그 작은 친구가 ‘중대장님, 제가 뒷길로 나가 지원을 요청하겠습니다’… 작고 조용했어요, 포위망을 뚫고, 입버릇이 뭐였지, 미안합니다. 나가서, 전차가 와서 살아남았죠. 꼭 지금처럼 불가에 모여서 술이 돌고 - C’est la vie, 맞아, 이거였지 – 춤도 추고, 그는 영웅이었어요.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요. 아무리 애를 써도. 고트발트? 아니야… 모두가 그를 끌어안고 헹가래를 치고 머리를 쓰다듬고, 평소 같았으면 불같이 화를 냈겠죠, 나는 애새끼가 아니야, 하고. 그러나 그때는 세상 그 누구보다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어요. ‘담배 한 대 태우러 가자,’ 그러더군요. ‘나는 키가 작은 게 항상 싫었어. 어릴 적에는 따돌림을 당했고, 커서는 여자들한테 인기도 없었어. 근데 그게 인생이지, 세 라 비 – 안 그래? - 오늘만큼은 내가 자랑스러워.’ 뭐 그런 얘기를… 담배 불빛 때문에 저격수에게 머리가 날아갔지요. 고트발트, 고트헤르트, 고트하르트, 아무리 애를 써도… 이름이,”


사위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죠?”

“베르캄프. 나도 베르캄프에 있었어.” 한스가 조용히 말했다.

“어디요?”

“베르캄프. 불문과 다니던 대학생 꼬맹이가 담배를 피우다 머리가 날아갔다고.”

“누구 머리가 날아갔다구요?”

“이 친구 취했나 보군.”

“그래요… 그런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오늘은 그만… 혹시 잠시 누울 곳 있을까요?”

“계단 위에 손님 방으로 가게. 2층 복도 오른쪽 두 번째 방이야.”

“죄송합니다… 다들 좋은 밤 되시길.”


에르인은 울고 있었다.


3.


내가 일곱 살 때, 하루는 너무 일이 하기 싫은 거야. 그 추운 겨울에 새벽부터 일어나서 쇠죽 끓이고 꼴도 베고, 완전히 아동노동이잖아. 그래서 한번은 말야, 산 위에 양 풀어놓고 먹이는 방목지가 있었거든, 조그마한 헛간도 있고. 아버지 몰래 빠져나가서 언덕배기 올라서 거기 숨어들어갔지. 좋더라구. 소시지 말린 것도 먹고 개랑 놀다가 나무도 타고. 그러다가 해가 지니까 덜컥 무서워지더라. 마침 그날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거든. 길도 안 보이고, 숲에서는 늑대 우는 소리도 나지, 어린 솜씨에 장작에는 불도 잘 안 붙고. 너무 추워서 양들 사이로 기어들어갔어. 한 마리 꼭 껴안고 덜덜 떨다가 다음 날 눈을 떴는데, 산맥 사이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어. 마을 사람들이 달의 눈이라고 부르는 호수가 있었는데, 그 물에 비쳐 찬란하게 빛나는 거야. 붉고 따뜻한 빛으로. 그 순간 추위도 멎더라고. 왠진 모르겠는데 엉엉 울음이 나오더라. 그냥 그 자리에 앉아서 펑펑 울었어. 


그래서, 집에는 무사히 돌아갔나요?

그럼. 아버지한테 뒤지게 처맞았지.

하하.

언젠가 집에 돌아가면 다시 그 광경을 보고 싶어. 세상의 끝에서 떠오르는 느낌이야. 내가 여기 있으니 너도 거기 있으라고 말하는 것 같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간에.

고향 이름이 뭐라고요?


헉, 소리와 함께 에르인이 눈을 떴다. 벽난로를 치우던 얀 베리히가 놀라 물었다.


“왜 그래, 나쁜 꿈이라도 꿨나?”

“아, 아뇨, 전기양의 꿈을.”

“무슨 양?”


하하, 에르인이 낮게 웃었다.


“모르겠네요. 그냥 잊어버리세요. 이스터 에그 같은 거라.”

“속은 좀 괜찮아? 어제 잠깐 기억이 끊어진 것 같던데. 안드로이드도 필름이 끊기나?”

“예에… 그랬죠. 정확히 말하면 날아간 겁니다만. 담배 한 대만 주시겠어요? 고맙습니다…”


얀은 잠자코 불을 붙여 주었다.


“아름다운 곳이군요.”


에르인이 불쑥 말했다.


“루제니츠? 뭐, 글쎄. 아무 일도 없는 곳이지. 양 몇 마리 말고는.”

“여름에는 흐드러지게 장미가 피고, 계곡을 따라 푸른 시냇물이 흐르며, 초원에는 양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는 곳. 들에는 황금빛 이삭이 열리고 나무에는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과실이 맺히는 곳. 웅장한 산머리에는 신들이 내려 구름과 눈으로 잔치를 벌이는 곳. 새들이 지저귀고 푸르고 노란 꽃들이 들판을 수놓는 곳. 밤에는 쏟아질 정도로 별들이 흐르는 곳이에요.”

“허허, 그렇게 들으니 또 다르군.


…거기서 처음 만났다니까. 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으려니까 갑자기 눈이 시려운 거야. 고개를 들어 보니 새빨갛게 타오르는 머리를 한 여자애가 나를 보고 있었어. ‘뭐 봐?’ ‘그냥.’ ‘제목이 그냥이야?’


꼭 여자애 목소리까지 흉내내셔야 합니까?


잠자코 들어 봐. 그 뒤로 매일같이 나와 있더라고. 나야 그때는 학교야 다녔지만 지겹기도 해서 그냥 빠져나가서 땡땡이나 쳤는데, 걔는 일이 있는데도 그러고 있었어. 결국엔 둘 다 걸려서 한동안 못 봤지. 마을 축제가 열리기 전까지. 난 시끌벅적한 게 싫어. 지금도 아주 좆 같다고. 저 새끼들은 포탄이 남아도나.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뭘 어떻게 돼. 그 자리에서 손 잡고 빠져나가서…

음, 알겠습니다.


“이건 누구의 기억인가요?”

“뭐?”

“저 같은 깡통 로봇이 기억하기에는 한 인간의 인생은, 기억은 너무도 크군요. 하물며 여러 명은 더더욱 그렇군요.”

“술이 덜 깼어?”

“예? 아, 아뇨, 죄송합니다. 저, 혹시, 어제 한스 씨가 말씀해 주신 분들은 어디 계십니까?”

“뭐, 양치기네? 베네시 부부?”

“예.”

“왜, 볼일이라도 있나?”

“네. 있어요.”

“그럼 가자구. 아침은 안 먹어도 돼?”

“아침은 먹어야죠.”


4.


우릴 잊지 마, 기억해 줘, 너 때문에 크리쉬토프가 죽었어. 아드님은 영웅처럼 돌아가셨습니다. 이봐, 로봇. 싱글싱글 처 웃지 말고 가서 탄이나 날라. 예, 중대장님! 우리 목표는 베르호르크 전방 200Km. 걔 이름이 뭐라고? 니 여자친구. 남의 여자친구 이름을 니가 알아서 뭣 하게? 마리아? 이거 봐라, 고양이 귀엽지. 어디서 나셨습니까? 소대장 알면 난리 칠 텐데. 한번은 내 동생이 우릴 잊지 마, 내 고향은 크로메리츠가 64-38번지, 아버지 이름은 돌진! 돌진! 들판에는 꽃이 피고 하늘에는 달이 떠올라, 술을 빚는 노랫소리가 씨발, 의무병! 의무병! 아드님께서는 7월 22일 아르메츠흐 평원 전투에서 적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셨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그는 영웅적인 면모를 보였습니다. 여기, 미로슬로브 상병의 유품 제발, 우릴 잊지 마,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내가 용감히 죽었다고 전해줘, 엄마, 엄마! 신이시여!


“다 왔다.”

“아, 감사합니다.”


대문은 노란 색이야. 담벼락에는 아이비가 잔뜩 자라 있어. 좀 걷어내야 할 텐데.

노란 대문이 열렸다. 돌에 조각해 놓은 것처럼 굳은 얼굴의 노인이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그렇게 병원 좀 가래도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어. 담배나 좀 끊든가 하지.

기침 섞인 목소리로 노인이 말했다. 


“얀.”

“실니.”

“옆은 누군가?”

“어제 마을에 찾아온 외지인이야. 자네 부부를 찾아왔다는군.”

“안녕하십니까. 저는 서부전선 제3보병대대 1중대 3소대 소속으로 4년 전 참전한 안드로이드, 기종명 에르인너룽 Mk. 7, 모델번호 230K-7258UU입니다. 귀하의 아들이었던 고 페터 베네시 상병과 같은 부대에 있었습니다.”

“…누구요?”

노인의 뒤에서 새하얀 두건을 두른 여인이 걸어나왔다. 

어머니.

“어머니.”

“으응?”

“어머니, 누구예요?”

칼레나.

“칼레나.”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의 젊은 여인의 치맛자락을 꼭 붙잡고 있는 것은 작은 꼬마였다.

“안녕, 다리나. 나는 네 아빠의 친구란다.”


모든 것이 에르인의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모든 광경이, 모든 냄새가, 모든 소리와 모든 감정이, 그것은 모두 기억이었으나 그의 기억이 아니었다.


“…들어오게.”


부엌은 에르인-페터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좁지만 아늑했고, 먼지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창문으로 햇살이 따뜻하게 새어들었다 – 벽에는 페터가 열한 살 때 그렸고 학교에서 상을 받았다던 마을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 붙어 있다. 회색 털의 고양이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름은 박사라는 뜻의 ‘도츠토르’.

“그래. 페터의 전우라고? 페터는 이미 가슴속에 묻은 지 오랠세. 먼 길 헛걸음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차 정도는 내줄 수가 있어.”

“설탕을 두 스푼, 거기다 후추를 약간 쳐서 마셨지요. 전장에서도 구할 수만 있다면 언제나 그렇게 마시더군요. 뜨거운 물 구하는 게 훨씬 더 어렵긴 했지만요.”

“페터가 그러던가?”

“벽에 그림도 아직 붙어 있네요. 저 그림 그리려고 지붕 위에 올라갔다가 아버님께 크게 혼났다면서요.”

“…그래, 기와가 떨어졌거든. 우리 집도 아니었는데 말야.”

“손재주가 좋았어요. 전장에서도 종이랑 펜이 있으면 뭔가 항상 끼적거리곤 했지요. 제게 절대 보여주진 않았지만.”

“그래…”

“칼레나 양, 아니, 베네시 부인. 페터는, 페터 상병은 항상 당신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 목걸이를 가져왔어요. 문트보르그에서 한 달치 담배와 바꿔 농가에서 얻었지요. 저는 왜 내 담배까지 가져가냐고 투덜거렸습니다만 저보다 계급이 높아 어쩔 수가 없었어요. 한번 차 보세요, 붉은 머리칼에 잘 어울릴 거라 의기양양해 하더군요.”


칼레나 베네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저는 기억을 전하러 왔습니다. 종전 이후 4년 동안 대륙의 절반을 떠돌았어요. 죽어간 모든 전우들은 제게 말했습니다. 나를 잊지 말라고. 나를 기억해 달라고. 저는 로봇입니다. 그럴 듯하게 만들어졌지만 로봇이에요. 거기다 애초에 군용으로 개발되었지요. 기억할 수 있는 용량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을 지웠습니다. 기능 몇 개를 비활성화해 – 노래 기능이라든지 - 억지로 용량을 분할해서 강제로 늘린 다음 장기 메모리에 전우들을 백업해 두었지요.”


메모리 누수가 시작되었다. 에르인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기에 용량 부하가 상당했습니다. 하나를 이야기하고 나면 그 이야기를 곧바로 지워야만 했습니다. 다른 전우의 메모리가 휘발되기 전에 다시 고용량-장기간 메모리에 저장해 두어야 했어요. 가장 슬펐고 또 저주스러웠으며 안타까웠던 것은, 이야기를 하고 난 뒤였습니다. 저에게 감사를 표하는 이도, 욕설을 퍼붓는 이도, 저주를 퍼붓는 이도 있더군요. 괜찮습니다. 얼마든지요. 다만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 저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요. 저를 끌어안고 우는 사람도 있었어요. 저도 함께 울었습니다. 그것이 메모리 누수에 따른 현상일지, 슬픔의 눈물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게 저는…”

“…고생 많았네.”


페터의 어머니가 에르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의 기억은 그의 것이 아니었으나, 그는 더없이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다시 사과드립니다. 너무 늦었어요.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군요. 저는 비겁자입니다. 이기적이고요. 가장 친한 전우의 기억은 도저히 날려 버릴 수가 없었어요. 이미 구형 모델이라 메모리를 교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고 싶지도 않긴 했지만, 부하가 상당해 이제는 기초 동작 기능에까지 손상이 가고 있어요.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그때처럼 저 혼자 살아남기 위해서요.”

“자넨 최선을 다했어. 이렇게라도 찾아와 줘서 정말 고마워.”

“…감사합니다.”


에르인은 눈물을 닦았다. 차의 맛은 기괴했다. 전장에서 페터가 그에게 차를 권할 때 에르인은 기겁을 하며 ‘세상에 차에 후추를 타 먹는 건 상병님밖에 없을 겁니다’라고 타박을 놓곤 했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하게 될 이야기를 하고 나면 저는 그것을 잊을 겁니다. 그러니 기억해 주세요. 여러분의 아들, 남편, 아버지였던 페터, 제 전우였던 페터를 잊지 말아 주세요. 제가 잊을지언정.”


5.


이야기는 밤을 새워 계속되었다. 때론 웃음이 터졌고 때로는 흐느낌을 주체할 수 없어 이야기는 중단되곤 했다. 노부부는 때로 에르인의 손을 꼭 잡았고, 젊은 미망인은 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희미해지고 계속해서 구멍이 뚫려 가는 가운데 에르인은 필사적으로 페터의 몸짓을, 말투를, 추억을 떠올리려 했다. 그래야 했지만, 그러기 싫었다. 그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봐, 돌아가면 우리 집에 한번 꼭 와. 끝내주는 식사를 대접할 테니. 산책도 가자고. 관광업으로 꽤 뜰 것 같은데, 우리 마을도.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후추 탄 차는 안 마실 겁니다.

너는 사람이 죽을 것 구해 줘도 대답이 그 따위냐?

…고맙습니다, 페터. 상병님 아니었으면 진짜 죽었을 거예요.

담배 남는 거 있어?

두 갑 있는데요.

두 갑 다 내놔.


‘제가 어디까지 얘기했죠?’ 라고 물으면 그들은 참을성 있게 에르인의 이야기를 복기해 주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해 부대원들을 웃겼는지, 그가 어떻게 싸웠는지, 그가 어떻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는지 따위를. 모든 것이 새롭다고 느끼며 에르인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마지막 이야기를 남겨두고 그는 더없이 그만두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것마저 없으면 페터라는 기억은 영영 사라져버릴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나.”

“다리나, 이리 오렴.”

“다리나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손이 얼마나 작았는지, 눈은 얼마나 큰지. 볼은 얼마나 부드러운지. 미소는 또 얼마나 환한지, 그런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더군요.”


야.

예.

만약 내가 돌아가지 못하면…

불길한 소리 마십쇼.

그래, 영화 보면 꼭 이런 소리 하다 죽더라.

예. 닥치고 총이나 쏘세요.

가서 아빠가 사랑한다고 한번 꼭 안아 줘.

아, 페터. 제발 좀.


야, 이거 볼래?

웬일입니까, 한번을 안 보여 주시더니.

귀엽지?

그렇네요. 따님인가요?

응. 내 딸 다리아.


“꼭 사랑한다고 전해 달라더군요. 아빠가 사랑한다고. 많이 안아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그것으로 페터의 모든 기억이 메모리에서 전달되었다. 메모리 누수는 돌이킬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죠?”


작고 보드라운 생명이 그의 품에 안겼다. 커다란 눈이 의아하다는 듯 안드로이드의 은빛 눈물을 바라보다- 작은 손을 내밀어 그것을 만지고 까르르 하고 웃었다.


“…고마워.”


왜인지는 모르나 에르인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느덧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6.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래.”

“저 때문에 하루나 일 못 하셔서 어쩝니까.”

“괜찮아. 하루 정도는 쉬어도 돼. 자네는 어때?”

“저야 뭐… 괜찮습니다. 어딘가 허전하긴 하네요. 슬슬 더 폐를 끼치기 전에 일어나 봐야겠어요.”

“더 있다 가지 않고.”

“이틀이나 재워 주셨으면 충분합니다.”


짐을 챙기는 – 짐이라봤자 이제는 남은 것도 거의 없었지만 – 에르인을 보며, 칼레나가 무언가를 건넸다.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뭐죠?”

“남편한테 온 편지 중에서 이런 편지가 있었어요. 당신이 안드로이드란 말은 없었지만 ‘기억력이 나빠질 친구가 있다’라고 써 있더군요. ‘기억력이 나쁘다’도 아니고 ‘나빠질 것이다’라길래 ‘대체 무슨 소리야’라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 있었어요.”


하하, 에르인은 웃었다.


“이건 전가요? 왼쪽은…”

“세상에, 거짓말이 아니었군요. 정말로 잊어버렸네요.”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오히려 고마운걸요. 그래요, 이쪽이 페터. 당신 전우, 페터.”


에르인은 한참 동안 그림을 바라보았다. 사진 속 두 사내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에르인은 사무치는 그리움을 느꼈다. 끝없는 상실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마음 한 켠은 따뜻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노란 대문을 나와 에르인은 한참 동안 페터의 집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족을 생각했다. 그래, 그랬구나. 이런 곳에서 당신은 컸고 그 이야기를 들려 주었단 말이지.


“갈 준비 됐나?”


실니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옙, 대장님. 준비 완료됐습니다!”


모든 촌민이 마을 어귀에 나와 있었다. 


“어라, 이건 예상치 못한 배웅인데요.”

“당연히 나와 봐야지. 얼마만의 손님인데.”

“감사합니다.”

“그래, 또 오라고.”

“예, 물론이죠.”

“설마 우리도 까먹은 건 아니겠지?”


에르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설마요. 이제 공간도 넉넉합니다.”


집게손가락으로 능청스럽게 머리를 톡톡 두드리는 그를 보며 마을사람들은 크게 웃었다.


“다음에 오면 술 한잔 사지.”

“그래요, 한스. 베르캄프 얘기도 들려 주세요.”

“이제 어디로 갈 건가?”

“글쎄요.”


에르인은 마을 위로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어느 겨울, 눈이 소복하게 오는 날 달의 눈 호수에 앉아 산맥 사이로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보러 오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이곳저곳 다니면서 저도 기억할 만한 이야기를 쌓아 올게요.”

“시인이 다 되셨군.”

“아무래도 예술 관련 기능이 여유가 있어 활성화됐나 봐요.”

“그래, 잘 가게. 우리가 자네를 기억할 테니, 자네도 우릴 잊지 마.”

“물론이죠.”


그렇게 낡은 안드로이드는 길을 떠났다. 여름에는 흐드러지게 장미가 피고, 계곡을 따라 푸른 시냇물이 흐르며, 초원에는 양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는 곳. 들에는 황금빛 이삭이 열리고 나무에는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과실이 맺히는 곳. 웅장한 산머리에는 신들이 내려 구름과 눈으로 잔치를 벌이는 곳. 새들이 지저귀고 푸르고 노란 꽃들이 들판을 수놓는 곳. 밤에는 쏟아질 정도로 별들이 흐르는 곳을 뒤로하고. 그곳에는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 그의 친구가 한때 살았다. 


가슴팍에 그와 그의 친구가 그려진 그림을 소중하게 품고, 노병은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나를 집에 보내 주오, 나를 집에 보내 주오

대장님, 나를 집에 보내 주오

얘야, 어서 오너라, 어미는 머리가 하얗게 세었고

네 딸은 자라 들판을 뛰논단다

세월은 지나갔어도 우리가 너를 어찌 잊겠느냐

어머니 나 돌아왔소, 어머니 나 돌아왔소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 나 돌아와 묻혔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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