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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n Jan 02. 2021

서점의 장면들

책을 만나는 리추얼의 공간


  가게 중에서도 서점을 좋아한다. 서점 안에서 내 두 발을 움직여 서가로 다가가는 일, 칸칸이 눈으로 훑으며 세로로 된 제목들을 더듬어보는 일, 그리고 한 권의 책을 뽑기까지의 그 일련의 과정은 모두 그 책을 만나기 위한 작은 리추얼같이 느껴진다. 서점들은 책을 만나는 각기 다른 순간들을 마치 무대처럼 세팅해두고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여러 권의 책들 중 어떤 표지에 이끌려 한 책을 집어 드는 것과, 서가에 꽂혀진 책들을 하나하나 세로로 훑다가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제목을 뽑아 드는 것. 그것은 책을 만나는 각각 다른 순간이 된다. 아마도 다른 서점에서라면 눈에 뜨지 않았을 책을 어떤 서점에서는 운명처럼 만나기도 했다.


  거실과 같이 나른한 공간에서 만나는 한 권의 책과, 누군가의 서재를 닮은 사적인 공간에서 만나는 한 권의 책은 서로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나는 각각의 서점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밀도와 가구의 배치들이, 책을 만나는 리추얼의 순간을 서로 다르게 그려낸다고 믿는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았던 세 곳 서점의 장면들에 대한 기록이다.




  공간에 계단이 있으면 마치 무대를 오르내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 서점은 입구가 가장 높은 바닥에 위치해 있고, 마치 무대를 입장하듯 한 두 개씩 계단을 내려오게끔 되어있다. 들어오자마자 난간 너머로 커다란 보이드를 통해 아래층에 걸쳐진 카페가 내려다보인다. 사실 이곳에 온건 그 카페의 씬을 어디선가 보고는 전체적인 공간이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서점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이곳은 본래 가구 브랜드의 쇼룸 건물인데, 그래서인지 공간의 아름다운 씬들을 만드는 법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일반적인 서점들과는 조금 다른 진열 방식을 취하고 있는 듯 보인다.


  가장 적절하고 절묘한 위치에 가구들을 놓아두고  그 위에서 책들을 만나게 해 두었다. 계단 아래에 바닥과 떨어진 그 틈 사이에, 볕이 드는 창가에, 거실 같은 라운지를 꾸려놓고서, 커다란 다이닝 테이블 위에, 심지어 바닥의 접시 위에도 책을 놓아두어 호기심을 자극했다. 책장에 책을 빼곡히 꽂아 진열하는 대신에, 커다란 테이블 위에 표지가 보이게끔 책을 보여주는 방식을 많이 택했다. 그런 장면들 때문인지 감각이 좋은 어떤 이가 오래된 건물을 고쳐 살고 있는 집에 놀러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공간이 반층씩 걸쳐있어 그 틈을 통해서 전체가 아닌 반절씩만 보여주는 카페의 씬들이 매력적이다. 2층부터 시작되는 가구 쇼룸은 르 꼬르뷔제의 주택에 온 것 같은 신기한 공간감을 가졌다. 옛날 건물이 남긴 낮은 천정과 중앙의 나선형 계단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서점이 막 열었을 당시에는 바우하우스를 주제로 한 전시와 책과 오브제들이 큐레이션 되어있었다. 계속해서 새로운 주제와 전시를 기획하고 그때마다 가구와 책들의 위치를 재구성하는 듯하다.


  한 두 개 혹은 반층씩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면 계속해서 다른 각도의 새로운 장면들을 만난다. 그중에서도 두어 개 정도 계단을 내려온 가장 낮은 지점에 거실처럼 꾸려놓은 라운지를 둘러싸고 있는 그 주변의 씬이 가장 예뻤다. 커다란 나무 테이블 위에는 투명한 유리병에 꽃가지 한대가 꽂혀있고, 그래픽적인 표지를 가진 책과 오브제들이 배열되어 있었다. 그 뒤쪽으로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는데, 그 도톰한 난간 앞쪽으로 작은 화분들과 그림을 놓아두었고, 이곳에서 살 수 있는 패브릭 담요를 의자에 걸처두었다. 내가 가 본 서점 중에서 가장 다채롭고 아름다운 공간의 장면들을 가지고 있었다.

(lifebooks, 논현)



  아주 아주 긴 테이블을 가진 동네 서점이 있다. 작은 가게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이 바 테이블은 가게 안에서 가장 길다란 가구다. 벽면을 채우고 있는 선반보다도 아마 길 것이다. 이곳은 내가 예전부터 가장 좋아하는 서점이고 지금의 자리로 오기 전 한번 가게 위치를 옮겼다. 커피를 함께 팔았던 그 이전의 서점 모습일 때부터 좋아했다. 이곳으로 이사를 온 뒤에 처음 방문했을 때는 작은 가게를 가로지르는 긴 테이블의 존재가 조금 의아스러웠다.


  그런데 몇 번 와보고 알았다. 그 기다란 테이블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곳에 오면 항상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오랫동안 머물면서 마음에 드는 책을 찬찬히 골라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다란 테이블 위에 두터운 코트나 목도리, 지고 있던 무거운 가방을 내려두고 가장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서가를 탐험할 수 있다. 서점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 테이블 위에서 마음속으로 찍어둔 책들 중 집으로 데려갈 것들을 다시 한 번씩 펴보면서 신중히 고른다.


  서점은 때로 몸이 기억하는 공간이다. 자주 가는 서점에는 어느 책장에 어느 주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서점은 항상 약속된 한 켠에 그 주제들을 모아두고서 손님을 기다린다. 오랜만에 가더라도 익숙한 듯 그 책장으로 다가가서 그간 업데이트된 신간들을 만날 수가 있다. 그 위치를 기억하는 것과 지키는 일은 서점과 나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thanksbooks, 합정)



  가게 안에 들여다보이는 서점의 레이아웃이 낯설다. 마치 누군가의 사적인 서재를 닮았다. 간판이 없었다면 아마 개인 사무실인 줄 알고 지나쳤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서점의 모습과 달라서 들어서기 전 앞에서 조금 머뭇거렸다.


  처음 온 서점에서 어떤 공통분모를 발견했다. 서점의 벽면이 내 방의 벽면과 닮아 있었다. 방의 한쪽 벽면에 그때 떠오른 생각들이나 영감을 주는 문구들, 끄적거린 것들을 붙여두곤 했는데, 서점 주인도 비슷한 취미 혹은 습관을 가진 듯하다. 갈색으로 빛이 바랜 오래된 책장들, 엽서와 그림의 조각들이 벽을 채우고 있었다.


  방 안의 가구들은 짙은 갈색이라는 공통점 빼고는 모두 다른 곳에서 온 듯하다. 일부러 꼭 맞춘 듯 보이지 않은 모습이 가게보다는 집을 떠올리게 한다. 계산대가 문을 바라보고 서있는 전형적인 가게의 모습 대신 공간 한가운데에는 긴 책상이 놓여있다. 서점 주인은 그곳에 앉아 마치 그 공간을 자신의 서재처럼 쓰다가, 손님이 오면 서점 모드로 전환해서 책을 계산해주는, 다정하고도 위트 있는 공간의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서점 주인의 방 같아서 다정하게 느껴졌다.


  내가 좀 더 대범한 성격이었더라면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나는 그럴 위인이 못되었다. 책 두 권을 계산하고서 조용히 그 장면들을 사진에 담고 나왔다. 지금은 아쉽게도 망원동에서의 영업을 종료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 같은 이름의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듯 하다.(백년서점, 망원)




  한때 서점 주인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서점이라는 공간 안에서 누군가 어떤 책을 만나게 하는 근사한 순간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것은 단지 공간을 만드는 것만으론 완성할 수 없는, 서점 주인장의 어떤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서점에서 소개하고 싶은 책들을 정하는 일 외에도, 누군가 그 책을 서점의 어느 구석에서 어떤 방식으로 발견하게 할지 그 장면까지도 계획해두는 일까지도 포함한 일이다. 그 소망은 아직 마음속으로만 간직한 채, 대신 집안에 있는 3단짜리 선반이 계속 그 실험대상이 되어주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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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점에서 만난 장면들


거실에서 책을 집어 드는 장면의 서점,

Life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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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사적인 서재를 방문한 기분,

백년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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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긴 테이블을 가진 작은 서점,

thanks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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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 방에 차려놓은 서점(?)의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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