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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n Jan 01. 2021

방을 여행하는 시간들

여행지와 출장지의 방들  |  New york, Copenhagen


  여행지와 출장지에서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밤, 그때부터는 방을 여행하는 시간이 된다. 도착한 날의 밤, 이 방은 어딘가 불편하고 낯선 공간이었다. 다음 날 아침, 하얀 이불이 돌돌 말려 헝클어져있는 모습만으로 이곳은 하룻밤 새에 이 도시에서 안락하고 안전한 나의 방이 되어 있었다. 그런 안락한 풍경을 뒤로하고 나섰던 하루 일과를 마치고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이후의 시간들, 다시 돌아온 방 안을 여행하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코펜하겐의 거실

Copenhagen, 2019


  도심지 한가운데의 좁은 호텔방, 외곽에 위치해있던 작은 스튜디오 플랫에 이어 이곳은 여행지의 세 번째 집이었다. 이곳은 STAY라는 이름의 서비스드 레지던스로, 호텔식 아파트와 같은 곳이다. 거실과 부엌, 그리고 방으로 된 온전한 침실을 가지고 있는, 집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여행지의 방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면 작은 전실이 나왔다. 신발장과 보일러실, 욕실과 면해있는 그 복도의 끝에는, 막다른 벽이 있어서 침실로 들어가는 문이 나 있었다. 두 벽이 만나는 코너에는 3개의 발을 가진 옷걸이가 서있었고, 거기서 왼쪽으로 틀면 거실과 다이닝, 부엌이 합쳐진 커다란 공간이 나왔다. 벽으로 구분되어있지는 않지만 가구와 러그, 조명이 각 공간의 가장 적절한 지점들에 놓여있어, 그것들의 존재감으로 인해 부엌과 거실의 경계가 생겨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밤마다 방 안을 여행했다. 밖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저녁 혹은 밤, 그때부터는 방안의 사물들을 탐험하는 시간이 되었다. STAY의 아파트들은  hay가 협업해 디자인한 것으로, 집 안이 오리지널 가구와 조명들로 채워져 있다. 내가 본 것들은 hay와 vitra의 가구들, flos와 menu의 조명, vipp의 욕실용품, jopephjoseph의 주방도구와 같은 것들이다. 이 물건들은 기능적으로도 충분한 동시에, 우아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일상의 장면을 채우는 근사한 것들이다. 그 물건들을 가까이 곁에 두고 쓰는 일은 호텔이 가져다주는 비일상의 장면들과는 또 다른, 집만이 가질 수 있는 사적인 순간들이었다.


방을 여행하는 시간의 기록. 코펜하겐의 아파트


  거실과 부엌, 발코니와 침실의 물건들을 뒤적거리며 집안을 탐험해 다녔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의자 밑바닥에 적혀있는 라벨을 읽어보려 하면서, 거실 바닥에 깔려있던 러그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짜임새를 닮아있어 그것이 맞는지 확인해보려고 뒷면을 들춰보면서. 요리를 할 건 아니지만 부엌 찬장을 열어 조리도구들을 모두 꺼내보며 수선을 떨기도 했다. 아름다운 물건들의 반경 속에서 생활하는 기분은 어떤 것인지, 훗날 이 가구를 집에 들인다면 내 일상과 잘 맞을지, 방 안에 러그가 깔려있으면 어떨지, 이 조명을 나중에 집에 들인다면 어떨지 생각했다. 그 물건들을 발견하고 만나보면서 일상을 미리 상상해보는 시간과도 같았다.


  내가 거실을 여행하면서 발견한 것은 vitra의 장 프루베의 의자와 임스 체어, hay의 mag소파와 slit 테이블, 덴마크의 어떤 로컬 브랜드인 듯 보였던 러그, 몸이 폭 감기는 커다란 이지 체어와 그 곁에 함께 서있는 Flos의 Toio 플로어 램프와 같은 것들이었다.


거실을 여행하며 발견한 것들


  낯선 동네를 탐험하다 어둑해지면 방으로 돌아와 그 다음 날을 기약하는 밤과 아침 사이의 시간은, 어쩌면 여행을 통틀어 가장 반갑고 기다려지는 시간들이다. 방에서 보내는 그 시간을, 가끔은 밖에서 보내는 시간보다도 내심 속으로 기다리기도 했다. 여행지에서 유일하게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시공간이기도 했고, 여행해야 할 또 다른 대상이기도 했다. 그래서 매 여행을 앞두고 가장 중요했던 일 중에 하나는, 그 내밀한 시간을 염두에 두고서 그 안을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방을 신중히 고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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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발코니

New york, 2020


  이곳은 올초에 뉴욕으로 출장을 갔을 때 묵었던 방이다. 이른 아침부터 일행과 만나 아침을 먹으러 가는 것으로 시작해, 긴 미팅 일정을 마치고 저녁식사와 술자리를 끝낸 뒤 몽롱해진 채 호텔방에 도착하는 시간은 이미 꽤 깊어진 밤이었다. 내가 혼자 보낸 유일한 시간은 시차 때문에 일찍 눈이 떠진 새벽부터 한식당으로 아침밥을 먹으러 불려 나가기 직전까지, 그 새벽과 이른 아침 사이에 매일 방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새벽 4시쯤 눈이 떠져서 잠이 오지 않았다. 전날 늦은 저녁을 먹었던 공간이 잔상에 남아있어 한동안 침대에 엎드려 스케치북에 기록을 남겼다. 그러고 나니 동이 트기 시작해 밖을 보려고 커튼을 걷고 테라스로 나갔다.


  그때 뉴욕이라는 도시의 장면을 처음 만났다. 여행을 다니고 외국에 나가 살기도 했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에 가는 건 왠지 커다란 숙제 같은 마음이 들어 그 세계의 문을 열어보는 것은 매번 다음번으로 미루게 되었다. 그러다 출장지로 간 그곳에서 처음으로 도시와 만나게 된 순간이 그날 아침의 발코니에서였다. 지난밤에 본 것이라곤, 늦게 주문이 되는 식당을 찾아 헤매며 건물의 비계들 아래에서 보았던 어두운 길바닥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런 도시의 밀도를 본 적이 없었다. 4차선의 도로를 골목길로 만들어 버릴 만큼의 높이와 밀도와 위용을 가진 고층 건물들. 그 건물들이 가진 클래식 하거나 단단하고 매끈한 창들과, 때때로 그 안에 들여다보이는 삶의 장면들. 몇몇 건물의 굴뚝에서 내뿜는 하얀 연기가 1월의 공기 속으로 계속해서 사라지는 장면을 홀린 듯 멍하니 보았다. 그 고층 건물들 중 하나에 불쑥 튀어나와있는 발코니 위에서 서 있자니, 도시를 밟고 서있는 유일한 사람이 된 듯한 이상하고도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묵었던 방 안은 한쪽이 도시를 면하고 있는 창이었다. 발코니로 난 창문을 열고서 겨울 공기를 방안에 들였다. 그리고 이불속으로 다시 들어가 누웠다. 방으로 차가운 겨울 공기가 밀려들어오기 시작하니 발코니와 침대가 연결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다음 날도, 다음 날도 하루 일과가 시작되기 전 이른 아침에 발코니에 나갔다. 그 시간은 내가 유일하게 혼자 여행한 시간인 동시에, 방에서 도시의 장면을 여행할 수 있는 가장 고요하고도 근사했던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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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방에서 여행한 시간들


코펜하겐의 아파트

STAY Seaport, Copenhagen,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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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방의 발코니

Mondrian Park Avenue, New york,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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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행한 다른 이국의 방들의 기록 :


- 피렌체의 셋방

- 집과 호텔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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