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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n Dec 25. 2020

여행지의 식탁

여행지의 조식 공간들-2  |  Florence, Siena

  여행지의 식탁에는 그 도시를 탐험한 결과물이 오른다. 시장에서 산 올리브 절임과 이국의 과일들, 마트에서 포장지의 그림만으로 그 맛을 유추해보던 요거트, 동네 빵집을 돌며 얻은 그날의 수확물들이 식탁에 오른다. 식료품점 몇 군데를 돌며 아티초크 병절임을 찾아 헤맨 건 어떤 책에서 읽은 문장 때문이었다. 아티초크의 맛과 식감을, 나는 책 속의 텍스트로 배웠다. 여행지의 식탁은 그동안 탐해왔던 그런 작은 낭만들을 차려 놓는 곳이다. 그 식탁을 갖기 위해서 호텔에 묵는 대신 그 도시의 집을 빌린다.


피렌체의 작은 부엌 (2016)


  피렌체의 작은 부엌에서 4일 동안 아침을 차려먹었다. 며칠 동안 어떤 집을 빌려서 머무는 것은 그 도시에 사는 이의 기분을 내볼 수 있는 기회다. 혼자 먹을 요리를 하기엔 식재료를 남길 것 같아서, 대신에 외출하고 돌아올 때마다 아침과 저녁에 먹을거리를 시장에서 부지런히 사다 놓았다. 한번 먹으면 끝이 나버리는 1인분의 음식 대신에 이국의 시장에 가면 항상 탐이 났던 것들을, 호텔방으로 가져올 수 없어서 눈에만 담아왔던 것들을 매일 아침 식탁에 차렸다.


  항아리 안에 담긴 윤기가 흐르는 절임 음식들, 생전 처음 보는 여러 가지 종류의 치즈들, 탐스러운 살라미와 프로슈토 같은 것이 그런 것들이다. 굳이 요리를 하지 않아도 그 정도면 집의 기분을 내기에는 충분했다. 시장에서 사 온 각종 절임들을 쟁여두고서 먹고 싶은 만큼 꺼내어 먹는 건 작고 소중한 행복이었다. 그 날 시장에 가서 산 것은 썬드라이 토마토, 블랙 올리브 절임, 깔라마리 샐러드, 그리고 과일 가게를 몇 바퀴를 돌아서 신중히 골라온 무화과, 납작 복숭아와 자두였다. 낮에 먹고서 반했던 프로슈토와 주황색 멜론 슬라이스도 한팩 더 집어 들고 집으로 왔다. 이것들을 마치 반찬처럼 집에 채워두고서, 아침으로는 그날그날마다 메인이 되는 음식을 바꿔서 함께 먹었다. 어떤 날은 빵을 사다가, 어떤 날은 전날 먹고 남은 피자를 팬에 데웠다. 작은 모카포트에 처음으로 커피를 내려 마셔본 것도 이 작은 부엌에서였다.


  거실에 나있는 작은 문지방을 통과하면 좁은 부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공간 안에선 그리스나 터키의 어느 작은 부엌에 들어온 것 같다는 상상을 했다. 사방의 벽면에 파란색 꽃무늬가 그려진 작은 타일이 붙어있었고, 작은 창문을 통해 아침마다 햇살이 비쳐서 그 안이 비현실적으로 환하게 밝아졌기 때문이다. 그 낮고, 길고, 좁은 부엌 안을 구성하는 사물들은 뚜껑을 닫아놓을 수 있는 가스레인지와 작은 싱크대와 세탁기, 나무 작업대가 전부였다. 머리 위에는 흰 벽 선반이 걸려 있었고 그 위에는 작은 모카포트와 커피가루를 놓아두았다.


  이곳은 내가 처음으로 여행지에서 묵은 이방의 집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집속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들이 많아, 그 시간이 낭만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오히려 조금 후회했었다. 한참이 지나고 조금 먼발치에서 그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다시 생각했다. 그때 왜 그리도 이국의 집을 여행하는 것에 온통 사로잡혀 있었던 것인가 하고.


  여행지에서 내가 만들고 싶었던 어떤 순간들이 있었던 것 같다. 시장에서 일상처럼 장을 보듯 뭔가를 사보는 일, 그곳에서 산 음식들로 식탁을 차리는 일, 길가에 서있는 커다란 건물들의 웅장한 대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는 비밀스러운 순간, 항상 궁금했었던 오래된 건물들의 창 너머의 세계로 들어가서 하루를 살아보는 일. 여행지의 집과 식탁은 나에게 그동안 품고 있던 작은 낭만들의 무대와도 같았다.



시에나의 룸서비스 (2016)


  시에나에 다시 가게 된 건 오래전 배낭여행에서의 벅찬 기억 때문이었다. 피렌체에 묵는 동안 기차를 타고 와서 잠시 돌아볼 생각으로 별 기대 없이 도착한 시에나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시공간처럼 느껴졌다. 도시는 고요하고 차분했고, 따뜻한 색의 건물들 사이로 난 좁고 미로 같은 무수한 길들을 가지고 있었다. 오직 걸어서만 닿을 수 있는 그 작은 길들을 따라 아틀란티스의 소녀라도 된 기분으로 도시를 탐험해 다녔다. 작은 샛길이 너무 많아서 지도에서 내가 서있는 곳을 찾기도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길을 잃었다 찾았다 하면서 걸었다. 그러다 어떤 길의 끝에서 앞이 뻥 트이면서 조가비 모양의 광장이 눈 앞에 나타났다. 오래전 학부에서 입문 수업을 들을 때에 연필로 스케치를 그려내는 과제를 하느라 자세히도 보아야 했던 그 광장이 거짓말같이 눈 앞에 있었다.


  그 광장을 만난 비현실적인 순간의 기억이 나를 시에나로 다시 데려온 것이다. 그런데 다시 온 이곳은 예전의 고즈넉함은 사라지고, 깃발을 들고 줄지어 다니는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어서 길을 지나다니기도 버거운 것이 아닌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을 뻔한 기억을 들추어내서 오히려 서글퍼졌다. 조가비 모양의 갈색 광장을 처음 마주한 건축적 순간의 벅찬 기분을  잊지 못해서 나는 그 탑이 보인다는 작은 방까지 얻었는데 말이다.


  시에나 광장을 빙 둘러싸고 있는 비싸고 좋은 호텔들이 끝나는 바로 그 지점, 그 광장의 조개껍데기 모양이 끝나는 곳에 나의 방이 있었다. 우뚝 솟은 탑의 옆모습이 신기하게도 창문 너머로 정확히 보였다. 이 곳은 예약할 때에 호텔이 아닌 레지던스라는 이름으로 되어있어 조금 저렴했는데, 오픈한 지 얼마 안 되어 후기도 없어서 의심스러운 점들이 조금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오직 광장으로 차있었고 혹시라도 변수가 생기면 다른 숙소를 찾아봐야지 하는 마음에서 일단 예약을 했다. 말은 레지던스였지만 방안은 부엌 없이 침실과 화장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오래된 건물을 약간 고쳐서 만든 몇 개의 방들이 전부인 듯해 보였다. 체크인할 때에 건물 안에 식당이 없다고 들었다. 대신에 아침식사를 방으로 가져다줄 테니 종이를 한 장 건네면서 내일 아침에 먹을 메뉴를 체크해서 달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서는 내일 아침에는 메마른 빵 조각과 커피 한잔 정도를 건네받겠군 하고 생각했다.


  지난밤에는 바깥에서는 무슨 노래자랑이라도 하는 모양인지, 초저녁부터 저녁시간 내내 소음 때문에 괴로운 밤을 지새웠다. 그 소음이 멈춘 늦은 저녁에 잠시 나와서 식료품점에서 피자 한 조각을 사서 우물거리고난 뒤 광장 바닥에 잠시 누워보았을 뿐이다. 다시 온 시에나는 뭐하나 좋았던 것을 떠올려보기 어려운 순간들뿐이었다.


  아침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기에 문을 열었다. 중년의 아주머니가 두 팔을 한껏 벌려서 커다란 투명 트레이를 들고 기쁜 표정으로 서있었다. 그 위에는 내 아침식사가 가득 들려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아주머니에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아주머니는 내 방으로 들어와 하얀 식탁보가 깔려있는 테이블 위에 아침식사를 놓아주고 갔다. 갑자기 예기치 못한 순간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시에나의 방에서 먹은 조식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저렇게 커다란 투명 트레이는 맞춤 제작인 것일까 하는 사사로운 궁금증부터 시작해서 (식탁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크기였으므로...), 저렇게 많은 식기가 올라갔는데 어떻게 들고 왔을까 하는 걱정 등등... 단출하고 어딘가 허술해 보였던 이 숙소에서 괜찮은 아침식사가 방으로 찾아온 것에 놀랐다. 음식의 가짓수는 단출했지만 하얗고 단정한 식기 들위에 놓인 아침식사가 어딘가 클래식하고 정갈해 보였다. 마침 테이블 위에 햇빛이 비스듬히 떨어지는 시간이었는데, 하얀 식기들 위에 우아한 아침 빛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그 모습이 더 극적으로 보였다. 특급 호텔의 조식에 비할바는 못되지만, 나는 방 안에서 충분히 근사한 아침시간을 가졌다. 시에나의 방은 내게 근사한 아침 식탁의 순간이었다.



——


피렌체의 식탁

2016. 09


전날 저녁 먹고 남은 마르게리타 피자 한 조각을 팬에 굽고, 시장에서 산 썬드라이 토마토, 올리브 절임과 먹는 아침


작은 문지방을 통과하면 나오는 낮고 길고 좁은 부엌의 세계


철이 지났지만 아쉬운 마음에 납작복숭아, 무화과와 자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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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나의 식탁

2016. 09


시에나의 방


방에서 먹은 아침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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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의 조식 공간들-1


피렌체의 작은 방에 대한 기록 :

피렌체의 셋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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