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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shimaro Aug 19. 2021

싸이코(Psycho)

고전작에 대한 편견

(spoiler, 구체적이진 않음)


 나름 영화를 취미생활로 즐기고 있는 사람인데 고전 작품에 손을 대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있었다기보다는 지금도 있다. 내가 본 고전작이 당장 떠오르는 게 <시네마천국>, <빽 투 더 퓨쳐>, <에이리언>... 이 정도인데 이 영화들도 뭔가 영화인으로서 안 보면 안 될 작품들이라 생각해서 손을 댄 케이스였다. 물론 그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저 시대에 이 정도로 훌륭한 영화를 만들 수 있구나'를 느낀 영화들이라 그런 듯 하다. 근데 사실 요즘 영화들은 과거에 비하면 시각적인 효과를 많이 집어넣어 관객의 재미와 몰입도를 더해주고 있다. 예로, 몽둥이로 사람을 때리는 장면이 예전에는 대놓고 때리는 시늉을 했다면, 요새는 진짜 맞거나 진짜 맞듯이 촬영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최대한 실감나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데, 영화의 발전이 만들어낸 관객들의 눈높이를 쫓아가려는 모습으로 보인다.

 이 높아진 눈높이를 가진 사람이 나였다. 워낙에 SF물이나 액션, 판타지 영화를 즐겨보는 나로선 해당 장르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그 경지가 펼쳐지지 않는 이상 만족감이 덜했다. 대사나 영화 자체의 흐름은 요즘 영화들이랑 다를 게 없지만, 흑백이라는 점과 부자연스러운 동작들이 내 눈에 들어온다면 몰입도가 떨어질 거라 생각한 것. 그래서 오래 전에 개봉한 영화들이 아무리 유명하고 스토리 좋고 해도 손이 잘 안 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습관성 '보고 싶어요' 표시가 만들어낸 우연적인 선택에 걸려버린 영화가 있었는데, 무려 1960년, 부모님이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ㅍ싸이코> 아니, <싸이코>였다.


<싸이코>의 오프닝 크레딧

 눈에 들어오긴 했는데 막상 고르고 나니 또 잠시 망설였다. 근데 그 망설임도 잠시, 왓챠에 새로 도입된 서비스 중 하나인 '같이보기'가 갑자기 떠올라 새벽 2시에 누군가 같이 봐주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며 10분 전부터 방을 열어놓고 기다렸다. 다들 나랑 같은 마음이었는지, 늦은 시각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명작이라 이미 본 사람들이 많아서 그랬는지, 10분이 지났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길래 그냥 봐야겠다 싶어서 재생을 누르려는 순간 한 분이 들어오셨다. 뭔가 입장하면 시작하겠다고 마음 먹었던 사람처럼 그렇게 이 영화가 시작됐다. 이 분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묵묵히 함께 봐주셨다. 끝나고 "잘 봤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퇴장해주셨다. 암묵적인 감사를 표했다.

 시작하자마자 몰입도를 확 높여준 요소가 있었으니, 바로 오프닝 크레딧 연출이었다. 뭔가 굉장히 단순해 보이면서 이렇게까지 크레딧을 눈 한 번도 안 떼고 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매우 집중했다. 거기에 더해지는 경쾌한 음악 역시 힘을 실어줬다. 특히나 오프닝 크레딧 같은 경우 요즘 영화들과 차이를 둔 점이 배경이나 각종 연출들이 들어가면 정작 크레딧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떨어지고 화려함만을 남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대표하는 영화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이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크레딧과 동시에 앞으로 보여질 내용을 부분부분 보여주면서 사실상 부분 스포를 가장한 크레딧을 묘사하는데, 반면 <싸이코>는 영상 효과들이 크레딧을 가려가면서 감각적인 연출에 힘을 쓴 것처럼 보이지만 <미션 임파서블>과는 다르게 검은 배경화면을 넣음으로써 오직 크레딧 하나에 집중할 수 있게 연출하였다. 마치 오프닝 크레딧의 이상적인 정석을 보는 듯 했다.

주연...인가 아닌가

 뭔가 주연인듯 주연아닌 주연같은 마리온 크레인(자넷 리)이 그녀의 남자친구 샘과 함께 영화에 처음 등장한다. 영화의 초반부부터 라일라 크레인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가며 쭉 끌고 간다. 그러면서 비중을 굉장히 높이는데, 무려 40분동안이나 그게 지속된다. 물론 30분 정도부터 노먼 베이츠(안소니 퍼킨스)와의 구도가 생기긴 하지만, 주연의 위치가 바뀌지 않으면서 공동 주연으로 그 구도가 지속될 줄 알았다. 이미 영화 자체가 마리온 없이 흘러가기에는 무게감이 상당해져 버렸기 때문. 근데 그냥 가차없다. 샤워하는 도중에 누군가의 손에 죽게 된다. 공들여 쌓아 놓은 모래성 하나를 손날로 쳐버린 느낌?

 그러면서 엄청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노먼 베이츠라는 이름의 모래성이 쌓이기 시작한다. 난 여기까지도 속았었다. 어차피 유력하게 묘사된 인물은 노먼과 그의 엄마 뿐이고, 죽임을 당하기 전까지 그냥 수상하다 이 뿐이었지 노먼이 죽이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모텔 뒤쪽 저택에 사는 노먼의 엄마가 마리온을 죽였고, 그걸 발견한 아들 노먼이 살해 현장을 정리하는 그런 그림. 그냥 누가 봐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만 했다. 이렇다는 것에 확신했던 게 바로 두 번째 희생자, 밀튼 아보가스트 탐정(마틴 발삼)이 저택에서 죽임을 당할 때였는데 그 때는 마리온이 죽임을 당할 때보다 노먼의 엄마가 좀 더 묘사되어 등장한다. 목소리에, 복장에, 행동까지, 그냥 의심을 할 여지가 없었다. 물론, 어떻게 생겼는지는 보여주지 않았다.

'주연' 안소니 퍼킨스

 돌아온다는 탐정이 돌아오지 않자, 마리온의 언니인 라일라 크레인(베라 마일즈)과 그녀의 남자친구 샘 루미스(존 게빈)는 모텔로 직접 찾아 나선다. 이 때 즈음에 묘사된 노먼과 그의 엄마와의 대화 및 행동이 영화가 끝나고 보니 정말.. 소름이 돋는 요소였다. 영화를 볼 때는 막상 몰랐다. 그들이 올 테니 지하에 숨어 있으라는 아들의 말을 엄마가 화를 내며 싫다고 하지만, 끝내 아들이 엄마를 업고 지하실로 내려가는, 그냥 단순하게 받아들이기 쉬운 장면이었는데 어찌보면 대단히 치밀한 연출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첫째로, 여기까지 진행됐는 데도 불구하고 노먼의 엄마라는 존재가 있다고만 계속 보여줄 뿐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관객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둘째로, 둘의 대화가 단 1도 겹치지 않았다는 점을 볼 수 있었는데, 분명 아들의 제안을 거절하는 엄마의 입장으로 보나 지하실에 숨어 있으라고 설득하는 아들의 입장에서 보나 둘 다 말다툼을 하는 긴박한 구도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마디도 겹치지 않았다. 셋째는 결국 엄마를 강제로 들고 내려가는 노먼의 뒷모습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탐정을 죽일 때 보여주었던 그런 민첩함을 봤을 때 움직임에 불편함이 없어보였던 엄마가 아들이 들고 내려갈 때 단 한 번의 움직임(발버둥 같은)이 없었다는 점, 모두가 나중이 돼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 모습들이었다.

 샘과 라일라는 샘이 모텔에서 노먼의 시선을 끌 동안 라일라가 모텔 구석구석을 조사하는 그런 시나리오를 진행했는데, 라일라가 저택에 들어서고 나서 보여지는 여러가지 요소들이 영화를 슬슬 풀어가고 있었다. '이건 왜 있지?', '이게 뭘까?'라고 히치콕 감독이 하나하나 보여주는 요소들은 친절하면서도 어려웠다. 근데 그 많은 요소들 중에 다른 건 이해 못 해도 매우 이해하기 명확했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침대였다. 정말 몇년동안 누워있던 자국처럼 매우 선명하게 침대가 사람 체형대로 파여 있었다. 이 장면에서 나도 살짝 눈치를 채기 시작했던 것 같다. 

우앗

 샘이 시선을 끌고 있는 것이라는 걸 눈치챈 노먼은 라일라를 찾으러 저택으로 향하는데, 그 모습을 본 라일라는 숨기 위해 지하실로 향한다. 노먼은 라일라를 찾기 위해(엄마가 되기 위해) 위층으로 향한다. 지하실에 도착한 라일라는 노먼의 엄마로 추정되는 사람의 뒷모습에다가 말을 걸기 시작하는데, 결국 엄마는 죽은 사람이었고, 갑자기 저렇게 짠! 하고 변장한 노먼이 등장한다. 사실 너무 방심하고 있었던 탓인지 그냥 정자세로 소름을 느끼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속으로 '당했다...'를 외쳤다. 근데 결국 샘에게 제압당한 노먼은 체포당하고 만다.

 그 후 정말 매우매우 친절하게 노먼이라는 인물 자체를 쭈욱 해석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를 볼 때 당시에는 너무 친절한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미 보여줄 거 다 보여줬는데 굳이 설명을 해야 됐을까. 근데 이건 그 때 당시 사이코패스를 주제로 한 영화가 거의 없었기에 그렇게 설명을 덧붙인 걸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이코패스 자체가 어쨌든 사람이긴 하지만, 1960년은 지금만큼 사이코패스라는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이기에 부연설명을 집어넣어 판타지가 아닌 오직 스릴러, 공포 장르의 개연성 있는 영화라고 알려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 때 당시 이 장면을 봤다면 지금 본 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갖지 않았을까.

익숙한 장면과 BGM

  영화는 노먼의 썩소를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지금 봐도 영화 자체가 식상한 주제고 어설퍼 보여도 연출이나 촬영 기법이나 음악 선택이나 매우매우 우수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나 경쾌한 바이올린 소리와 함께 마리온이 죽는 장면은 지금까지도 엄청나게 유행하고 있을 정도로 임팩트가 세다. 근데 사실 분위기 자체가 무서웠던 거지, 칼로 찌르는 장면은 심각하게 어색하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 두 가지 감정이 공존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어색함을 분위기로 누를 수 있는 히치콕 감독의 능력을 느꼈다는 것에 다른 감정은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연출하고 싶은 대로 연출했으니, 너네들도 그냥 보이는 그대로 즐겨라라는 메시지를 남기는 듯한 장면이지 않나 싶다.

베토벤 교향곡 제3번 '에로이카'

 하나 더 덧붙이자면, 라일라가 저택 안을 수색하던 장면에서 턴테이블에 걸려있는 <에로이카>라는 음반의 모습도 보여주는데, 이는 베토벤 교향곡 제 3악장에 해당하는 '영웅'교향곡 음반이라고 한다. 왜 이걸 보여줬는지 조사를 많이 해봤는데, 조사 능력이 부족했던 건지 아니면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던 건지 아무리 봐도 이 영화와는 연관성이 없어보였다. 오프닝 크레딧 때 나오는 음악도 아닌 것 같고... 그래서 직접 들어봤는데 음악 자체가 꽤나 길었다. 그리고 나눠진 4악장이 각자 너무나도 다른 특징을 갖고 있었다. 뭔가 이 영화의 흐름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아서 음악의 전체적인 해석과 느낌들을 조합해보니, 영화의 흐름 구도와 많이 닮아있었다. 개인적으로 <싸이코>는 강약조절이 너무나도 잘 되어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전체적인 템포는 매우 느린 편인데, 살해당하는 씬과 같은 때에는 바이올린 소리와 촬영 구도를 섞어 급격하게 템포를 끌어올린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급 잠잠해지는, 이런 패턴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데 <에로이카>라는 곡 역시 경쾌한 바이올린 소리와 강약조절이 매우 큰 특징인 음악인 듯 하다. 각 악장마다 각기 다른 얘기를 다루고 있었고 어떨 땐 느리게, 어떨 땐 빠르게 들려주며 베토벤이라는 작곡가의 재능을 보여준다. 이 영화 역시 이런 독특한 기법을 통해 히치콕의 능력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저택

 엉성한 끝으로, 이 영화를 해석하기보다는 단순하게 평소에 갖고 있던 편견 하나를 깨기 위해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해석하기 위해서는 사전적인 지식 등을 토대로 더욱 깊이 조사를 해 봐야 하나, 이 영화는 히치콕의 마인드대로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조사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영화가 끝나고 나서 다시 중반부로 돌아가 노먼의 행동들을 곱씹어봤을 때의 그 끄덕임들만을 간직할 수 있다면 그거로 됐다고 본다. 

 최종적으로 <싸이코>가 나에게 던져준 메시지는 고전작에 대한 '편견'을 깨야 한다는 신념 하나를 가지라는 것이다. 고전작이 늘 나에게는 기피하는 영화이자 기대되지 않는 작품이라고 여겨졌지만, 이 영화 하나로 고전작은 고전작만의 매력이 엄청나고 심지어 근래에 나온 영화들에 비해 뛰어난 부분도 많다는 것 역시 상기시켜 줬다. 이 영화도 흑백이 아니었다면 이 정도의 공포감이 있었을까 싶기도 했다. 고전작도 어찌보면 한 시대를 타고 나온 영화이고, 다른 모든 것들이 바뀌어도 작품 세계 연대기에는 각각의 매력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1930년대에 개봉한 걸로 기억되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도 재밌게 볼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깊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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