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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shimaro Mar 16. 2023

디태치먼트(Detachment)

떼어냄과 무심함

(spoiler)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인생작이 무엇인가에 질문에 대한 대답을 늘 지니고 다닐 확률이 높다.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본인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을 그렇게 여길 것이다. 나의 경우는 좀 다른데, 물론 인상 깊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지만 뜻깊은 영화였다고 생각하여 인생작으로 남겨놓는 작품이 하나 있다.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무관심'이라는 뜻을 가진 제목을 가지고 있는 <Detachment(2011)>, 디태치먼트이다.

 이 영화가 나에게 그렇게 남아있는 이유를 몇 가지 나열해 본다.



1. '애드리언 브로디(Adrien Brody)'



 <디태치먼트>를 보기 전에 이 배우를 접한 작품이 없다고 생각했다. 대중적인 배우라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기도 했고, 8~900편 정도 되는 나의 짧은 영화 감상 경력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여겼다. 근데 찾아보니 나오미 왓츠가 주연으로 나왔던 <킹콩>에 나왔다고 했다. <킹콩>도 거의 개봉하고 얼마 안 돼서 봤기 때문에 오래되기도 했고, 지금만큼 영화에 관심을 가지면서까지 본 게 아니었기 때문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찾아보니 꽤 비중 있는 역할로 나왔더라.

 평소에는 참 유머러스하면서 젠틀한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이다. 그러나 영화 촬영만 들어가면 있는 힘껏 우울한 마스크를 무기 삼아 연기를 하는 듯하다. 어느 면에서 보면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다. 특히나 이러한 특징이 <디태치먼트>에서 드러나는데, 영화 자체가 밝은 분위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데 이에는 주연인 애드리언 브로디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배우 하나가 영화 자체에 끼치는 영향력이 엄청났다는 것인데 그의 목소리적인 분위기도 그랬지만 슬픈 얼굴이 한몫했다.

 사실 한 작품만 보고 출연 배우의 팬이 되기가 힘들다. 실제로 나도 이 작품 이후로 애드리언 브로디가 나오는 작품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해 보니 <디태치먼트>에 나오는 애드리언 브로디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물론 배역 자체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도 있었지만 그냥 여기서 연기하는 배우 자체가 좋은 쪽이 더 맞는 것 같았다. '애드리언 브로디'라는 배우에 대한 발견도 있겠지만 <디태치먼트>의 '애드리언 브로디'라는 배우를 알 수 있었던 뜻깊은 시간이었다.


2. 분리, 무심함


 'detach'라는 단어가 'attach'의 반대말로 '떼다'의 뜻을 갖고 있었기에, 명사형인 'detachment'는 '분리'라는 뜻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찾아보니 '무심함'이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attachment'는 '애착', '믿음'이라는 뜻을 지닌다. 개인적으로 단순히 분리, 접촉, 이런 단어들보다는 그 단어의 의미가 사람의 감정 상태로 확대되어 그렇게 굳어진 것으로 추측해 본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영화는 '분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고, '무심함'으로 받아들여도 되고, 나의 생각같이 연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도 된다고 보인다.

 


 그럼 이 영화에 적용된 '분리'와 '무심함'은 무엇일까?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는 만큼 이 영화에서도 역시 연쇄적으로 발생한다. 또한 한 사람뿐만 아닌 주변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Detachment' 상황을 보여준다. 그로 인해 처해있는 상황, 혹은 처하는 상황을 보여주며 이를 극복하거나 더 깊은 곳으로 빠지거나, 극과 극의 상황을 보여준다. '분리'와 '무심함'의 순서는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데, 필자는 애드리언 브로디가 연기한 교사 헨리 바스의 자라온 환경으로 인해 '분리'를 먼저 생각해 본다.

 너무 어린 나이부터 부모의 가르침과 보살핌 없이 자라왔던 헨리 바스였다. 자주 묘사되는 과거의 모습에 아버지의 모습은 일찌감치 보이지 않았고, 어머니마저도 죽은 모습으로 자주 비춰진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온 헨리 바스가 교사가 되어 사람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있다. 부모의 영향이 없이 자라온, 스스로 삶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선택해 온 그였기 때문에 타인과는 다르게 본인만의 가치관이 명확한 사람으로 굳어져있는 것으로 이 영화에 묘사된다. 그런 그에게 나타나있는 모습은 감정상의 '무심함'이었다. 문제아들이 많은 이곳에서 수많은 교사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 새로이 배치된 헨리 바스는 그런 아이들에게 무덤덤한 '무심함'으로 일관한다. 특이한 건 무심한 건 있지만 무관심은 아니었다는 것. '가르침'이라는 교사로서의 역할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꾸준히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도 그의 남다른 수업 방식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후반부로 가면 존경의 대상으로 바뀌게 되는 변화까지 이끌어내게 된다. 어찌 보면 '무관심'이 선사하는 선한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헨리 바스라는 인물 그 자체는 온전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 살아온 환경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가 현재 처한 환경의 문제도 있었다. 제일 시각적으로 잘 보이는 요소는 치매로 인해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근데 여느 할아버지와 손자와의 관계와는 달리 헨리 바스는 '무심함'으로 할아버지를 대한다. 단순히 헨리 바스의 성격 자체에 대한 묘사가 '무심함'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할아버지와 죽은 어머니가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전제 조건을 깔면 두 가지 해석이 될 수 있겠다. 하나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아는 할아버지, 또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죽음에 관여한 할아버지라는 설정이다.


 

 윗 내용에 대한 몇 가지 추측을 내보자면, 첫째로 '화장실'이라는 공간이다. 영화 내에서 할아버지와 헨리 바스가 처음 만나는 곳이 병원 화장실로 묘사된다. 치매를 앓고 있는 할아버지는 지속적으로 너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며 손자를 만날 때마다 얘기를 하는데, 이를 헨리는 늘 있었다는 일같이 할아버지를 '화장실'이라는 공간에서 끌어낸다. 이렇게 할아버지를 진정시키고 나서 집으로 돌아갈 때 안내데스크 직원에게 그토록 화 안 낼 것 같은 사람이 할아버지를 저렇게 두지 말라고 그렇게 경고했다는 식으로 버럭버럭 화를 내고 귀가하는 헨리 바스의 모습이 묘사된다.

 둘째로, 할아버지의 곁에 늘 있는 비어있는 일기장이다. 헨리가 할아버지를 찾아올 때마다 늘 있는 루틴 중 하나가 바로 이 일기장을 한 번 펼쳐보는 것이었다. 치매를 앓고 있으면서 늘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할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기대를 가질 수 있기에 놓아둔 것으로 보인다.

 셋째로 할아버지의 죽음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헨리의 반응은 매우 덤덤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헨리였지만,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것이었기에 이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알고 있는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에 관여한 할아버지, 이 두 가지 해석을 내놓고 싶은 이유는 헨리의 기억 때문이다. 그의 기억에 나타나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 단서인데, 아들이 자는 시각만 되면 방문을 닫았던 어머니의 모습과, 약과 함께 나체로 화장실에 사망한 채로 발견된 어머니의 모습, 이 두 가지이다. 이를 두 가지 방향으로 해석해 보겠다.


 1)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알고 있는 할아버지

  '화장실'에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할아버지의 외침은 헨리의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것이고, 이런 할아버지를 끌어내는 헨리의 모습은 지속적으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안타까우면서, 그런 모습을 보면 자신의 기억에 지속적인 자극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그가 병문안을 올 때마다 '일기장'을 펼쳐봤던 이유는 치매를 앓고 있는 할아버지였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있지 않을까에 대한 일종의 기대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할아버지의 죽음에 무덤덤했던 헨리의 모습은 결국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있을 수 있었던 할아버지로부터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허탈함 때문이다.


 2) 어머니의 죽음에 관여한 할아버지

 '화장실'에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할아버지의 외침은 밤마다 화장실에서 본인에게 겁탈당하고 있는 헨리의 어머니로부터의 고통의 소리이다. 이런 할아버지를 끌어내는 헨리는 할아버지가 행했던 과거의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이며, 어머니의 소리를 들었다는 그 장소가 어머니가 나체로 죽어 있었던 '화장실'이라는 것이 싫었기에 귀가하면서 할아버지가 다시 저런 행동을 하게 둔 안내데스크에 화를 냈던 것이다. 그가 병문안을 올 때마다 '일기장'을 펼쳐봤던 이유는 혹시라도 할아버지가 본인의 과거에 대한 '반성'을 하고 있지 않은지 확인해 보려는 것이다. 할아버지 스스로가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기억의 일부를 지우고 사는 것으로 의심해 보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죽음에 무덤덤했던 헨리의 모습은 결국 할아버지로부터 어머니에 대한, 그녀의 아들인 손자에 대한 반성을 받아내지 못함에 대한 허탈함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가지 해석이 영화 자체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어찌 됐든 헨리에게는 어머니의 의문스러운 죽음이 있었고 그것을 할아버지로부터 알아내고 싶었던 건 동일하다. 하지만 첫 번째 이유라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자라온 환경에 의한 '무심함'일 것이고, 두 번째 이유라면 현재의 상황에 대한 '무심함'일 것이다.


3. 헨리 바스뿐만이 아닌 모두의 '무심함', 그 속의 '관심' 및 '극복'

 


  <디태치먼트>는 헨리만을 다루고 있지 않다. 주변의 모든 인물에 대한 '무심함', 또는 '무심함'에 처한 사람을 다룬다. 문제아들이 많은 학교는 부모들의 '무심함'이 낳은 아이들의 소굴이 되어있고, 이를 직업상의 문제로 '관심'을 가지고 학생을 대하려는 교사들의 모습을 다룬다. 그러나 이런 교사들도 개개인이 다 다른 '무심함'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려낸다.

 매일같이 철창을 붙잡고 하늘을 보는 기이한 행동을 하며 집에 가면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교사의 모습, 지속적인 학생과 학부모의 행동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교사의 모습, 학교에서 잘릴 위기에 처함과 동시에 남편과의 권태기로 고생하고 있는 교장의 모습까지 모두 일종의 '무심함'에 살아가고 있다. 이는 교사라는 직업이 학생으로 인한 고통, 개인 업무로 인한 고통을 아무도 알아주려 하지 않는 삭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늘 안고 가야 되는 사회적인 문제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이 영화는 동시에 희망의 메시지도 던져준다. 이들이 각기 다른 '관심'을 통해 '극복'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철창 교사는 헨리의 한 마디로 존재감을 느껴 '극복'하게 되었고, 스트레스를 받던 교사는 스트레스 따위 받지 않는 마이웨이의 다른 교사의 위로로 인한 '극복', 그리고 교장은 남편과의 대화로 인한 '극복'을 한다. 영화 자체가 사회의 현실만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닌, '극복'의 방식과 그에는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보이는 요소들이었다.



 이에 좀 더 나아가면 헨리가 우연히 마주친 10대 소녀 에리카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에리카라는 인물 자체에 여태 나온 키워드가 모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디태치먼트>의 모든 것을 담아냈다. 부모의 '무심함'으로 인해 거리로 나와 성매매의 대상이 되어 그것을 돈벌이로 살아가는 에리카에게 헨리가 눈에 들어온다. 물론 그녀가 지내온 생활이 있었기에 처음 만났던 이 둘에게는 마찰이 몇 번 오갔다. 그러다가 천천히 마음을 여는 헨리에게 마음이 이끌렸고, 그의 집에서 생활하며 점점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극복'을 다룬다. 이 소녀를 통해 느낀 감정은 다양하다. 안타깝다는 생각과 동시에 극복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희망을 던져주기도 하고, 비록 타인에 의한 극복이 컸지만 헨리의 손에서 벗어나는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청소년 보호센터에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안도와 행복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영향력이 누구보다 강하게 다가왔을 헨리이기에 후에 밝은 모습으로 다시 조우한 에리카와 헨리의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최고의 명장면으로 생각하고 있다.

 반대로, 이들과는 다르게 '극복'이 되고 있는 과정을 그리다가 갑자기 추락하는 모습을 담은 인물도 그려진다. 헨리의 반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메레디스라는 소녀이다. 물론 메레디스는 위의 경우들과 약간 다르다. '극복'이라는 단어가 타인에 의해 이루어질 수도 있고 본인 스스로의 마음가짐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는데, 메레디스는 후자였지만 헨리를 향한 마음이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오해'의 일종을 마음에 품으며 이를 통해 극복해나가고 있었다. 이는 평소에 따돌림을 당하는 그녀였기에 헨리의 과거와 마찬가지로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하며 자라왔던 것이고, 주변인물들과는 다르게 본인의 취미를 인정해 준 헨리라는 교사에 순간적으로 '관심'이라는 오해를 가지게 된 것이다. 물론 교사로서 학생에 대한 관심이기에 '관심'의 일종이긴 하나, 메레디스에게는 이러한 '관심'을 확대 해석하여 '극복'의 대상으로 삼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헨리를 교사 이상으로 바라보게 되고, 이런 메레디스를 헨리는 거부하게 된다. 이에 메레디스는 실망의 눈물을 흘리고, 마침 이를 지켜본 매디슨에게 학생을 성추행했다는 의심까지 사게 되는 헨리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렇게 바닷물에 위태롭게 쌓여있던 헨리라는 벽이 한순간에 무너진다. 이 장면은 <디태치먼트>의 전환점이자, 헨리와 메레디스에게 동시에 <디태치먼트>라는 색이 덧칠되는 순간이다.

 


 메레디스는 헨리가 얼마나 불완전한 사람이었는지 우리에게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만의 가치관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내면에는 그가 자라온 환경과 현재 처한 환경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것을 메레디스가 꺼내고 무너뜨린 것이다. 그렇다고 메레디스가 민폐 캐릭터로 분류되나?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본인 스스로가 '무심함' 속에 살아간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것을 본인의 취미 생활과 헨리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던 것뿐이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헨리도 큰 변화가 있었다. 그가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리는 과정을 거친다. 손을 내밀어봤자 어떠한 오해와 같은 한 순간으로 한 번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해 버린 그였기에, 모든 것을 무심함으로 일관한다. 에리카를 청소년 보호센터로 보내는 과정이 가장 인상 깊다. 의지의 대상이자 믿음의 대상이 무너지면 그 충격을 본인도 떠안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에리카와 메레디스는 명확히 다른 방향을 보여준다. 내재된 극복의 힘을 '무심함' 속에서도 발현할 수 있는 경우와 '관심'이 없으면 발현하지 못하는 경우라는 것, 극과 극의 모습을 보여주며 아무리 처한 상황이 힘들어도 스스로 극복하는 힘을 늘 갖고 있었으면 하는 감독의 메시지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었다.


4. 마치며


 <디태치먼트>는 '무심함'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끝까지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 의미가 가지는 힘과 영향력을 빠짐없이 직관적으로 보여주면서 강한 색채를 드러낸다. 그렇다 보니 사람에 따라 영화가 표현이 세다고 느끼는 분도 계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가 이런데 어떡하나.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 것뿐인데.

 유독 <디태치먼트>가 와닿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니, 물론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분위기의 영화라는 점에서 신선함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과 감각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영화라는 이유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각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보여주며 사회의 문제점을 보여주었고, 이를 바탕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역시 보여주며 극복의 방식 역시 보여준 점, 그리고 그 반대의 극단적인 상황까지 보여주며 메시지를 명확하게 하는 모습까지 보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4년 전에 처음 봤을 때의 그 충격이 아직도 잊히지 않을 만큼 꽤나 인상 깊었던 작품으로 아직까지 남아있고, 앞으로 이런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을까에 대한 확신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수준까지 만들어놓았다. 정말 만점다운 만점 영화를 본 것 같아 기쁘기도 했다.

 두 번까지는 봤는데 세 번까지는 못 보겠다. 이때의 감정을 다시 느끼기에는 이미 많은 것을 느껴버렸기 때문이다. 서로서로에게 관심 있는 태도로 대하는 사회가 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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