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여름 맛 아삭이 복숭아
시간과 계절에는 냄새가 있다. 새벽 냄새, 일몰 냄새, 봄 냄새, 겨울 냄새. 이른 추석을 지나고 나니 가을 냄새가 물씬 올라온다. 하늘색도 조금 더 푸르러졌다.
엄마는 과일 껍질을 깎는 것을 좀 귀찮아하셨다. 손님이 오는 날이 아니면 집에서 예쁘게 껍질이 깎인 과일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냥 껍질째로 숭덩숭덩 덩어리만 쪼개 주던지 아니면 통째로 던져 주셨다. 배나 참외 같이 껍질이 좀 억센 녀석은 예외였지만 사과는 여지없었다.
복숭아는 그 애매한 경계에 있었다.
우리나라 과일이 비싸긴 하지만 복숭아는 유난히 더 비싼 느낌이었다. 병충해 유입 관리로 생과의 수입도 거의 불가한 과일이랜다. 그러면서도 계절은 얼마나 타는지 1년 중에 딱 여름에만 먹을 수 있다. 그 여름이 이제 저물어 간다.
복숭아는 아삭이파와 물렁이파로 나뉘는데 아무래도 시장에는 물렁 복숭아가 흔하다. 아삭이도 시간이 지나면 물렁이가 되니까. 난 아삭이 복숭아 파였다. 아삭하고 이가 쑥 들어갈 때 치감이 좋았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싱싱한 복숭아 물이 좋았다. 그 향이 좋았다. 풋내가 살짝 감도는 여름의 향이었다.
뜨거운 여름에 트럭 과일 장사 아저씨가 복숭아를 싣고 오면 아삭이 복숭아를 찾아 기웃거렸다. 얼마나 딱딱한가 싶어서 복숭아를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보다 보면 푹하고 들어가 손가락 자국이 남았다. 손자국 낸 과일을 과일 트럭 아저씨한테 들킬까 봐 도망치곤 했다. 그렇게 손가락에 눌린 복숭아는 상품성이 없다. 맛보기용으로 깎이는 게 운명이다.
거 아줌마 복숭아 꾹꾹 누르지 마시라고요~!
<제발 복숭아 손으로 눌러보지 마세요>
그 다음 주 동네에 들어온 트럭엔 커다랗게 쓰여있었다.
20대의 나도 아삭이 복숭아였다.
단단하고 붉었다. 풋내가 났다.
여름의 강렬함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쉽게 다치지 않았고 쉽게 상처 받지 않았었다. 물렁한 복숭아들 옆에서 당당했다. 열정이 가득했고 자신감은충만했다.
술을 마시면 끝장을 봐야 했고 내일 걱정은 내일모레로 미뤘다.
20대의 나도 그랬고 20대의 너도 그랬다.
걔 중에는 조금 먼저 성숙한 친구들도 있었는데 요즘 말로 '진지충'이라고 놀림만 받았었다. 여물어가기에는 놀기 바쁜 우리는 아삭이 복숭아였다.
오늘 나는 또 하나의 계절을 보내며 물렁 복숭아가 되어 간다.
요즘엔 들어오는 손가락을 막을 힘이 없어 쑥 쑥 받아들인다. 상처도 잘 받고 상품성도 날이 갈수록 떨어진다. 물렁물렁한 게 내 취향에도 안 맞으니 자존감도 20대 같지 않더라.
그래도 우리는 아삭이에게는 없는 풍부한 과즙을 담아가고 있다. '경험'이라고 불리고 '지혜' 숙성시키는 중이다. 숙성 중인 물렁이 복숭아는 쉽게 썩는다. 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나도 썩어버린 복숭아가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꼰대라고 불리는 썩은 복숭아가 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자리를 고쳐 앉는다.
그렇게 2019년 여름아 잘 가라 내년에 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