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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는 여행중 Jan 10. 2019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유모차에 앉다

지난 여행 파헤치기 : 유럽 편 04

이 날의 시작은 런던아이였다. 런던 아이는 남동생과의 이전 여행에서 '이렇게 로맨틱한 걸 너랑 탈 수는 없지. 너도 다음에 여친이랑 타.' 하고 현실 남매를 인증하면서 아껴둔 나만의 아이템이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남편과 율이와 탈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어서 너무나도 기뻤다.


오전 일찍 런던 아이로 가 입장권을 티켓팅하고 제법 차례를 기다린 후 드디어 탑승을 했다. 천천히 돌아가는 크고 투명한 관람차에서 빅벤과 템스강을 내려다보는데, 어마어마하게 큰 런던 관광 엽서를 보는 것 같았다. 같이 탄 각국의 관광객들은 저마다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겼다. 남편이 나와 율이를 카메라로 찍어주고 있는데 옆에서 사진을 찍던 인도계 남자가 우리 셋의 가족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친절한 마음씨 덕분에 런던 여행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가족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한 바퀴 돌아 내려올 때까지 저기가 우리 숙소 쪽인가 봐! 저기가 세인트 폴 대성당인가 봐! 하며 이쪽저쪽을 둘러보며 마치 런던 지리를 다 알기라도 하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런던 아이에서의 즐거운 시간들

런던 아이에서 내려온 후에 근처 일식당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남편이 꼭 가보고 싶어 했던 그리니치 천문대에 가기 위해 시티 크루즈 선착장을 찾았다. 선착장은 런던 아이 탑승구 근처에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탄 유람선은 템스강을 따라 동쪽에 있는 그리니치 천문대를 향했다. 강을 따라가다 보니 테이트 모던, 런던탑, 타워 브리지 등 런던의 유명한 관광지들이 보였다. '시티 크루즈'라는 유람선의 이름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보다 날씨가 더 청명해져, 어디든 카메라만 갖다 대면 그림이었다. 유람선 가장 뒷자리에 앉아 살살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그리니치 선착장에 도착했다.


시티 크루즈를 타고 그리니치로 가는 길에 본 런던탑과 타워브리지! 날씨가 참 좋았다.

그리니치 선착장에서 천문대까지는 많이 가파르지는 않았지만, 해양박물관을 지나 제법 높은 언덕까지 꽤 걸어 올라가야 했다. 이 날 역시 아침부터 내가 율이를 아기띠에 안고 다니고 있었는데, 저 위쪽까지 걸어올라기 전에 좀 쉬고 싶었다. 그래서 막판 가파른 코스가 나오기 전 잠시 휴식을 위해 벤치에서 앉았다. 쉬는 김에 율이에게 유모차에 앉히는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암스테르담을 거쳐 런던에 온 지 며칠이 지났건만, 제대로 유모차를 사용해 본 적이 없어 우리 부부는 한탄하며 '리어카'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들보다는 짐을 올려두는 용도로 쭉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날도 아침부터 가지고는 나왔지만 계속 남편이 밀고만 다닐 뿐, 단 한 번도 율이는 앉지 않았다. 한국에서 새 유모차를 타는 연습을 여러 번 하고 왔는데도 낯선 환경 때문인지 엄마랑 떨어지기가 힘든 것 같았다.

작전 개시. 율이에게 배낭 속에 챙겨 온 바나나를 보여주며 슬며시 "이거 먹을래? 우리 유모차에 앉아볼까?" 하면서 유모차에 앉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울고불고 앉지 않겠다고 하던 때와는 다르게 순순히 유모차에 앉아 바나나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유럽에 와서 처음 유모차에 앉았을 뿐인데,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듯 기뻐서 소리를 지를뻔했다. 남편에게 만족의 눈빛을 한번 보낸 후 이 분위기가 깨질세라 바나나도 주고 물도 주고 과자도 주며 시간을 끌었다. 덕분에 우리 부부도 잠시나마 편하게 쉴 수 있는 호사를 누렸다.


하지만 이 시간이 길게 가지는 않았다. 율이는 어느 정도 간식을 먹고 나자 많이 버텼다는 듯 다시 안으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그때부터는 남편이 목마를 하고 그리니치 천문대까지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올라가는 길에 마주 내려오고 있던 하산객들이 목마 한 아기를 보고 "Hello!!" 하고 귀엽다는 듯 인사해 주었다. 율이는 간식에 배도 불렀겠다,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면서 신이나 컨디션 최고였다.

아빠 목마를 하고 천문대에 오른 율이. 다행히 아빠에게 잘 안겨 있어서 나는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

그리니치 천문대에 도착하자 전 세계의 표준시가 되는 둥근 시계 (The Shepherd 24-hour Gate Clock)가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천문대 정문 기둥 같은 곳에 벽시계처럼 박혀 있었는데, 로마 숫자로 표기되어 있고 하루에 한 바퀴만 돌도록 만들어진 유니크한 시계였다. 기념사진을 찍고 간단하게 안을 둘러보았다. 천문대 건물은 붉은색 계열의 벽돌로 만들어졌는데, 천문대라는 것을 몰랐다면 흔히 유럽 하면 떠오르는 성이라고 추측했을 것 같았다. 천문대 정문 앞쪽의 초록 언덕에는 런던을 내려다보며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이국적인 풍경 속 평화로운 사람들의 모습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았다. 우리도 여기서 무리 속에 섞여 잠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선착장으로 돌아가는 길, 율이는 다시 내 품에 안겨 있었다. 그리니치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장소이듯, 율이도 런던에서 단 한번 이 곳에서 유모차에 앉아보는 역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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