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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고양 Nov 20. 2023

결핍은 때때로 축복이 되어

보라고 쓰는 일기 시즌 2. 이고양 일상 리뷰 (11.15~11.19)


보라고 쓰는 일기 시즌 2는 비정기 일기 형식으로 작성하기로 했어요.

시즌 1처럼 일상 속 이고양의 생각도 담아내지만,

시즌 1과는 다르게 소소한 일상의 기록들도 함께 적어나갈 예정이에요.

그래서 이름은 '이고양 일상 리뷰'.

이따금씩 찾아올게요~



[23.11.15 수요일] 이 세상에 나 이상의 존재는 없다.


홍토끼가 요즘 쇼펜하우어에 빠져있다.

나는 철학을 좋아하지면 쇼펜하우어를 잘은 모른다.

그래서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부분부터 강렬한 문구를 만났다.


'이 세상에 나 이상의 존재는 없다.'


이 얼마나 강렬한 말인가.

누군가의 눈에는 이 말이 오만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전혀 오만으로 보이지 않았다.

쇼펜하우어가 어떤 사람인지는 상관없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 어떤 삶을 살았든, 그 삶이 얼마나 인정받았든 아무 상관없이. 저 말은 타당한 말이다. 아니, 모든 사람이 저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세상에 나 이상의 존재는 없다.

이것은 오만이 아니다.

이것은 자아의 선포이며, 존재의 증명이다.

나보다 뛰어난 존재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나보다 우수한 존재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나보다 중요한 존재가 없다는 말일뿐이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존재는 나 자신인 것이다.

그러니 나의 세상에서 나 이상의 존재가 있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물질적이고 실존적인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나'라는 존재가 관찰하기에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이 세상의 중심은 오로지 나 일수 밖에 없다.


나의 세상을 움직이는 것도 오롯이 나이며

나의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도 오롯이 나이고

나의 세상을 파괴시키는 것조차 오롯이 나의 몫인 것이다.


그러니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나뿐이다.

그 무엇도 나를 상처 입힐 수 없지만, 내가 나를 상처 입히고자 하면 누구든지 나를 상처 입힐 수 있다.

나는 언제든지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지만, 내가 불행하고자 하면 그 누구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


그러니 이런 나에게 나 이상의 존재가 있을 수 있는가?

당연히 없다.

그렇게 알고 살아왔다.


그런데

삶에 단 한 명.

있을 수 있더라.

나에게 있어서 나와 같이 여겨지는 사람이.

삶에 단 한 명. 혹은 만나지 못할 수도 있는. 만나는 것이 천운과도 같은.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더라.





[23.11.16 목요일] 짧은 이야기들


'인간 정신의 정점은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글 사이에서 읽은 말이다.

이 말을 읽는 순간 전율이 일어났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평생을 추구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점이다.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냐 말하는

그런 얕은 말을 하는 이들에게는

하나도 안 멋있는 말이겠지만 말이다.




행복은 종점이 아니다.

인생의 여정을 마친 그 끝에

노력과 수고를 다한 그 끝에

그 종점에 존재하는 것이 행복뿐이라면

그야말로 허무할 따름이다.


종점에 놓인 것이 행복뿐이어서는 안 된다.

행복이라는 것은

종점으로 향하는 그 여정 위에 이미 무수히 놓여 있기에

종점으로 향하지 않더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이기에

그 모든 길 위에서 자연스레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기에

그래서 더욱더 행복이 종점에 있어서는 안 된다.


행복은 노력과 수고의 결과물이 아니라

무언가를 이루어낸 다음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축복과도 같은 것이어야 하니까.


나는 아직 종점에 도달하지 않았음에도 행복하다.

그러니 내가 가려는 그 종점에는

행복이 아닌 다른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23.11.19 일요일] 결핍은 때로는 축복이 되어

 

살면서 종종 느끼는 것은

나에게 당연한 것이 남들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나의 대단함이라고 자만했고

다음에는 그것이 나의 장점이라고 감사했으며

나중에는 그것을 알리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는 오만을 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느끼는 것은

그것은 나의 대단함도, 장점도, 남들에게 알려야 할 진리도 아니었다.

그저 나의 결핍으로부터 태어난 축복일 뿐이었다.


피해의식이 없는 내가 참 올바르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가져야 할 권리를 빼앗긴 것에는 분노하지만

남들은 다 가지고 나만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분노하지는 않는 나 자신을 보며

나는 참 올바르고 도덕적이며 좋은 인품을 가졌노라고 여겼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뿐이었으며

그것은 '공감'의 결여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타인과 나를 동일시 여기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이 누리는 특혜는 나와는 관계없는 것일 뿐이다.

내 권리를 뺏어간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피해의식이 없는 것은 공감의 결여에서 태어난 작은 축복일 뿐이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정신이 나의 신념이라고 생각했었다.

문제를 집단화시키지 않고 개별적 사건으로 구분할 줄 알며

집단에 휩쓸려 이분법적 사고를 갖지 않는 것은 멋진 철학이라 여겼었다.

그렇게 나는 뜨겁다 못해 추악해진 성별분쟁에서도

서로 헐뜯는 것이 정글보다 심한 정치분쟁에서도

영원히 끝날 수 없는 종교분쟁에서도

나는 내가 속하거나 지지하는 집단일지언정 잘못을 비판했었고

나와 반대편에 있을지언정 옳다 생각되는 것은 옹호하였다.

나는 그것이 옳다 여겼다.

그러나 그 중도는 '소속감'이 결여되었기에 가능할 뿐이었다.

나와 집단을 동일시 여기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에 접근할 때 감정이 동요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래서 평생을 자신의 성별로 살아온 사람들이 성별을 이유로 옹호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정치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정당의 잘못에 눈을 가리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고

종교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비판에 분노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의 중도는 소속감의 결여에서 태어난 축복일 뿐이며

그것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그저 또 다른 분쟁의 씨앗일 뿐이었다.


그렇다.

잘 생각해 보면 내가 가진 장점은 또 다른 무언가의 결핍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잘 생각해 보면 내가 가진 결핍은 또 다른 장점의 형태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결핍은 그렇게 때때로 축복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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