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이나 Apr 29. 2020

휴지 사재기를 하는 시절

삶이 힘들 땐 하늘을 보고, 슬플 땐 바다를 가고, 어지러운 시대엔 차를

“코로나 19가 얼른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요즘 제일 많이 나오는 말입니다. 세상이 어수선하여 모두가 이 사태의 종식만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는 요즘입니다. 글로벌 시대답게 스마트폰과 미디어 매체를 통해 실시간으로 질병 정보를 볼 수 있고, 그래서인지 이전보다 더욱 빠르게 공포와 불안한 심리가 사회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실질적인 위협이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만, 이토록 과학과 의료가 발전한 사회에서조차도 신종 바이러스에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에 공포에 떨고 그 결과 마스크나 휴지를 사재기하여, 해외 마트의 휑뎅그렁한 매대 사진이 심심찮게 목격되는 시절을 살고 있습니다. 때는 2020년, 4차 산업혁명을 논하고 있는 글로벌 시대에서 말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여전히 근본적으로 내면의 공포와 분노를 다루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바깥에 나가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스트레스에 짓눌리는 것만이 문제는 아닙니다. 유럽은 매일같이 사망자 수의 기록을 갱신하면서도 아시안을 대상으로 하는 인종 차별과 물리적 폭행을 멈추지 않고, 혐오와 선동의 발언으로 코로나를 언급하길 일삼으며, 공공 시스템과 경제의 붕괴 또한 마찬가지로 불안은 가시질 않습니다. 어수선한 이런 때에 바이러스가 어디서 발생됐는지 책임을 묻는 것보다는 실질적인 행동 방침이 좀 더 효과가 있다는 건 자명한 일입니다만, 인간의 견고한 이성이라는 근대적 환상이 무너진 현대에는 어쩐지 소용이 없어 보이네요.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과연 인류가 그 이전보다 조금 더 발전한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 마련입니다. 인류는 정말로 발전했나요? 질병에 대한 국가 정부들의 대처를 말하는 게 아니라, 당장 눈 앞에 펼쳐지는 이 참담한 현실이 말이지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책임의식 없는 태도, 그 기저에 깔린 차별과 혐오가 여전히 “인간의 당연한 성질”로 적당히 해석된 채로 한 세기를 살아가는 것뿐인가요? 왜 현대인은 신념과 철학이 있던 과거인보다 나아진 게 없는 것 같은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발전이란 뭘까 싶습니다. 더 나아진 인류라는 건 환상이 아닐까 하고요.


그렇다면 이쯤에서 반대로 의문이 듭니다. 사실 인류 전체를 두고 더 나아졌다거나 더 나빠졌다고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건 아닐까요?(물론 우리는 사회를 좀 더 옳은 방향으로 가게끔 하기 위해 정치에 참여하지만요) 그렇다면, 더 낫고 나쁘고 할 것이 없다면, 우리는 지금의 자기 자신을 돌본다는 관점에서 스스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타인을 입맛에 맞춰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이러한 깨달음은 기쁨보다 억겁의 슬픔이 먼저 다가옵니다. 세계가 어떻다고 말하여 보아도, 결국 나라는 사람은 나 하나조차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체념으로 그쳤다면 이 글이 나오진 않았겠지요. 사람은 항상 그다음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어떻게 해야 “나”라도 다잡을 수 있을까? 전체적으로 날이 서있는 폭풍우 같은 사회 속에서 어떻게 해야 휩쓸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일단 차를 끓여봅시다. 이유는 없습니다. 세상을 살다가 난관에 봉착하고 해결책이 없어 보일 때 일단 뭐든 해보는 건 도움이 되니까요. 우선 물을 받고 온도가 올리어 물이 끓으면 소리가 방 안 가득 메웁니다. 펄펄 끓어오르는 김은 하얗고 찻잎은 뜨거운 물속에서 침출 되고 찻잔은 뜨겁고 후후 불어 차를 그렇게 마셔봅니다.

이게 대체 무슨 약팔이인가 싶겠지만 차에는 쉼이 있기 때문입니다. 차가 무엇이라고 의식하지 않는 상태, 그러니까 커피와 대비되는 식음료라든가, 우아한 시간이라든가, 나만의 힐링을 갖겠다는 어떠한 생각 자체를 배제한 상태로서의 차는 그 자체로 휴식의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물을 끓이고 다기를 예열하고 숨을 고르고 차에 집중하는 그 순간에는 세상에는 차와 나만 있는 것 같지만 동시에 나 자신도 잠시 내려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엔 대접하기 위한 누군가도 없으며 보여지기 위한 나 자신도 없기 때문이죠. 그렇게 향 한 숨, 차 한 모금 들이키면 - 그렇네요. 저희는 여기 있지요. 처음에는 잘 모르겠다 싶기도 합니다만,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그런 순간에 빠져듭니다.


이 일련의 과정을 저는 정신수양이라고 부릅니다. 조금 뻔한 대답일까요. 단순히 다도라는 게 원래가 정신문화여서 이런 대답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절차에 따른 것뿐만 아니라 차를 마신다는 행위가 주는 안정감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차 한잔이 주는 “지금 여기 내가 있다”는 감각을 수양이라고 했던 것이라면 어떨까요? 그걸 다도라고 불렀던 거라면 어떨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엄청난 장벽이나 거부감이 누그러지곤 합니다. 저는 차에 도가 있다는 말을 그렇게 해석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어떤 특별한 계층이나 신분 속의 사람만이, 그런 환경 속에서 꾸준히 투자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회가 없었던 탓이겠지요.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인격과 정신을 가다듬는 게 거창한 계획이나 미래를 향한 눈부신 꿈이 있어서도 아니고, 나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저 나라는 사람이 개인으로서 외부 환경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중심잡기라고 생각해본다면, 그리고 차가 그 중심잡기의 지지대가 되어준다면 어떨까요? 마치 살기 막막해질 때 올려다보는 하늘이나, 슬플 때 가고 싶은 바다, 외로울 때 빛나는 달처럼 어떤 땐 위로가 되어줄 수도 있겠죠. 별다른 일이 없는 똑같은 루틴의 하루라고 해도 그날의 차는 매일 다를 것이기 때문에 또 그런 때엔 사소한 즐거움이 되어주겠죠. 차는 그렇게 살아 숨 쉬고 있는 상태를 비춰주는 생의 거울이 되줍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 구절은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의 첫머리는 닦을 수에 몸 신자로 이는 스스로를 가다듬는다는 뜻입니다. 모든 일의 기본은 수신(修身)이 시작이며, 큰 일을 하기 이전에 자신부터 가다듬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보살펴야 할 주체는 세계보다도 우리 자신에게 있고, 그 시작인 몸 신(身)에는 단순히 신체뿐만이 아닌 정신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항상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이미 나와있네요.

그러니 우선 차를 마십시다. 차에 대한 감상을 이런저런 글로 적고 있으나, 결국 아무리 이런저런 말을 해도 결국 한 번 직접 손으로 타보는 것만 못합니다. 그 절차와 형식, 온기와 향기를 나긋하게 따라가며 얻는 평온은 글로는 다 전할 수 없겠지요. 이 불안한 시기에 정신적 중심을 잡는 힘이 되는 한 잔이 되어줄 겁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상에 없었던 말차 입문기(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