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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디캣 Jul 02. 2024

[서울씬기행] 칼국수 집에서 펑크를 듣다

홍대 근처에 위치한 두리반이라는 칼국수집은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2009년 대형 건설사의 재개발로 인해 강제철거를 당한 두리반은 531일이라는 기나긴 싸움 끝에 새로운 영업 장소를 얻어냈다. 이 과정에서 홍대의 인디밴드들이 연대했고 두리반은 공연장으로서 기능했다. 한국대중음악상을 받은 404, 영화감독이자 싱어송라이터인 이랑, 민중엔터테이너로 활동하는 한받, 빠른 비트와 사회성 있는 가사로 인정받은 밤섬해적단, 여성 2인조 펑크록 밴드 무키무키만만수 등 두리반을 거쳐간 인디밴드들의 수는 끝이 없다.

이들은 뉴타운컬쳐파티 51+플러스라는 인디밴드 페스티벌을 열어서 인디 리스너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기획에 참여한 한받, 단편선, 하헌진, 박다함 등은 지금도 아티스트로서 또 인디 기획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 당시의 일은 파티51이라는 인디 영화로도 제작되어 상영된 바 있다. 이곳에서의 활동을 계기로 한국 대중음악사에서는 한번도 없었던 새로운 움직임인 ‘자립음악생산조합’이라는 음악 생산자 조합이 결성되기도 했다. 현재는 유명무실해진 단체이지만 이들의 움직임은 한국 인디에 독특한 음악들을 대거 도입했다.

두리반 싸움이 끝난 후 이태원에 꽃땅이라는 바가 생기고, 한예종 학생회관 지하실에 대공분실이라는 공연장이, 문래동에 로라이즈라는 공연장이 생기면서 이른바 ‘자립 계열’이라 부를 수 있는 일군의 뮤지션 군들이 자신들만의 음악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이들 클럽들 또한 현재는 모두 사라진 상태다.

이 움직임이 중요했던 이유는 명칭부터 다른 것을 썼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홍대 밴드들은 인디라는 명칭을 불편하게 생각했다. 사람들이 인디는 가난한 것, 뜨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음악을 대한다는 것이다. 두리반 싸움을 계기로 인디 대신 ‘자립’이라는 명칭을 쓰자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자립은 스스로 음악을 만들어 배포하고 공연을 기획하며 자신들만의 공연장을 만들어내는 흐름이다.

이들은 박정근 사진사의 조광사진관을 ‘자립본부’라는 이름 하에 공연장으로 만들었다. 이 공연장에서 자립계열 뮤지션들은 음악을 만들어내고 프로필 사진을 찍고 악기를 연주했다. 이러한 흐름은 펑크 뮤지션들에게도 영향을 끼쳐서 드럭의 흐름을 잇는 클럽인 스컹크헬이 문래동에 자리잡게 했다. 또한 문래동에는 GBN이라는 신진 펑크 클럽이 생겨나기도 했고, 망원동에는 SHARP라는 클럽이 들어섰다.

소규모 해외 인디 내한 공연을 기획하는 기획자 박다함과 철거농성장에서의 연대 공연을 기획했던 황경하 같은 인디 기획자들이 전면에 나선 것도 두리반을 계기로 해서다. 이들은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졌던 홍대 인디의 공연 기획을 사회적으로 의미있고, 문화적으로 되새길만한 것으로 만들어냈다.

두리반이라는 작은 칼국수집에서 파생된 수많은 문화적 사건들은 인디 내부에서만의 일로만 다뤄지지는 않았다. 소설가이자 편집자였던 유채림씨는 두리반 싸움을 기록한 ‘매력만점 철거농성장’에서 자신이 두리반 사건을 어떻게 사회적인 의제로 부상시켰는지를 적고 있다. 유채림씨는 두리반의 사장인 안종려씨의 남편으로 두리반을 세입자와 임대인 간의 권리 문제, 나아가서 소상공인들이 영업권을 인정받을 수 있느냐의 문제로 부각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가 쓴 기고문은 프레시안이나 오마이뉴스, 경향신문 등에 실려 여론을 조성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상가 임대차 문제에 대해 환기하게 되었다.

물론 두리반이 당시 법적인 권리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겨울에 용역을 내세워 집기를 끌어내고 안종녀씨를 패대기친 거대 건설사는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이 싸움은 명동 마리, 분더바 등의 철거 농성 문제로 관심이 모이는 계기가 됐다.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강남에 있었던 한 철거 농성장에 몇시간 동안 머물러 본 적이 있다. 때문에 이 글은 중립적인 시각에서 쓰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두리반 사태 이후에 상가 임대차법이 개정된 것에는 이들의 인생을 건 싸움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두리반은 사실 굉장히 평화스러운 사례이다. 농성을 시작한 후로 한번도 용역에 의해서 침탈당한 적이 없다. 다른 농성장에서는 물리적 충돌이 다수 있었다. 또한 합의서가 공개된 드문 경우다. 합의가 이루어진 다른 곳에서는 합의 내용을 비공개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글에서 두리반의 싸움이 과연 옳았느냐, 혹은 임대차 계약과 관련된 법적 문제에 대해 얼마나 다룰 것이냐를 고민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본다. 만약 이 글을 건물주가 보고 있다면 두리반 같은 상황은 악몽일 뿐이다.

하지만 두리반은 칼국수집이었던 장소를 무단 점거해서 공연장으로 만든 드문 사례이고 이후 사회적 관심과 문화적 파급력을 고려할 때 ‘서울씬’을 논한다면 뺴놓을 수 없는 장소다. 이 장소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결국 수많은 공연장을 만들고 공연을 기획하고 밴드를 결성했다. 한국 인디의 역사는 두리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전의 인디들은 사회적 문제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자신들만의 음악 세계에 집중했다.

하지만 두리반 이후 밴드들은 촛불 시위에서 공연하기도 하고 철거 농성장, 노동조합 시위장을 새로운 공연 장소로 삼게 됐다.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이제 인디 밴드가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게 됐다. 그 첫번째 계기가 바로 두리반이었다.

두리반이 남긴 유산은 아직도 남아있다. 자립음악생산조합은 이제 활동하지 않지만 운영위원으로 있었던 단편선은 프로듀서로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단편선이 프로듀싱한 천용성은 ‘김일성이 죽던 해’라는 인상적인 포크 음반을 냈다. 이 음반은 한국 대중음악상으로부터 최우수 포크 음반으로 선정되었고, 이 음반에 수록된 ‘대설주의보’는 최우수 포크 노래를 수상했다.

천용성은 분더바와 같은 철거 농성장에서 공연을 해왔던 뮤지션으로 자립음악생산조합 출신이다. 아직도 두리반의 열기와 힘은 살아있는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의 한 켠에서 칼국수집이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것은 무척 기묘한 일이다.

인디 대신 자립을 내세웠던 이들이 두리반을 통해 꿨던 꿈은 무엇일까. 500일 넘게 싸움을 계속해오면서 사람들은 각자 내면의 힘을 키웠다. 이 경험은 어떤 사람을 다른 농성장으로 이끌었다. 또 어떤 사람은 음악의 길을 걷게 되어 이름을 알렸다. 어떤 사람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두리반이 남긴 것은 젊은이들의 열정이다. 두리반에서 자주 공연했던 밤섬해적단은 전국의 시위 현장을 다니면서 시끄럽고 빠른 음악을 선보였다. 이들의 연대기는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들은 해체하기 전에 삶에 대한 의지가 넘쳤고 무언가 변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 결과가 아직도 홍대 인근에 위치한 새로운 칼국수집 두리반이다. 나는 가끔씩 그곳에 들러 밤섬해적단의 ‘나는 씨발 존나 젊다’란 음악을 떠올리곤 한다.

“나는 씨발 존나 젊은 인디뮤지션 / 아무데나 술을 먹고 퍼질러자네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 / 아무데나 쓰레기를 갖다 버리네”


약간은 기괴한 광경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젊음이 있었다.

서울씬기행 - 두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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