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퍼텍 나다는 2000년대 예술 영화를 주로 상영했던 대학로의 독립 영화관이다. 1 개관 120석 규모로 동숭아트센터 1층에 있던 이 영화관은 일반 극장에서는 볼 수 없던 다큐멘터리, 예술 영화를 상영했다.
하이퍼텍 나다가 2011년 폐관했을 때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이렇게 말했다.
“나다는 우리들의 방어선이었다. 하나의 방어선이 무너지면 방어선은 더 안쪽으로 밀려들어온다. 우리 모두 영화의 역사에 유죄”
정성일의 말대로 하이퍼텍 나다는 문화의 마지노선과 같은 곳이었다. 이후 스폰지 하우스, 씨네코드 선재 등 독립 영화관이 사라져 현재는 종로에 있는 서울아트시네마가 대표적인 독립영화관으로 남아있다.
하이퍼텍 나다는 영화진흥원위원회로부터 손실보전금을 지원받았지만 매년 5천만 원 이상의 적자가 나 운영이 힘들었다고 한다.
하이퍼텍 나다는 좌석마다 이름이 매겨져 있었다는 것이 특이했다. 해마다 인터넷 여론조사를 통해 뽑은 인물들을 좌석의 이름으로 삼았다. 좌석 중에는 서태지와 히딩크, 배용준의 이름이 달린 것도 있었다.
내가 하이퍼텍 나다에서 봤던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일본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다. 이 영화가 내가 여자와 같이 본 최초의 영화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알게 된 그녀와 가벼운 기분으로 영화를 보러 갔었다. 사전에 정보가 없어서 어떤 영화인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여주인공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소리가 쿵! 하고 들리면서 내 가슴속에도 뭔가가 쿵! 하고 묵직한 것이 자리 잡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일본 밴드 쿠루리의 <하이웨이>가 영화관을 가득 채웠다.
최근에 한지민, 남주혁 주연으로 한국에서 리메이크되기도 한 이 영화는 다리를 쓰지 못하는 여주인공과 대학생 남자와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연히 곤경에 처하게 된 여자 주인공 조제를 돕게 된 츠네오(쓰마부키 사토시)는 조제와 연인이 된다. 선천적으로 다리를 쓰지 못하는 조제는 할머니와 함께 외부와 접촉하지 않고 폐쇄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츠네오는 조제를 바깥세상과 연결하며 그녀에게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츠네오는 조제가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그녀를 동정하지 않는다. 장애를 가진 연인에게 얽매이지 않고 남자 주인공은 여느 연인들처럼 사랑이 끝났음을 통보한다.
생활을 보살펴줬던 할머니가 죽은 이후 여주인공의 생활은 타인의 도움 없이는 성립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남자 주인공과의 이별은 세상과 연결되는 끈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생존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마는 것이다. 조제는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다.
첫 번째 데이트에 이렇게 무거운 영화를 보다니. 지금 생각하면 영화 선택이 한참 잘못됐다. 그런 영화는 혼자서 영화관에 가 봐야 할 영화이지 아직 어색한 사이의 여자와 같이 볼 영화는 아니었다. 우리는 무거웠던 영화의 분위기를 떨치지 못한 채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날이 추웠고 바람이 세게 불고 있었다. 우리는 대학로에 본점이 있는 본죽에 가서 죽을 먹었다. 그녀는 병자도 아닌데 죽을 먹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다. 당시에는 본죽이란 프랜차이즈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서툴고 어색했다.
여자와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또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날 헤어지고 나는 이때의 기억을 좋은 추억으로만 마음에 담고 있었다. 가끔 그때 일이 생각나면 그녀와 만나게 된 인터넷 커뮤니티에 일기 형식으로 당시 일을 적어 올리곤 했다.
그리고 7~8년 후 오랜만에 들른 커뮤니티에는 새로운 소식이 하나 있었다. 해당 커뮤니티에서 만난 커플이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그녀와 커뮤니티의 A의 결혼 소식이었다. A와는 예전에 술도 같이 먹을 정도로 아는 사이였다. 그동안 둘이 사귄다는 티를 전혀 내지 않았기에 조금 놀랍긴 했지만 축하할 일이었다.
커뮤니티 분위기는 좀 이상했다. 결혼식 같은 일이 있으면 게시판에 장소와 시간을 올려서 공지를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미 찾아오는 사람이 적어서 황폐화된 커뮤니티였지만 가끔씩 들르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였다.
이번에는 “어떤 이유 때문에” 게시판에 공지하지 않으니 서로 연락처 주고받은 사람들끼리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라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그녀는 결혼 후 남편인 A가 커뮤니티에 글을 쓰는 걸 싫어한다며 다시는 커뮤니티에 찾아오지 않았다. 당시 나는 표면적으로는 다른 이유로 강제 탈퇴된 상태여서 커뮤니티에 내 주민번호로는 재가입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본 후에야 혹시 그 “어떤 이유”란 게 나를 가리키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결코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녀에게 호감을 표시했던 글을 몇 번 올린 것이 A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모양이다.
정말로 그런지 아닌지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지만. 만약 A와 그녀가 사귀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결코 그런 글을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진실이 어느 쪽이든 인터넷에서의 일은 굳이 마음에 담아두지 않을 정도의 나이는 먹은 후였다. 억울하다고 해서 누구에게 토로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A와 그녀가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행복한 결말이 아니겠나라는 생각만 들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여주인공 조제는 대학생 남자와 연인이 되고 난 후에 동물원에 놀러 간다. 그녀는 호랑이 우리 앞에 바짝 다가가 연인과 함께 호랑이를 구경한다. 그녀는 애인이 생기면 호랑이를 보고 싶었다고, 가장 무서운 동물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내게 또 애인이 생긴다면 나는 그녀와 함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조제가 연인과 함께 호랑이를 구경하는 장면에 도달한다. 나는 그녀에게 말한다.
“바로 이걸 너하고 같이 보고 싶었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거든.”
그리고 같이 쿠루리의 하이웨이를 듣고 또 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