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바도스는 브랜디의 일종으로 사과 발효주인 시드르를 전통방식으로 증류한 술이다. 도수는 40도로 꽤 높은 편이다. 가격도 만만치 않은 이 술을 처음 먹어본 것은 태풍이 들이친 2010년대 어느 날이었다.
당시에 트위터를 열심히 하다가 틸트라는 바가 신촌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주인은 연세대 사회학과 석사를 마친 재원으로 나와 비슷한 나이였다. 그는 가끔 번역을 하면서 바를 운영하고 술을 마시길 좋아했다.
트위터도 그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금세 파워 트위터리안이 된 틸트의 주인, 주영준 씨는 트위터 세계에서 꽤 유명해지게 되었다.
바라고 하면 흔히 아가씨 착석바 같은 불건전한 업소를 떠올리기 쉽다. 갑자기 갔다가는 눈탱이를 맞을 것 같고 뻘쭘한 분위기가 아닐까 걱정되는 곳이다.
나는 술을 처음 마시던 스무 살 무렵부터 혼자서 바에 다녔다. 신촌에 있는 오줌이라는 바였다. 손님이 적고 혼자 마시기에 적당해서 술맛도 모르던 때에 드나들었다. 그때 이후로 바에는 가본 적이 없었다.
틸트는 많은 트위터 세계 주민들이 인증을 올리곤 하던 곳이다. 자연스레 호기심이 생겼고 언젠가는 한번 가야지 하는 생각만 하고 정작 들르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태풍이 서울에 상륙한 어느 날 틸트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신촌까지 갔다. 연세대 앞 약국 거리에 있는 틸트는 소박하고 털털한 분위기였다.
본래는 바텐더가 한 명 더 있는데 그날은 태풍이 몰아친 때문인지 주인 혼자서 잔을 닦고 있었다.
“혹시 영업하나요?”
주인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역시 이런 날에 술을 마시러 바까지 오는 사람은 나밖에 없겠지. 문을 닫고 나가려는 찰나 주인이 이렇게 태풍이 몰아치는 날에 여기까지 오신 김에 술 한잔 대접하겠다고 했다.
그는 깔바도스라는 술을 한잔 내게 내밀었다. 처음 마셔보는, 들어보는 술이었다. 천천히 입으로 들이키자 독한 술이 식도를 통해 위로 내려가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향이 좋고 목 넘김이 부드러운 술이었다.
그렇게 나는 단골바를 가지게 되었다. 지금은 거의 술을 마시지 않지만 서른 살 언저리였던 당시에는 회식을 하고 나서도 혼자서 틸트를 찾곤 했다. 업무가 끝나고 어쩐지 울적한 기분이 들면 신촌까지 가서 술을 마셨다.
틸트는 초기에는 메뉴도, 안주도, 웰컴 푸드도 없는 바였다. 오로지 술만을 마시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었다. 지금은 너덜너덜하긴 하지만 메뉴도 생겼고, 안주도 제조해 판매하며, 웰컴 푸드도 내놓는다.
영업을 한 지 7~8년이 된 만큼 이력이 쌓인 것이다. 정확히 어디에서 선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BEST 바 100곳 중 한 곳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주인인 주영준 씨는 그동안 위스키 대백과라는 싱글몰트 위스키에 관한 책을 번역했다. 칵테일에 대한 개론서인 칵테일 스피릿을 집필하기도 했다.
조선일보의 인터뷰 매거진 탑클래스 기사에서 그는 “석사 논문을 쓰면서 자신의 한계와 맞닥뜨렸다”라고 고백한다. 유학 준비를 하던 그는 인생의 항로를 틀어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바처럼 작은 바를 해보겠다는 결심을 한다.
한국에서 자영업자의 삶이란 고단하다. 백 곳이 생겨나면 몇 년 안에 구십 곳이 문을 닫는다. 이런 현실에서 10년 가까이 바를 운영하고 있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그동안 바 틸트는 트위터에서만 유명한 가게를 넘어 출판 편집자, 인디 가수 등이 드나드는 사랑방 역할을 하게 되었다. 자립음악생산조합 계열의 인디 가수들이 술을 마시기도 했고, 천미지라는 여성 싱어송라이터가 단독 공연을 열기도 했다.
덥수룩한 수염이 트레이드 마크로 신촌 막스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 바 틸트의 주인은 자신만의 독특한 바를 완성해 나가고 있다. 틸트란 포커 용어로 운이 안 좋을 때의 감정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주영준 씨는 틸트의 의역어가 ‘멘붕’이라고 말한다. 멘붕에 빠진 사람들이 모여들어 술을 마시는 곳. 그곳이 바로 틸트다.
바를 운영하는 것이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주영준 씨는 프레시안에 기고한 “나는 어쩌다 ‘악덕 자본가’가 됐는가”에서 “폐허에 조그만 바를 차리고 반년을 쉬는 날 없이 일하며 적자와 맞서 싸우다 결국 건강에 무리가 왔다. 하루 평균 7시간의 야간 노동. 중간에 식사시간이나 쉬는 시간 따윈 없고, 예비군 훈련 휴가 따위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몸이 버텨낼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적었다.
그렇게 장시간의 고된 노동을 하고 난 이후에 그가 떼돈을 벌게 된 것도 아니었다. 바 운영 초기에는 번역해서 번 돈으로 바의 적자를 메우기에 바빴다.
생계형 바 틸트를 꼭 가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주인이 가진 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통해 맛있는 술을 추천받을 수 있다. 술꾼이라면 구미가 당기는 부분이다. 술을 즐기지 않더라도 이곳의 캐주얼한 분위기에 취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수 천미지는 틸트에 대해 “7~8년째 단골인 바”라며 “서울 올라온 이후 가장 오래 다니는 있는 곳이에요. 마스터 분도 그렇고 공간도 그렇고 편하고 재미있어서 자주 갔어요”라고 말했다.
물론 바는 심리상담소가 아니다. 바에 가서 굳이 바텐더와 주저리주저리 떠들지 않아도 된다. 혼자서 바 구석에 앉아 주변의 분위기를 느끼고, 술맛을 되새긴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를 즐긴 것이 된다. 바 틸트는 그런 저마다의 술자리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편안하고 특별한 공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추천을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틸트가 그렇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갔고 또 지금도 다니고 있는 이곳은 꼭 들려야 할 인스타그램 맛집은 아니다.
내킨다면 칵테일을 찍어서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 올려도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신 바에 앉은 주변 사람과 지나가는 말이라도 한번 섞어본다면 그것도 꽤 괜찮은 경험이 될 것이다.
술이 약하다면 바텐더가 그에 맞는 약한 칵테일을 추천해줄 것이다. 술이 세다면 위스키나 진을 시도해봐도 좋다. 가격이 만만치 않으니 지갑 사정이 여유가 있을 때만 도전해볼 일이다. 그래도 한국의 보편적인 유흥업소들에 비하면 바 틸트는 그렇게 비싼 편은 아니다. 소맥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조금 부담되는 가격이다.
바 틸트에 갈 때는 여럿이 가도 좋지만 혼자서 가도 무방하다. 혼자 가면 혼자인 대로 다른 혼자 온 손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나름 달변인 주인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다.
만화에서처럼 혹은 심야식당처럼 마스터와 낭만적인 이야기를 펼쳐볼 수는 없겠지만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만으로도 충분하다.
틸트가 익숙해졌다면 이제 한남동과 이태원의 또 다른 바에도 도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알코올 중독자로의 길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