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패드가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찰나, 새로 갤럭시 탭 A6가 손에 들어왔다. 본래는 여동생이 아버지에게 선물했던 것인데 아버지는 새로운 기종으로 갈아탔다. 덕분에 그나마 쓸만한 태블릿이 생겼다.
아버지는 요즘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한다. 주말에 집에 가면 태블릿으로 중국어 강좌를 틀어놓고 발음을 연습하는 소리가 들린다. 본래는 동생이 쓰던 방인데 동생이 결혼하고 나서는 아버지의 공부방으로 바뀌었다.
아버지와 나의 사이는 거짓말로라도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아버지의 소개로 다녔던 직장을 갑작스럽게 그만둔 이후로 우리 둘의 사이는 소원해졌다. 그 전에도 살가운 부자 사이는 아니었다. 감정 표현을 잘하지 않는 아버지는 내가 나온 대학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대놓고 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와 ‘똥통’ 학교를 다녔다고 말하곤 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서울 중하위권 대학으로 1류는 아니지만 ‘똥통’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는 곳이다. 나도 마음에 드는 대학은 아니었지만 그런 심한 말을 들으면 마음이 상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버지와 나의 사이는 주말에 집에 가도 말을 하나도 안 할 정도다. 그렇게 된지도 벌써 몇 년이 됐다.
이제는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익숙해져서 별다른 생각이 있지도 않다. 주말에 집에 가서 아버지가 있으면 서로 눈인사만 하고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와서 태블릿을 켠다. 아버지가 준 태블릿은 의외로 쓸만하다.
침대에 누워 태블릿을 기대 세워놓고 이리저리 앱 사이를 오간다. 요즘은 보통 트위치를 많이 보는 편이다. 트위치는 아마존에서 인수한 게임 스트리밍 플랫폼으로 아프리카 TV를 위협할 정도로 국내에서도 인기다. 주로 10대~20대들이 많이 본다.
무거운 게임을 돌리기에는 마땅치 않은 기계라서 트위치를 통해 게임을 보는 걸로 대리 만족하고 있다. 시대는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게임을 보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어차피 나이가 들어서 피지컬이 딸리니 스트리머만큼 게임을 잘하지도 못한다.
마음 같아서는 플레이스테이션이나 닌텐도 스위치를 사고 싶지만 생각만 할 뿐이다. 돈이 아깝다. 나는 여전히 아버지의 갤럭시 탭으로 다른 사람이 콘솔 게임을 하는 걸 보는 게 더 좋다.
자주 보는 스트리머는 보통 여자 스트리머다. 남자 스트리머는 2명 정도 팔로우하고 있다. 딱히 남녀차별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태블릿을 보면서 멍하니 있을 때는 여자 스트리머의 영상을 보는 게 낫다.
아버지와 말은 하지 않지만 가족으로서의 연은 독립한 이후로도 끊어지지 않고 있다. 아버지는 퇴직한 이후 재취업하여 직장에 다니고 있다. 매주 집으로 나르는 반찬 값은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주말에라도 편히 쉴 수 있는 이 집도 아버지가 마련한 것이다.
가끔 아버지에게 화가 날 때는 주말에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부모님이 모르는 곳으로 이사를 가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지금 생활이 너무 편안하기 때문이다. 평일에는 오피스텔에서 자고 주말에는 부모님 집에서 자고 오는 게 완전히 루틴이 되었다. 이 생활 습관에서 벗어날 의욕이 내게는 없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삼성 노트북도 아버지가 쓰던 것이다. 갤럭시 탭도 아버지가 쓰던 것, 갤럭시 워치는 어머니가 사준 것이지만 결국 아버지 돈에서 나왔다.
그리고 나 자신.
나란 존재 자체가 아버지로부터 유래했다. 이 사실을 부정하고서는 어떤 말이나 생각도 부질없게 될 것이다. 유교적인 사상을 논하는 게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봤을 때 한 명의 인간이 태어나려면 필요한 기반을 지적하는 말이다.
사람에 따라서 부자 관계는 각기 다를 수 있지만 우리 부자처럼 데면데면한 사이도 있을 법하다. 더 심한 경우에는 원수처럼 지내는 경우도 있다. 트위터에 가면 그런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때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싸우지 않는 게 다행이야~다.
아버지가 내게 갤럭시 탭을 줬고 나는 갤럭시 탭을 매일 사용한다. 그 정도면 아버지와 나의 관계의 끈은 쉽게 끊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할 법하다. 갤럭시 탭은 잔고장이 한번 난 것을 빼면 무리 없이 돌아간다.
얼마 전에 알았는데 갤럭시 탭 A6의 특징은 S펜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태블릿을 떨어뜨려서 실수로 펜이 튀어나올 때를 제외하고는 펜을 볼 일조차 없다. 난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아니고 태블릿으로 메모를 할 일도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S펜 때문에 가격이 어느 정도 상승했을 텐데 도대체 무슨 용도인지 궁금해지는 부속품이다.
하지만 삼성에서 갤럭시탭을 만들 때 똑똑한 연구원들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을 테니 이 S펜에도 나름의 장점이 있고 쓸모가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본다. 아버지와 나의 사이도 이 S펜과 같다. 우리 둘의 가장 큰 특징은 부자관계라는 것이다. 평소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특징이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할 때, 곤경에 처하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가장 빛을 발할 관계다. S펜이 그 나름대로의 장점을 숨기고 갤럭시 탭 안에 쏙 들어가 있는 것처럼 우리 관계의 장점도 어딘가에 잘 수납되어 있다.
물론 당장 S펜의 장점을 말하라면 딱히 할 말은 없다. 스티브 잡스가 말했듯이 사람들은 스타일러스 펜으로 전자기기를 조작하기를 원치 않을지도 모른다. 스티브 잡스는 죽었고 삼성은 여전히 건재하다.
한국에서는 삼성의 논리가 통하는 것처럼, 그 정확히 규정할 수 없는 관계의 논리도 분명히 어딘가에 존재한다. 다음번 주말에 집에 가면 아버지에게 말을 걸어볼까. 소심한 나는 어쩌면 현재의 관계를 더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변화가 싫은 것이다.
변화는 더 좋아지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도 있지만 악화되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S펜이 없었다면 갤럭시 탭은 더 좋은 기기가 되었을까. 그건 또 다른 종류의 이야기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았다면 나는 더 행복했을까. 그건 물론이다.
하지만 그 행복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내 위치에 만족하고 있다. 지금 이대로도 얼마든지 좋다. S펜이 있든 없든 갤럭시 탭은 쓸만한 기기다. 그게 오늘의 내 소심한 결론이다. 여기서 더 나아갈 일은 아마도 조금 먼 미래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