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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문 Jul 23. 2020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Shallow Hal

오렌지 니트, 나만의 안전장치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Shallow Hal (2001)

오렌지 니트, 나만의 안전장치 


쨍한 오렌지 니트를 한 장 샀다. 집에서 15분 정도 걸리는 새로 생긴 호수 뷰의 복합쇼핑몰이었는데 들어서니 생각지도 못하게 옷가게들이 쭈욱 늘어서 있었다. 좋아하는 강릉 카페의 체인점이 생겼다고 해서 내비게이션을 치고 도착한 참이었다. 카페를 향해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아기자기한 옷가게들이 늘어선 거리를 마주하고 주저했다. 들어가서 입어나 볼까. 물론 들어가 둘러는 보겠지만 옷은 분명 맞지 않을 것이었다. 지난주에 갔던 백화점에서처럼 몇 번이나 얼굴이 벌게지도록 입고 벗었다가 맞지 않아 왠지 머쓱하게 문을 나설게 분명했다. 점원이 권하는 옷들은 너무 크거나 구석에 걸려있는 통짜의 멋이 없는 것들뿐이었다.


아무리 임신 전보다 20킬로그램을 육박해가는 임신부지만 취향까지 없어진 건 아니었다. 늘 적극적이고 상냥했던 그녀들이 곤란해하거나 난처해하는 태도들은 지금은 어느새 7개월이 다 되어가 점점 더 불러오는 배를 가졌지만 백화점에서 살랑대며 쇼핑을 즐겨하던 내게 자존감의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오늘은 사야 했다. 오늘 입은 민소매 원피스 속 허연 팔은 내게 소리 지르고 있었다. 오늘 입은 원피스는 자존심 반 오기 반으로 무조건 프리사이즈의 맞기만 한 싸구려 임신복은 입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임신복 사이트에서 원피스 2벌을 겨우 주문한 딸을 알아차리고 엄마가 사 온 민소매 원피스 3벌 중의 하나였다. 엄마는 알았을 게 분명했다. 결혼 후 세상살이의 물가를 새삼 깨닫고 옷은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 사지 않다 보니 6달 만에 옷을 왠지 못 고르게 된 딸과 그 자존심의 줄다리기, 그 양면성을 알아차렸을 게 분명했다. 딱 붙는 민소매 카라티를 즐겨 입던 딸이니 주름져 잘 늘어나고 여름에 시원한 민소매 원피스가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웠던 여름에서 1년도 지나지 않아 엄마가 된 내 몸에 민소매는 부끄러운 것이 되었다. 내 소중한 뱃속의 아이와는 별개로 외면의 변화는 정신적 데미지를 주고 있었다.


이 원피스는 그제 신나게 개시해 이틀 연속 입은 것이었다. 친정에서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옷을 받은 후엔 시원하고 고급스럽다며 팔뚝은 조금 부끄럽지만 마음에 든다며 바로 갈아입고 돌아왔고, 어제는 신랑과 저녁을 먹고 공원 산책을 할 때도 입었었다. 가족들 앞에서는 당당하고 예쁜 임신부 딸이자 누나였고,  신랑은 하루 종일 세수하지 않아도 너무 예쁘다고 하루 종일 쓰다듬어 주는(외삼촌 말로는 '하루 종일 개 만지듯 하는) 남자였기에 가능했던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새로운 카페와 직장에 출근할 때는 안될 일이었다. 무언가 걸쳐야 했고 그것은 지금이어야 했다. 더 이상 스스로와 타인의 눈으로부터 내 자존감이 생채기 나선 안될 일이었다. 나의 휴일인 오늘 카페에 들어가서 바리바리 챙겨 온 책을 읽고 글쓰기를 해야만 했다. 용기를 내야 했다.


다행히 왠지 느낌이 좋던 그 가게에서 마음에 드는 니트를 한 장 샀다. 쨍한 색이 청량하기도 했고, 원피스 위에 입어도 되지만 어깨 위로 걸쳤을 때 멋스러운 느낌이 났다. 카디건과 남방만 권하던 주인아주머니는 어머 외마디 탄성을 질렀다. "예쁜 엄마가 센스도 있으시네요. 너무 예쁘세요. 이것들도 좀 입어보세요." 살가운 주인아주머니의 이런저런 칭찬과 넉살에 애써 새침하게 웃어 보이며 한참을 더 입어보다가 오렌지 니트를 집어 들며 이걸로 할게요 했다.   


생각보다 비싼 가격이었지만 백화점보다는 싼 가격이었다. 보세 가게에서는 그래도 할인해달라고 해볼 수는 있는 것이겠지만 오늘만큼은 그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비싸도 오늘만큼은 나에게 비싸지 않은 것이었기에. 지금 어깨에 걸쳐 팔을 가려준 이 오렌지 니트와 그녀의 살가움은 쇼핑몰의 화장실에 들어서 마주친 전신 거울 속의 살찐 임신부 새댁의 모습을 말끔하게 지워줬다. 다시 젊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돌아갈 수 있게 용기를 줬기에 즐겁게 계산하고 문을 나섰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Shallow Hal (2001)

영화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Shallow Hal (2001)


성격 나쁜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못생기고 뚱뚱한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할 라슨(잭 블랙 분)'은 어느 날, 할은 우연히 유명한 심리 상담사 로빈스 (실제 본인 출연)과 함께 고장 난 승강기에 갇히게 된다. 로빈슨은 할에게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는 특별한 최면요법을 선물하고, 바로 그날 할 앞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로즈마리(기네스 팰트로 분)'가 나타난다.


늘씬한 몸매에 환상적인 금발. 게다가 성격까지 천사 같은 그녀. 그녀와의 시간은 완벽 그 자체이다.

하지만 왜 그녀와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어도 의자들이 다 박살 나고, 수영장에서 다이빙을 하면 쓰나미가 밀려올까. 내 눈앞에 그녀는 이렇게 완벽하기만 한데. 하지만 적극적인 할에게 그녀는 자신의 장단점을 잘 안다며 그를 거부한다.


로즈마리 "난 공부를 잘했고 유머 감각도 꽤 있고 남자 친구는 많지만 애인은 없어요. 외모는 안 예쁘지만 크게 신경 안 써요. 그런데 당신이 자꾸 다르게 말하면 속상하다고요." 


그녀의 반응에 겁내 하는 할. 자신을 예쁘게 여기지 않는 그녀를 자존감이 없는 사이코로 생각하고, 그녀의 아버지와의 식사자에서 이제 연극을 그만하라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소리치며 말한다.


"너무 높은 기준을 세워놓고 현실에 만족 못 하는 사람요. 모르시나 본데 자식도 사람이에요. 감정이 있다고요. 사장님 기준에 모든 걸 맞추지 마세요. 로즈마리가 저에게 처음 자긴 못생겼다고 했을 때 전 귀를 의심했죠. 저런 미인이 어떻게 저렇게 자신을 비하할 수 있나 했어요.이젠 알겠어요."


하지만 최면요법 후 내면의 아름다움이 외면으로 보였던 할은 친구로 인해 최면이 깨고, 그녀의 정체(?)를 보고 고민하지만 그녀와의 시간들을 통해 깨닫는다. 내가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아름다움은 지금의 그녀와는 비교도 안 되는 피상적이었구나, 그리곤 로즈마리의 진짜 모습을 보는 순간 감탄사가 나온다.


할 "와...당신 정말 이쁘군요!"




나도 할처럼 피상적으로 지금 나의 20킬로그램 육박하는 몸매만 볼 것이 아니었다. 로빈스가 최면을 걸지 않더라도 나와 신랑은 사실 알고 있다. 나는 건강한 남자아이의 엄마이고 그 아이는 뱃속에서 잘 뛰놀고 발차기를 하며 잘 먹고 크고 있으며, 늘 퉁퉁 붓고 한 사이즈 커진 내 못생긴 발은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퉁퉁한 발일지라도 신랑에게는 소중한 발이어서 그는 퇴근하자마자 내가 발을 씻지 않아도 소파에서 오랫동안 주물러주는 아내의 발이다.


오렌지 니트가 필요했던, 이 짧다면 짧은 그 순간들을 온 몸으로 마주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잊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내면의 아름다움과 존재를. 나는 한 가정의 단단한 뿌리이며, 한 가정의 자랑스러운 딸이고 며느리이다. 그리고 그걸 잊지 않고 살기 위해 '안전장치'를 많이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건 언제나 소비가 되진 아닐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삶에 대한 열정이 될 것이다. 할과 로즈마리을 다시 한번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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