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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문 Jul 19. 2020

'리틀 포레스트' Little Forest, 2018

쏘울 푸드

나의 쏘울 푸드란 어떤 걸까. 임신 후부터 "임신하니 뭐가 제일 먹고 싶어?"라는 질문을 너무 많이 들어 그 대답을 언제나 생각했다. 정말 힘이 들었을 때 먹으면 힘이 나는 음식이 뭘까, 임신했을 때 드라마처럼 새벽에도 먹고 싶었던 음식은 뭘까. 봄에는 딸기를 많이 먹었고, 여름에 들어서자마자 수박을 이틀에 한통 꼴로 맛있게도 먹고 있으니 나에게는 과일이 쏘울 푸드인 걸까?


아니다. 쏘울 푸드는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세상살이가 새삼 절망적이고 끝이 빤하게만 느껴질 때, 속이 너무 허기져서 온몸에 힘이 빠졌을 때 먹으면 힘이 솟는 음식이 쏘울 푸드일 것이다. 외국 살이와 임신했을 때 정확히 알 수 있는 음식, 나에게 그건 정말 힘이 들 땐 '엄마표 음식'이면 속이 가라앉는다. 시골에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땐 거의 메이드 인 시골 반찬이 식탁에 자주 올랐는데, 얼마 전 외할머니까지 돌아가시자 엄마는 스스로 그전부터 아빠와 가꿔온 시골 텃밭에서 외할머니 대신 열심히 농작물을 수확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전에는 외할머니표가 맛있어서 잘 담그지 않았던 김치들을 외할머니 맛으로 재현했고, 시골 나물들을 부지런히 무쳤다. 봄에는 달래 고추장 무침, 여름에는 시원한 열무김치와 오이김치를 담갔고, 노각무침을 만들어냈으며, 가을엔 아빠와 들깨를 털어 들기름을 짜냈다. 나에겐 이 시골에서 키워내 만들어내는 시골표 음식들이 쏘울 푸드이다. 계절마다 엄마 아빠의 수고로움이 묻어 있고, 다른 사람들이 먹었을 땐 유난히 짠 짠지무침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다.


우리나라의 쏘울 푸드가 담긴 영화는 감히 말하건대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8)'이지 않을까. 겨울에는 눈 쌓인 텃밭에서 꺼내어 끓인 '배추 장국'. 쌓인 눈을 치우는 동안 숙성해서 만드는 수제비, 땡감으로 만드는 곶감, 봄에는 생으로 먹어도 단 양배추로 만든 '양배추 샌드위치'. 감자 빵, 아카시아꽃 튀김, 여름엔 냉콩국수와 대청마루에서 먹는 노지에서 키운 빨간 토마토, 찐 옥수수 등 한 번쯤은 먹어봤을 법한 시골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또 퓨전으로 재해석해 만든 음식들도 많아 보는 재미가 있으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시골에 살아도 전혀 시골 살림 같지 않은 단정한 살림들과 소담한 음식들과 라이프스타일이 참 좋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8)'의 주인공인 혜원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연애, 취업 뭐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상을 잠시 멈추고 고향으로 돌아와 오랜 친구인 재하와 은숙을 만난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숨 가쁘게 살아온 일상에서 늘 '배고픔'을 느끼고 살았던 혜원. 하지만 그렇게 지긋지긋했던 시골의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만의 '농부'의 삶을 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재하’와 평범한 농협 직원으로의 일탈을 꿈꾸는 ‘은숙’과 함께 직접 키운 농작물로 한 끼 한 끼를 만들어 먹으며 겨울에서 봄, 그리고 여름, 가을을 보내고 다시 겨울을 맞이한다. 그렇게 자신이 고향으로 돌아온 진짜 이유를 깨닫게 된 혜원은, 수동적인 삶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봄'을 맞이하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선다. 직접 키운 농작물로 음식들을 만들어 먹으며 '내면의 힘'을 키워 감정적이고 텅 빈 배고픔을 채운 것이다.


감정과 서글픔의 배고픔, 그때 생각나는 음식이 쏘울 푸드라고 생각하니 유독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바로 미역국. 몇 달 후면 매일 먹게 될 '미역국'. 대학 졸업 후 뉴욕에 1년간 방송국과 주 대한민국 총영사관에서 인턴생활, 자칭 '생활 유학'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몇 번의 이사 끝에 만난 맨해튼 중심가 브라이언트 파크 바로 옆 건물 스튜디오에 4명과 룸메이트 생활을 한 적이 있다. 1명도 아니고 3명과 룸메이트 생활을 하려니 좋은 점도 있었지만 고역인 점이 한 둘이 아니었다. 각자의 생활리듬에 따른 생활소음은 물론이고, 왠지 자유롭지 못한 기분도 그랬다. 하지만 좋았던 점은, 외롭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밥을 먹을 때도 그렇고, 퇴근 후 저녁에 트레이더스 마트에서 와인을 잔뜩 사와 서로 다른 와인을 한잔씩 홀짝거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것도 좋았고, 주말엔 차이나타운에 마사지를 받으러 가거나 걸어서 꽤 먼 트레이더스 마트나 홀푸드 마켓을 함께 장을 보는 것도 좋았다. 제일 좋았던 건, 서로의 음식 냄새를 맡는 것과 함께 밥을 먹는 것이었다.


미국은 점심 도시락을 싸가서 먹는 것이 당연한 문화이다. 우리나라처럼 회사마다 같은 메뉴들이 나오는 구내식당이 있는 곳도 물론 있겠지만 대부분 각자의 점심을 집에서 싸가거나 샌드위치나 샐러드 등 간단한 것을 사 먹는 게 점심이었다. 요리를 즐기고 잘하지 못했던 나는 다행히 총영사관에서 인턴 할 당시, 근처 델리에서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다른 부서 인턴들은 모두 사 먹었지만 우리 부서는 영사님의 배려로 식사가 지원되어 다른 룸메이트들처럼 주말 아침 볶음밥이나 국을 일주일 치 끓이지 않아도 됐었다. 다시 생각해도 영사님과 영사관 선생님들의 친절이 아직도 가슴이 따뜻하게 감사하다.


그래서 주말 아침부터 점심 내내, 당시 UN 인턴이었던 언니는 볶음밥을 만들었고, 근처 네일숍에서 일하던 언니는 국 등을 대량으로 만들어 냉동시켜 두었다. 나와 당시 FIT 패션스쿨을 다니던 동생은 음식은 잘 만들지 않았고, 나는 기껏해야 밥을 해서 마트에서 사 온 낫또나 버터나 계란을 사서 밥에 비벼먹거나, 프라이를 해서 집에서 떨어질 때마다 보내줬던 맛있는 신 김치를 함께 먹었었다.


그런데 한창 즐겁던 뉴욕 생활도 힘겨워지고, 출근하기도 싫고 퇴근 후에 갔던 어학원도 지쳐갈 무렵, 향수병에 걸렸다. 퇴근하고 내내 침대에 누워있기만 했다. 휴무일에는 열심이었던 '맛있는 커피집 다니기 프로젝트'도 가지 않았고, 부지런히 다녔던 미술관이며 갤러리며 소호나 브루클린 도보여행도 힘겨워졌다. 그런 몇 주의 어느 주말 아침, 네일 언니가 언제나 그랬듯 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향긋하고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온 스튜디오에 퍼졌다. 미역국 냄새였다. 낯설게 느껴지던 삭막한 창밖의 뉴욕 도시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한국의 내 방으로 이 공간이 변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 언니가 줬던 한 그릇의 미역국은 참 따뜻했었다.


어린 마음에 결심했었다.

"내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면 내 아이에게 이런 기분을 언제나 느끼게 만들어줘야지."


밖에서 마음을 다치고 어떤 힘든 일이 있더라 집으로 돌아오면, 우리의 작은 집에서 맛있는 걸 해 먹고 따뜻한 온기를 서로 느끼고 보호막이 있는 것처럼 지켜줘야지. 그러면 서서히 마음이 치유되겠지. 이렇게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나의 쏘울 푸드'를 떠올리다 보니 그 생각이 퍼뜩 났다. 그리고 지금 나의 쏘울 푸드인 음식들과 나의 뿌리인 부모님과 그 텃밭들, 나의 이 유산들을 행복하게 나의 아이에게도 물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이처럼 나도 언젠가 핀란이가 크면 우리 엄마와 아빠처럼 작은 시골의 텃밭에서 내 아이가 먹을 건강한 농작물들을 즐겁게 수확하며 맛있게 음식을 만들어 나누고 싶다. 그러면 나처럼 우리 아이도 나의 음식을 '쏘울 푸드'로 알고 세상사에 힘든 일이 생겼을 때도 이 음식들을 먹으며 다시 일어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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