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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바다 Feb 21. 2019

현실을 마주하는 법

독서치유심리학자 김영아의 힐링 책방(12)

사람을 자꾸 잃는 CEO의 고민

몇 년 전 겨울, 저를 찾아온 한 CEO는 다른 분들과는 좀 달랐습니다. 자신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껴서 상담을 신청하긴 했지만 도대체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반복했지요. 
그분은 20여 년 동안 세 군데의 직장을 거치며 실력을 쌓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몇 해 전부터는 직접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직장인 때도 능력 있다는 소리를 들었던 만큼 사업 또한 잘 이끌어 나가는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생했습니다. 주요 직책을 맡은 직원들이 계속해서 퇴사하는 것이었죠. 새로운 사람을 뽑는 것도 수고스러웠고, 담당자가 자주 교체되니 업무에도 큰 차질이 생겼습니다. 그분은 요즘 사람들은 끈기가 부족하고 불만이 많다며 혀를 차면서 자신은 누가 회사 시스템에 대해 건의하면 온갖 책을 찾아 읽으며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작동하는 방어기제

저는 상담을 통해 그분이 강한 방어기제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방어기제란 자아를 위협받을 만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무의적으로 자신을 속이거나 상황을 다르게 해석함으로써 마음을 보호하는 심리적 행위를 말합니다. 물론 불편한 감정을 외면하면 상처는 받지 않겠죠. 하지만 과도한 방어기제로 현실을 외면하다 보면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담자의 방어기제는 '지성화'와 '부정'이었습니다. 지성화는 한마디로 지성으로의 도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책을 읽기만 할 뿐, 그다음 단계는 없었습니다.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면서 자신이 직원들과의 관계를 위해 애쓰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지요. 
생각이 많은 사람일수록 두렵고 불안한 감정을 없애기 위해 이처럼 이론이나 논리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정이란, 말 그대로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부정하는 방어기제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 괜찮다고 믿는 것이지요. 
이러한 방어기제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요? 방어기제가 강한 사람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지만, 마음이란 행동에 방영되는 것이기에 저는 내담자가 어떻게 책을 접하게 되었나부터 알아보았습니다. 내담자는 어린 시절부터 방 안에 틀어박혀 독서를 했는데요.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책만 본 날은 대개 선생님께 혼이 나 학교에 가기 싫거나 부모님이 싸워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집에서 뿐 아니라 군대나 직장에서도 마음이 불안할 때면 무엇이든 활자를 찾아 읽었습니다. 결국 그분은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책을 선택해왔던 것입니다.

 

길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게 하는 '책'

제가 내담자를 위해 선택한 책은 바로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1999)이었습니다. 이 책은 어른과 같은 지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성장을 거부하는 오스카라는 인물의 이야기지요. 내담자는 의외로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현실적으로 알려주는 책이 아니지 않습니까?"라면서 책 처방을 거부했습니다. 그분은 독서량이 많았지만 읽은 책 대부분이 자기 계발 도서였고,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지침을 내려주는 책에만 익숙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책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준다고 치유가 될 리 만무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책을 읽는 것이란 지도에서 길을 찾는 것과 같음을 일러드렸습니다. 지도 위의 모든 건물과 자연물을 일일이 살펴볼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를 찾아가는 과정이지요. 독서치유에 있어 그 목적지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반드시 책을 주제나 작가의 의도를 읽어내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 안에서 나와 내 문제를 찾아내면 되는 것이지요. 내담자에게 고전을 추천한 것 또한 그런 의도였습니다. 


거부했던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

제 말에 용기를 얻은 그분은 책을 차근차근 읽기 시작했고 일주일이 지나 다음 상담 시간이 되자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오스카는 꼬마의 몸이 됨으로써 회피를 했던 거군요." 책에서 성인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오스카는 세 살 때 창고 계단에서 떨어져 버립니다. 그 뒤로 몸이 자라지 않죠. 감당하기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면 잠이나 술, 그리고 내담자처럼 책으로 회피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오스카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성장을 거부한 것이지요. 그리고 언제나 목에 건 양철북을 두드립니다. 이 기괴한 모습은 부조리한 사회에 순응하지 않고자 하는 오스카의 의지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물한 살이 되고 아버지 마체라트가 죽음을 맞이하자 오스카는 다시 자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게 됩니다. 작가는 결국 성장하기로 결심한 오스카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오스카가 목에 건 양철북을 벗겼다. 그리고 이제는 "자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가 아니라 "자라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판 위에다 북을 던졌다.

이 장면에서 내담자는 온몸이 저릿해졌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피하지 않고 맞서겠다는 메시지로 다가왔다면서요. 마치 오스카가 되어 북을 던지며 소리친 듯한 환희를 느꼈다는 게 그분의 소감이었습니다. 


문제는 결국 해결해야 한다


저는 내담자에게 그동안 회피했던 문제들을 종이에 적어보라고 했습니다. 그 종이들을 구기고 던지면서 오스카처럼 앞으로의 결심을 외쳐볼 것을 요청했지요. 그분은 어색해했지만 곧 이렇게 외쳤습니다. 
"책으로 숨지 말아야 한다! 현장에 있는 나를 만나야 한다!"라고요.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다양한 문제를 만납니다. 현실을 직면하는 힘을 키우지 않은 채 도망가다 보면 문제는 내 앞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양철북〉에서 오스카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 너는 고아다. 너는 결국은 자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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