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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바다 Mar 07. 2019

나이 듦에 관하여

독서치유심리학자 김영아의 힐링 책방(14)

몇 년 전 이른 봄이었습니다. 머리가 희끗한 남성분이 찾아오셨습니다. 하얗게 센 머리, 구부정한 어깨와 힘없는 눈빛 때문에 70대 후반은 돼 보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대화를 시작해 보니 이제 60대 초반, 정년퇴직을 한 지 1년밖에 안 된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사는 의미가 없노라며 말문을 열었습니다. "정년퇴직 후 첫날은 뭔가 여유롭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둘째 날부터 마치 내가 쓸모없는 인간이 된 기분이 들더군요." 그동안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자부심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밥 한 끼 제 손으로 못 차려먹는 귀찮은 남편, 나이만 먹은 아빠가 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지위가 사라지니 사람들도 멀어지고 한동안은 그들에 대한 배신감에 휩싸이기도 했지요. "내 나이에 무슨…."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하며 무기력함을 호소하는 그분에게 저는 100세 노인을 한분 소개했습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주인공 알란입니다.

소설은 소설일 뿐?

책을 본 내담자는 한참을 투덜거렸습니다. "나이 드는 것도 서러운데 책도 100살 노인네 이야기입니까?" 저는 대답 대신 책의 첫 장면을 함께 읽기를 권했습니다. 책은 100세 생일을 맞은 노인 알란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알란은 100번째 생일 파티를 기다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죠. 

저 양로원에 웅크리고 앉아 "이젠 그만 죽어야지."라고 되뇐 것은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몸뚱이는 늙어서 삭신이 쑤실지라도, 양로원에서 멀리 벗어나 실컷 돌아가는 일이 친구들처럼 여섯 자 땅 밑에 누워 있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지 않겠는가?

중얼중얼 구절을 읽어보던 내담자 분이 고개를 가로젓더군요. "100살이면 오래 살았지 왜 이런답니까, 말 그대로 소설이네요." 그는 더 이상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상담실을 떠나는 그분께 저는 한 가지 당부를 드렸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책을 끝까지 한 번만 읽어보시라고 말이죠. 


삶을 바라보는 100세 노인의 자세

일주일 후 냉정하게 상담실을 떠났던 그분이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민망한 듯 쑥스러운 얼굴가 함께 말이죠. 그분은 "저도 이 노인처럼 살고 싶어 졌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도대체 이 책의 어떤 매력이 그분의 마음을 돌렸을까요?

알란은 100살 생일에 죽음을 기다리는 대신 자기 방의 창문을 넘습니다. 양로원에서 도망친 것이죠. 어쩌다 보니 기차역에서 가방을 훔치게 되고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하나둘씩 합류하게 되면서 말 그대로 모험이 시작됩니다.

노인은 자기가 왜 트렁크를 훔칠 생각을 했을까 자문해 보았다. 그냥 기회가 왔기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자신은 잃을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정말이지 이 중에서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었다. 뭐, 인생이 연장전으로 접어들었을 때는 이따금 변덕을 부릴 수도 있는 일이지.

제가 내담자에게 이 책을 추천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100세 노인 알란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아주 담담합니다. 죽을 고비를 넘긴 직후 알란의 말에서 더 잘 알 수 있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쓸데없다는 거예요. 내가 하루 종일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본댔자,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어요."

알란은 아주 명쾌합니다. 어떤 일에도 불평하지 않고 비참한 인생에 대해 징징대지 않죠. 100년을 사는 동안 하나씩 배웠습니다. 고달픈 인생을 여유롭게 살아가는 열쇠는 마음가짐에 있다는 것을요. 내담자는 100세 노인이 가진 여유에 아주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나이 듦을 슬퍼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변덕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라고 말하는 조금은 말도 안 되는 쿨한 모습이 아주 멋있다고 말입니다. 


창문을 넘는 용기

시간이 지날수록 내담자 분은 바뀌었습니다. 희끗했던 머리는 염색으로 검은 머리가 되었고, 회색빛이었던 얼굴은 생기를 찾았지요. "60이 뭐 대수라고 나를 그렇게 힘들게 했을까요?" 그는 61번째 생일을 맞아 창문을 뛰어넘는 건 못해도 대신 캘리그래피 교실에 등록했다고 하시더군요. 다 늙어서 뭔가를 배운다는 게 주책없게 느껴져 망설였는데 100세 노인 덕분에 용기를 얻었다면서요. 그리고 상담 마지막 날 그분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라며 제게 책의 한 구절을 소개했습니다.

소중한 순간이 오면 따지지 말고 누릴 것. 우리에게 내일이 있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누릴 것인가

열심히 살아온 사람일수록 생의 후반기에 찾아오는 공허감은 더욱 큽니다. 내가 너무 늙었나? 남은 인생의 길이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든다면 이 두 가지 사실만 기억하시면 어떨까요? 내게 남아 있는 시간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아무도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을 슬퍼하며 보내기보다는 즐겁게 보내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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