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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바다 Jan 11. 2019

잘못을 마주하는 일

독서치유심리학자 김영아의 힐링 책방(7)

여러분은 무언가로부터 도망친 적이 있나요? 감당하기 힘든 문제에 부딪혔을 때, 게다가 그 문제가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합니다. 죄책감이라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방어기제인 셈이지요. 물론 문제라는 것은 해결되지 않는 한 언젠가 다시 맞닥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괴로운 일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죄책감이라는 짐


두 해 전 처음 내담자를 만났을 당시, 그분은 무척 위축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성취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목소리에 힘이 넘칠 정도로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지요. 내담자는 한 중소기업 임원으로, 설립 초기부터 대표를 도와 회사가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표의 무리한 투자로 회사 자금 사정은 무척이나 어려워졌고, 그로 인해 많은 직원들을 해고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은 이런 결과를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가깝게 지내온 대표를 말리지 않았습니다. 설마는 현실이 되고, 막상 오갈 데가 없어진 직원들을 보니 죄책감이 커졌다고 했습니다. "저도 직책을 내려놓고 회사를 떠날까 합니다." 한숨을 내쉬는 그분께 저는 베른하르트 슐링크의〈책 읽어 주는 남자〉를 권했습니다. 동명의 영화로도 유명한 소설이죠. 주인공인 열다섯 살 미하엘은 황달로 인해 거리에서 구토를 하다가 한나라는 여인의 도움을 받고, 며칠 후 그녀를 다시 만나 잠자리를 갖게 됩니다. 스무 살가량의 나이 차이에도 두 사람은 매일 만나는데요.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궁금해하는 한나에게 미하엘은 책을 읽어주기 시작하고, 책 읽기와 샤워, 사랑을 나누는 일은 그들만의 의식이 되지요. 그러나 미하엘은 아무에게도 한나에 대해 말하지 못합니다. 

[출처] 다음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스틸
처음에 나는 친구들과 우정이 아직은 하나 이야기를 할 만큼 깊지 못하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적당한 기회와 적당한 시점 그리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결국 한나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는, 즉 젊은 시절의 다른 비밀들과 함께 그녀를 알리기에는 때가 너무 늦고 말았다.

친구들과 함께 있던 미하엘은 자신을 보러 온 한나를 모르는 척했는데요. 다음날 그녀는 사라져 버리죠. 

나의 육체는 한나를 그리워했다. 그러나 육체적 그리움보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은 죄책감이었다. 왜 나는 그녀가 그곳에 서 있었을 때 당장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로 달려가지 않았던가!(…) 나는 그녀를 부인하고 배반했던 것이다. 그에 대한 벌로 그녀는 가버린 것이다.


무지와 무관심이라는 회피


8년 뒤 법대생이 된 미하엘은 세미나를 이유로 참관한 재판에서 한나를 다시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한나가 유대인 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일한 나치 부역자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지요. 한나는 먹고살기 위해 일자리가 필요했으며 주어진 일을 했던 것이라고 진술합니다. 어쩌면 나치 치하의 많은 독일인들이 그랬을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가 불러오는 결과에 무관심했던 것이죠. 미하엘을 수용소로 데려다주는 택시기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형집행인은 누구의 명령에 따라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하는 거요. 그는 자신이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아요. 그는 그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자신한테
방해가 되거나 그들이 자신을 위협하고 공격하려고 해서 그들을 죽이는 것도 아니지요."

하지만 한나와 같은 사람들이 수많은 유대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겠지요. 미하엘은 한나가 단지 문맹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수용소 감시원이라는 직업을 택했으며, 같은 이유로 자신을 떠났음을 알고 연민을 느끼면서도 차마 그녀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출처] 다음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스틸
나는 한나의 범죄를 이해하고 싶었고 동시에 그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내가 그녀의 범죄를 이해하려고 할 때마다, 나는 그녀의 범죄에 대해 당연히 내려야 할 합당한 유죄판결을 내리려고 하면, 그녀의 범죄를 이해할 수 있는 한 뼘의 공간도 남지 않았다.


자신의 잘못을 마주하다


무지하고 솔직했던 한나는 다른 피고인들의 죄까지 뒤집어쓴 채 감옥에 갇힙니다. 미하엘은 부끄러운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수치심을 덜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게 되지요. 

죄를 지은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고 해서 우리가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손가락질을 함으로써 적어도 수치심으로 인한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다. 손가락질은 수치심의 수동적인 고통을 에너지와 행동과 공격 심리로 전환해주었다. 그리고 죄를 저지른 우리의 부모들과의 대결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세월이 흘러 그는 한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녀를 돕기 시작합니다. 한나 역시 감옥 안에서 글을 배우고 홀로코스트에 관한 책을 읽으며 뒤늦게 죄책감을 느끼게 되지요. 내담자는 독서를 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고 했는데요. 한나처럼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일이 벌어진 뒤에는 미하엘과 같이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았으며, 책에 묘사된 독일인들이 그랬듯 마음속으로 대표를 손가락 질함으로써 자신의 죄책감을 덜었다고 말이죠. 퇴직 결심마저 실은 감당하기 힘든 사태를 회피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그분은 깨달았습니다. "회사에 남아서 직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저는 내담자의 결정을 응원했습니다. 울분에 찬 직원들을 대하는 일은 괴롭겠지만, 죄책감으로 인한 심리적 고통은 그보다 더할 테니까요. 


마음속의 짐을 덜어내는 방법
 

〈책 읽어 주는 남자〉는 금기된 사랑과 에로티시즘에 관한 이야기 같지만 전후 독일을 배경으로 한 러브스토리를 통해 독자들에게 철학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한나와 미하엘은 가까운 사람을, 자신의 행위에 따른 결과와 시대의 과제를 외면하고 회피하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나는 그것은 이미 때가 너무 늦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너무 늦은'이라는 것은 없고, '늦은'이라는 것만 있는 것인가, '늦은' 것이 '결코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인가?
[출처] 다음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스틸

한나의 인생이 지연됐다고 느끼는 미하엘은 스스로 떠올린 의문에 대답하지 못하지만, 분명 늦은 것은 결코 없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묻어두고자 눈감아온 문제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마주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것은 마음속의 짐을 덜어내는 첫 단계이자 가장 적절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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