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메뚜기, 지금은 능력자
(이전 글에 이어지는 내용~)
대단한 분들 스무여 분을 모시고 북한 금강산에 갔다.
사실, 20대 여자 선임연구원이 인솔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단체였다.
(사회에서 꽤 높은 지위를 가진 분들이었기에.........)
그렇지만, 나는 내 능력(?)을 과하게 믿어준 연구원의 배려(?)였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어렸기 때문에,
힘듦보다는 내가 출장을 북한으로 가는구나...그것도 회사 돈으로...
그래서 솔직히 조금 기뻤던 맘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련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다.
항상 대접받으시던 분들을 혼자 응대하고 모시려니,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멘...붕...현...타...이런 말들이 이땐 없었지만...그때의 나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표현~)
금강산 가는 길에 들린 고성 식당에서 결국 나는 밥을 먹지 못 했다.
서러움보다 약해 보이는 게 더 싫었던 것 같다.
그렇게 약간의 절차를 거치고 조금은 살벌한 분위기를 겪으며 북한으로 들어갔다.
우리 일행들이 묵은 곳은 해금강호텔!
바다 위에 떠 있는 배 호텔이다.
자려고 누우면 천정이 막 흔들린다. 바닥도 계속 꿀렁거리고...
(그런데 멀미는 나지 않더라...)
체크인을 하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
일행 분 중 한 명이 사라지셨다. 그것도 북한에서...
나와 현지 인솔자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북한이다. 그리고 해가 진 어두운 저녁이다.
무작정 근처를 뒤지며 그분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10여분 만에 사라진 일행을 찾았다.
인솔자를 잘 따라오시다 잠깐 한눈을 파셨는데, 우리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나보다 서른 살은 족히 많았을 그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조금 지연되어 시작된 저녁 만찬장에는 현대아산 대표님이 직접 오셔서 환영을 해 주셨다.
(그만큼 조금 대단하신 분들이 왔다는 얘기~)
하지만, 대단한 분들을 모셔서 힘든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딸 뻘이어서 그런 지 챙겨 주시기도 했고, 추후 내 사회생활에 도움도 많이 되었기 때문!
금강산 워크숍에서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마지막 날 만물상 코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만물상 올라가는 길에 북한 남자 해설자 분이 계셨는데,
남한 관광객들을 많이 접해서 그런 지, 남한의 정치/경제/문화 상황에 정통하신 분이었다.
이 분과 얘길 나누다가,
내가 OO언론사 경제연구원에 다니고 있다고 하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무 거짓말하지 마시래요. 딱 보니 백화점 판매원 같은데..."
헐..................
너무 단호한 목소리로, 거의 화내듯 얘길 해서 굉장히 당황했다.
그래서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지갑에서 내 명함을 꺼내 전달했다.
그제야...
"아.....그렇게 안 보이는데....미안하게 됐소." 하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여기 왜 왔냐, 누구랑 왔냐 등... 그분의 질문에 내가 대답을 하고 있더라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저 사람은 북한 사람인데, 내가 명함을 줘도 되는 걸까?
바로 현지 인솔자에게 가서 물었더니 괜찮다고 하네~
비로소 안심....
(순간 줬던 명함을 다시 달라고 해야 하나 고민했음)
금강산이 생각보다 아름다웠고, 일정 내내 음식도 맛있었기 때문...
그리고, 간간이 마주하는 북한 군인의 빨갛게 튼 볼과 90도 걸음걸이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힘들었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는...
언젠가 다시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면 꼭 다시 가 보고 싶다.
네 번째 직장 얘기는 이쯤에서 갈무리하려고 한다.
회사 내 이슈로 그만두게 되었고, 상처도 있었기에...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왜 자꾸 이런 이슈들이 생기는지....
다섯 번째 직장은, 헤드헌팅 회사 추천으로 입사했다.
짧은 경력이었고, 특출 난 이력도 없는 나였는데...
교육 회사였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지금은 큰 기업에 인수되어 그룹 인재원 역할을 하고 있다.
내가 손 내밀면 잡아 줄 고마운 지인들과의 인연이 이 회사를 기반으로 가장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고마운 일은...
이 회사에서 지금의 남편과 6년 연애의 종지부를 찍고 결혼했다.
지방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꽤 많은 회사 분들이 내려와 축하해 주셨고,
추후 이직을 위해 그만 둘 때도 황송한 송별 파티도 해 준 곳이 이곳이다.
많이 배웠고, 그래서 괜찮은 경력을 쌓았을 수 있었고
여섯 번째 직장은,
다섯 번째 직장 임원 분이 다른 회사 대표로 가면서 나를 스카우트하셨다.
그런데 이 점이 풀기 어려운 문제가 될 줄 처음엔 몰랐다.
나를 스카우트하신 분은 대표이고,
나는 대리급 실무 직원으로, 위로 과장도 있고, 부장급 팀장도 있었던 것이다.
그분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 지,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인 지도 모르고
대표의 의사결정 때문에 날 채용해야 했던 거다.
그래서 처음부터 좋은 시선으로 날 맞이하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쭉~ 그 시선이 크게 바뀌는 일은 없었다.
(사실 오래 일 하지도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이 회사가 국내 유수 대학교의 교수님이 오너셔서, 직원들 학벌이 꽤 높았다.
(나는 지방대 학사 출신....)
모기업 교육 제안서 작성을 내가 맡게 되었다.
정말 열심히 작성했다.
나의 실력이 이 정도다 보여주고 싶었고,
날 향한 삐딱한 시선을 바꿔 놓을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기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제출했고, 다행히 우리가 진행하게 되었다.
시간이 좀 흐른 후, 타 기관에서 제안서 작성 의뢰가 왔다
기 제출된 제안서들은 1부를 회사 공용 책장에 보관용으로 꽂아 두는데,
이때 참고하려고 하나를 열어본 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다.
수행 인력 리스트에 내가 없다!
내가 작성했는데, 내가 없다!
석사 운영자부터 다른 팀 석사 직원까지 쭉 나열되어 있는데 말이다.
화가 났다.
참지 못하고, 곧장 팀장에게 가서 따졌다.
사무실에 꽤 큰 소리가 났다.
4개월 후, 성과 평가 기간에 오너인 교수님께서 날 부르셨다.
"일 열심히 잘하고 있는 거 아는데, 팀장이랑 관계가 안 좋니? O팀장이 성과평가 C 줬네!!"
"네? C요?"
충격이 연타로 왔다.
당시 나는 모그룹 임원 교육을 7개월간 매주 토요일 9시~19시까지 진행하고 있었다.
7개월 동안 내게 토요일은 없었다.
그렇게 일 했는데, 성과평가 C 라니...
억울했다. 많이...
주중엔 야근, 토요일에도 근무하며 오직 회사를 위해 살았던 시간이었다.
그 시간들이 다 부정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만두겠다고 했다.
교수님께서 다시 생각하라고 하시더라. 감정적으로 결정하면 후회한다고...
그리고 그동안 네가 어떻게 일 해 왔는지 내가 다 아니, 연봉은 올려 주겠다고....
그때 교수님께서 해 주신 말씀은 지금도 다 기억이 난다.
정말 진심으로 해 주신 말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더 버티고 다녔다.
아무리 노력해도...
매일 채용 사이트를 뒤지고, 이력서를 쓰고...
그러던 어느 날 한 외국계 기업에서 연락이 왔다.
본사는 미국에 있었고, 여긴 한국지사였다.
들으면 알만한 그룹사에서 모기업 역할을 하며 이곳을 지원하고 있었다.
면접을 보러 갔다.
내가 한 일에 대한 질문, 교육에 대한 질문, 조직생활에 대한 질문 다 무난하게 잘 넘어갔다.
영어 면접도 평범한 질문들이라 내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겨우~ 넘어갈 수 있었다.
임원진 면접과 모기업 책임자 면접을 마치고 채용되었다.
연봉도 꽤 높았고, 직급도 과장이다.
대리와 과장은 완전 다른 느낌이다.
초급에서 중급으로 업그레이드된 느낌~^^
그리고, 여긴 광화문이다.
항상 많은 직장인들로 활기가 넘치는 곳!
맛집이 즐비한 곳!
광화문은 마치 직장인을 위한 도시 같다.
외국계 기업 근무는 처음이었는데,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다.
미국 본사에서 직원 분들이 오시면 같이 밥도 먹고 관광도 시켜 드리고,
본사에서 주최하는 글로벌 행사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원화와 달러 환율의 차이가 크게 벌어져,
국내 기업과 이미 계약된 비용과 실제 받아야 하는 돈의 갭이 커졌다.
실례로, 원화로 1억인데, 달러로는 1억 오천을 내야 하는 상황이 생긴 거다.
자구책을 만들며 노력했지만, 결국 한국지사 폐쇄가 결정되었다.
모기업에서도 지원을 끊었고, O월 O일까지 사무실도 비워야 하는...
그렇게 일곱 번째 회사에서 퇴사하게 되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