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 축하받지 못한 날들
지금의 회사에서 일한 지 1년 반 정도 되었을 때 일이다.
30대 중반 자식 없는 기혼 딸에게 우리 부모님께서는 불평 아닌 불평을 자주 늘어놓으셨다.
"네가 딩크족으로 살면 우리는 손자/손녀 한번 못 안아 보고 인생 끝나는 거 아니냐...
모임에 나가도 자랑거리가 없다.
세상에 태어나 엄마 소리는 한번 들어봐야 하지 않느냐" 등...
나는 부모님께 하나밖에 없는 무남독녀 외동딸이고,
우리 부부는 합의된 딩크족이었다.
열심히 벌어서 가고 싶은 데 가고, 사고 싶은 거 사고, 먹고 싶은 거 먹고,
결혼 후 6년을 그렇게 살았다.
이때만 해도 나는 내가 엄마가 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식당에 어린 아이들만 보여도 눈살부터 찌푸려진 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없으면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심심했을까...삶의 낙이 있었을까...
나도 나이가 들면 지금처럼 남편과 재미있게 살고 있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래! 내게도 자식이 필요할지 몰라...
더 나이 들기 전에 노력을 해 볼까?'
그렇게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그 후 며칠 뒤 우리 부부는 오랜 상의 후, 결혼 6년 만에 부모가 되기로 결심했다.
딩크족 기간이 길었음에도...
우린 3개월의 짧은(?) 노력으로 진짜 부모가 되었다.
두줄 임신 테스트기를 확인했을 때, 예상보다 훨씬 설레고 기뻤다.
딩크족으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나는 온데간데없이 말이다.
하지만, 기쁨은 가족들과 나누는 것일 뿐...
회사에 임신 소식을 알리기는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눈치에 눈치를 보던 어느 날, 나는 용기 내 상사에게 얘기했다.
엄마가 되었다고...
어리석게도 '축하해'란 말을 기대했었나 보다.
그분은 한참 무표정이었다가, 그래? 하시고는 바로 업무 얘길 이어가셨다.
당시 그룹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그걸 내게 맡길 생각이셨나 보다.
평소 온화한 성품의 스마일상 상사가...무표정으로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업무 얘길 하니
나는 속으로 많이 당황하기도 했고 서운하기도 했었다.
임신은 축하받는 거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는데...
회사 입장에서는 전혀 축하할 일이 아니었던 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나는 입덧도 심했다.
뭘 먹기만 하면 토했다! 이걸 토덧이라고 하던가?
하루 종일 뱃멀미를 하고 있는 느낌이라면 이해가 될까?
임신 초기 나는 예기치 못한 토덧으로 인해 인생 최저의 몸무게를 찍기도 했다. ^^
이 와중에도 업무는 차질 없이 이행했다.
배는 불러왔지만, 밤 10시까지 진행되는 최고위 과정 운영도 계속했고
지방 연수원 출장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하자마자 배가 당기는 느낌이 많이 들더니
약간의 하혈이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바로 지갑만 챙겨 병원에 갔다.
진료 마치자마자, 나는 휠체어를 타고 분만실에 입원하게 되었다.
이때가 20주가 채 되지 않았을 때다.
배에 태아 심장 박동을 측정하는 기기들을 잔뜩 붙이고, 누워만 있으라고 했다.
사실 난 고위험 임산부였다.
전치태반이라고...
태반이 정상 임산부와 정반대 위치에 있어 과다출혈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상태였다.
운동도 하면 안 되고, 무리한 신체 움직임도 있으면 안 되는...
그런데, 과정 운영을 다 진행하고 야근도 출장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 모른다.
입원해 있는 동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배 속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고...
회사가 내 인생에서 뭐라고...도대체 뭘 위해 이렇게까지 일을 하려고 했던 건 지...
나 자신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다행인 건, 입원 이틀째 되던 날 퇴원할 수 있었다.
출산 때까지 더 조심하라는 주치의 선생님의 말씀과 함께...
나는 원래 어리석은 사람인 건지..
단기 기억상실증에도 걸린 것처럼 위험했던 순간을 잊어버리고
회사에 복귀해 그 전처럼 일을 계속했다.
여자로, 임산부로, 업무에 차질이 생긴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남자들에게 없는 그 어떤 배려도 받고 싶지 않았다.
쓸데없는 자존심인 지, 자격지심인 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임신 말기가 되자 27kg의 살이 쪘고, 발은 퉁퉁 부어 245가 되었다
(내 발 사이즈는 235다)
전치태반이라 운동은 전혀 불가했고,
호르몬 때문인 지 많이 먹지 않았음에도 살이 급격하게 찌기 시작했다.
임신중독증 증세도 미약하게 나타났었다.
주치의 선생님 왈, 이 상태에서 진통이 오면 위험하니 38주에 수술을 하자고 하셨다.
나는 36주까지 일했고,
2주의 출산준비를 마치고
제왕절개 수술로 지금의 우리 아이를 만날 수 있었다.
아이는 내가 수술실에 들어가 얼마 되지 않아 나왔으나, 내가 수술실에서 나온 건 그로부터 6시간 뒤였다.
혈관 조형술이 6시간 동안 진행되어 남편은 내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고...
그래서, 6시간 동안 수술실 앞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힘들게 무사히 아이를 낳고, 평화로운 조리원 생활에 들어갔다.
내 인생에서 아이를 낳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기 때문에
나는 욕심을 부렸다.
프라이버시가 보장된 강남의 비싼~ 조리원에 가겠다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비싼 조리원에서 나는...우울증을 얻었다.
남편은 바빠서 자주 오지 못 했고,
프라이빗한 조리원이라 가족도 잠깐 면회만 가능했고.
아기 목욕도 방에 와서 해 주고, 식사도 방에 넣어주고, 마사지도 혼자 받고
2주 동안 본의 아니게 벙어리 생활을 하다 보니, 산후 우울증이 심하게 와 버린 거다.
집에 와서도 우울증은 쉽게 좋아지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아이와 육아의 '육'자도 몰랐던 나
내 아이지만 사랑스럽지 않았고, 모성애도 생기지 않더라.
왜 내가 아일 낳아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만 들었다.
회사생활이 그리웠다.
예쁘게 화장하고, 멋있게 옷 입고 출근하는 나로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출산 2개월 무렵, 윗분들에게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네가 없으니 회사가 힘들다. 업무가 돌아가질 않는다. 복귀 좀 빨리 해 주면 안 되겠냐" 등
내가 그렇게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인재였던가?
내가 아무리 모성애가 없었어도...
누워만 있는 아이를 생판 모르는 남에게 맡기고 출근할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지방에 계신 친정엄마께 부탁을 했다.
참고로, 우리 엄마는 내가 대학생일 때부터 네 아이는 네가 키워야 한다고 말했던 분이다.
본인은 본인의 인생이 있으므로 아무리 자식이라도 아이는 봐줄 수 없다고 하셨던 분이다.
나는 모녀지간의 연을 끊기 싫으면 1년만 봐 달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누구 엄마, 누구 아내가 아니라, 내 이름 석자로 좀 더 살고 싶다고 말이다.
그렇게 반강제로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출산한 지 3개월 만에 회사에 복귀했다.
10cm 구두를 신고, 화려하게 차려입고 말이다.
다시 시작하게 된 회사 생활이 예전과 같을 거라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착각의 늪에 빠진 나에게 시련은 보란 듯이 떼 지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